이산호
이산갑은 학당 재건 설계도를 품에 안고 읍사무소로 향했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일본어와 조선어가 뒤섞인 소리들이 들렸다.
"셋째 동생 산호가 여기서 일하고 있지."
이산갑은 복도를 걸어 서기실로 들어갔다. 책상 앞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이산호가 형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형님! 어쩐 일이십니까?"
이산호는 이충헌의 셋째 아들로, 읍사무소 서기로 일하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안경을 쓴 그는 형들과는 달리 행정 일에 능했다.
"산호야, 잠깐 얘기 좀 하자."
"예, 형님. 안쪽으로 가시죠."
이산호는 형을 작은 상담실로 안내했다. 문을 닫자 이산갑은 품에서 설계도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이게... 학당 설계도입니까?"
"그래. 서영이가 세운 학당을 다시 지으려고 한다."
이산호는 설계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교실 세 칸, 작은 도서실, 그리고 마당... 정성스럽게 그려진 설계도였다.
"형님, 좋은 일이십니다. 하지만..."
이산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금 학당 건축 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총독부에서 조선인이 운영하는 교육 시설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습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방법이 있을 거 아니냐?"
"형님, 우선 건축 허가 신청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교육 내용과 교육 방침을 명시해야 하는데..."
이산호는 서류 한 장을 꺼냈다.
"보십시오. '황국신민 교육', '일본어 교육 중심', '신사참배 동의' 이런 항목들에 모두 동의해야 합니다."
이산갑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조건으로는... 서영이가 원했던 학당이 아니지."
"저도 압니다, 형님. 하지만 이것을 동의하지 않으면 허가 자체가 나지 않습니다."
이산호는 형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형님, 제 생각에는... 일단 서류상으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작성하고, 실제로는 다르게 운영하는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이냐?"
"형식적으로는 일본어 교육을 한다고 하되, 실제로는 조선어도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만 매우 조심스럽게..."
이산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산호야, 그게 가능하겠느냐?"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형님께서 산감이시니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학당의 명목을 '산림 교육원'으로 하는 겁니다. 아이들에게 산림 보호와 식물에 대해 가르친다고 하면, 총독부에서도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입니다."
이산호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산림 교육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리 식물의 이름을 한글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육 목적이다'라고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거죠."
이산갑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산호야, 네가 정말 영리하구나."
"형님, 하지만 여전히 위험합니다. 조병수 같은 자들이 트집을 잡을 수 있습니다."
"조병수..."
이산갑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그 자가 학당 부지에 저당권을 주장하고 있어. 어떻게 해야 하나?"
이산호는 턱을 쓸어내렸다.
"형님, 제가 등기부등본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조병수의 차용증이 위조라면 반드시 허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줄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제가 행정 서류를 다루는 일을 하니까요."
이산호는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학당 명칭: 영광 산림 교육원
설립 목적: 산림 보호 및 식물 교육
교육 대상: 지역 아동 및 청소년
교육 내용: 산림학, 식물학, 일본어(형식상)"
"이렇게 신청서를 작성하면 어떻겠습니까?"
이산갑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하지만 산호야, 너도 위험해질 수 있다. 괜찮겠느냐?"
"형님, 저는 비록 읍사무소에서 일하지만, 제 마음은 조선인입니다. 둘째 형님 산우처럼 저도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산갑은 막내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다, 산호야. 우리 삼 형제가 각자의 자리에서 조선을 지키고 있구나."
"형님, 하지만 한 가지 더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
"건축 허가가 나려면 일본인 건축 감독관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감독관이..."
"누군데?"
"시마다 겐죠의 사촌이라고 합니다."
이산갑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시마다..."
"예,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알겠다. 일단 신청서부터 작성해 보자."
두 형제는 한참 동안 머리를 맞대고 신청서를 작성했다. 일본 당국을 속이면서도 서영의 뜻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형님, 이렇게 제출하면 적어도 1차 심사는 통과할 것 같습니다."
"고맙다, 산호야. 네가 없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형님, 서영이 선생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가시는 것, 정말 훌륭하십니다."
이산호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저도 서영이 선생님께 한글을 배웠습니다. 그분이 없었다면 저도 지금 이렇게 서류를 제대로 작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구나..."
"그래서 더욱 형님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서영이 선생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니까요."
이산갑은 막내 동생을 꼭 안아주었다.
"산호야, 조심해라. 우리가 하는 일이 발각되면 너도 위험해진다."
"알고 있습니다, 형님. 하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조선을 위한 일이니까요."
이산갑은 읍사무소를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영아, 네 동생들이 모두 너의 뜻을 이어받고 있구나.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품속의 설계도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산갑은 물러서지 않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