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웠다면 어려웠을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는 무엇이든 한다며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집안 형편은 어려웠지만 나를 믿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대학은 엄두를 내지는 못하고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 형편에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현실에 부딪치고 보니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와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랐다. 그 시절엔 주산은 기본이었고 상업부기, 한글 타자 등 여러 가지 자격증이 있었어야 했고 실무를 배운 적이 없던 나는 내 세울 것이 없었다. 취업준비를 미리 한 것도 아니다 보니 아빠의 아시는 분께 인사드리러 가며 면접을 본 것이 이 다였다. 그렇게 몇 번의 면접을 거치며 알게 된 사실은 취업이 쉽지 않다는 것과 보여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생활에 익숙지 않은 내겐 도전과도 같은 일이었는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되나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은 해야 했고 난 지인을 통해 충무로 복사가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출근을 하고 때때로 야근을 하며 교재를 복사하고 제본을 하게 되는 하지만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팠던 내겐 무척이나 단조로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규칙적으로 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일은 무척이나 열심히 했었던 것 같았다.
별 일없이 일을 다니다 고민을 해보니 무엇인가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당시 한참 유행하던 컴퓨터 학원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집 근처에 중앙전산학원이 있었고 이대로는 안 되겠단 생각에 야간 취업반에 등록을 하고 늦은 저녁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그렇게 몇 번의 회사를 옮기며 야간대학교에 진학한 나는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직장으로 전직을 원했고 그동안의 노력 때문인지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며.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할 수 있게 되었고, 오빠들 사이에서 자란 나는 결혼에 대한 준비도 출산에 대한 준비도 계획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신혼여행에서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시댁과 위아래층에서 생활하는 중에
입덧도 출산도 경험하게 되었다. 큰 아이를 출산 후 나는 아이가 자랄수록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겁이 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뭔가 아이를 위해 배워서 제대로 해주고 싶단 생각과 나중 퇴직을 하더라도 막연하게 단정한 모습의 어린이집 원장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보육교사 과정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공부는 내게 숨겨져 있던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배우는 것도 재미있었고, 교구 제작을 하는 것도, 앞에 서서 발표를 하는 것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걸, 무엇보다 아이들과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나의 모습이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좋았나 보다.
어느 날은 함께 공부하는 친구가 내게 와서 물었다.
“너도 알다시피 난 은평천사원에서 근무를 하잖아, 하지만 나에겐 꿈이 있어, 농촌에 숨겨져 있다시피 하는 방치된 장애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어”
나는 듣고 있다 말했다.
“와우, 정말 멋진 생각을 했다. 사실은 나도 내 아이를 낳고 나면 몸이 불편한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려고 해”
그런 이야기에 내 친구 얼굴이 환해졌다
“응, 넌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래서 얘기인데 혹시 나랑 조금 더 앞당겨서 해볼 생각을 없니?”
난 그 이야기를 듣고 얼굴 표정이 변했다.
“얘는 미쳤니? 난 지금 너도 알다시피 이렇게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있고,
이건 내 아이를 키우고 나중에 내가 퇴직한 후에나 쓸려고 배우는 거야”
“ 너 사람 잘못 봤어.”
그랬다. 생각하고 고민할 틈도 없었다.
일단은 지금의 내 생활은 나의 직업은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다.
친구이다 보니......, 솔직한 표정으로
그 이후로 그 친구는 정색을 하는 나의 표정을 보아서였을까?
자신이 사람을 잘 못 보았다는 것이 상처가 되었을까?
난 그렇게 이기적인 내 그날의 표정을 까맣게 잊고 지내다 문득 떠올리곤 했다.
나의 아들이 장애가 있다는 걸 알고 숨어서 숨어서 집에만 지내던 어느 날,
이대로는 못 살 것 같단 생각에 먹지도 못하는 술을 잔뜩 먹고는 어떻게 살라는 거냐며 죽고 싶단 던 그날을 보낸 다음날, 잠에서 깨어나면서도 아픈 머릿속에 그 친구의 이야기가 들렸다. 그리고 나의 그 목소리도,
얼마나 가식적인 삶을 살았던가?
남은 괜찮고 나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으로
베푼다는 것은 내가 여유로울 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스스로 돌아보아도 부끄러웠다.
신이 계시다면 내가 신이었다면,
“요 녀석, 보게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 그 이후로 더 많은 용기를 냈고,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도 함께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난 아픈 아들을 통해서 내 안의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진심이라는 것, 더 깊은 사랑을 직접 경험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평생 깨닫지도 못했을 것 같은 내게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 준 나의 아들이 너무나도 고맙다.
그리곤 난 자주 이야기한다.
나만큼 완벽한 사랑을 해본 적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