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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쉬는 별 Jan 16. 2022

제10화. 복 받을 수밖에 없는 나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걸 인정하기까지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고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던 까닭에 난 어떻게 해서든 내 아이의 병은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 원인을 알면 치료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임상실험을 하는 프로그램에 지원 신청도 해보았고, 외국병원으로 혈액을 보내 연구해서 알려준다기에 혈액을 체취해 보내기도 했다. 생전 들어보지도 보지도 못했던 희귀병의 자료를 찾아 컴퓨터를 의지하며,  때로는 외국에서 20살 넘어서 까지도 자란 난 아이의 자료를 찾게 되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무슨 치료제가 없었나 확인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성인까지 성장하기 어려워 어린 시절에 사망할 수 있다는 내용을 보게 되면 또다시 절망하기를 하루에 높낮이가 다른 몇 번의 감정으로 오르락 내리락을 했다. 특히 첫째 아이가 딸이기에 왜 그때는 딸아이의 미래까지 이다음에 크면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까부터 닥치지도 않은 미래일 까지 모두 걱정으로 안고 지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난 아이와 함께 병원 가는 일 외에는 어디를 나가고 싶지 않았다. 집안에만 지내며 울다 웃다 감정을 조절 못하니 흑색 얼굴에 눈빛도 불안함이 커졌고. 큰아이가 유치원을 다니면서는 차량에 태우러 나가게 될 때마다 누군가 나에게 아는 척하는 것도 두려워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장애아동이 받을 수 있다는 특수치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전문가분들께 교육을 받으면 그래도 나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요즘은 장애등급에 따라 교육비 지원이 어느 정도 되는 교육기관도 있을 텐데.  그때는 그만큼의 지원이나 시설이 좋은 곳은 대기라는 것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런 치료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걸,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사설기관이라는 특수교육기관을 찾게 되었고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요즘도 그럴 수 있겠지만, 고만한 아이가 두 명이 되는 우리 가족에게는 꽤 부담되었던 금액인 듯했다.     


그리고는 여러 기관을 다니며 대기라는 걸 걸어두기 시작했다. 그리곤 유명하다는 대학병원에서도 정기적인 검사를 받아야 했다. 염색체 이상으로 소아과는 기본이고, 심장에 이상이 있어 소아심장과, 과잉행동으로 소아정신과, 잠복고환으로 소아과 다른 선생님께, 심지어는 장애아를 위한 소아치과까지 모두 6명의 소아과 교수님을 만났는데 이젠 한과는 기억이 제대로 나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인 여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직장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랑의 월급은 넉넉지 않았고, 치료비는 턱없이 모자랐다. 심지어 여기저기 대기를 올리려 오며 가며 움직여야 하는 교통비까지 무리가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래도 무엇이든 포기할 수 없었다. 버는 돈 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빚을 내면서 까지 난 다녔다, 카드로 서비스를 받아가면서 ‘이렇게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행히 아이가 커가면서 여기저기 대기를 걸어둔 곳에 아이가 순번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상담을 받고 다닐 수 있는 곳이 생기게 되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곳에는 어찌어찌 찾아가 접수를 하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치료를 받으며 종교적인 단체가 지원해주는 치료기관이나 시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고, 사설 기관에 비해 좋은 환경과 교육여건이 더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난 아들과 함께 여러 기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집은 경기도였는데 근방 서울 지역에는 좀 더 좋은 시설이 있다는 얘기에 특수치료기관을 찾아다녔다. 조계종에서 운영하는 강북구에 있는 강북 장애인복지관, 수유리에 있는 수녀님들이 원장님으로 계시며 운영해주시는 어린이집, 또한 나의 원래 종교인 기독교 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랑부까지 그러면서도 음악치료를 해주는 대학교까지 그리고 장애인 수영을 알려주는 체육센터까지,   

 

강북 장애인복지관을 가면 조계종 스님이 계셨고, 어린이집을 가면 원장수녀님이 계셨고, 교회를 가면 함께 기도해주는 목사님들과 사랑부 선생님들이 계셨다.

어느 곳을 가던 그분들은 진심으로 가까이 다가오려고 하셨고 종교의 성스러운 기운 때문인지 부모님들의 마음까지 헤아리려 노력해주셨다. 그렇게 꽤 오랜 기간을  이렇게 다녔다.

이러니 내가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 일반인들도 여러 매체나 기회를 통해 다양한 친구들의 모습을 자주 접하다 보니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바뀌고 더 따뜻하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이 생겨 예전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래전 수유역에 버스터미널이 있을 때의 일이었다. 난 아기띠로 아이를 주로 안고 다녔다.

저성장증의 희귀병인 이유로 체구도 작았고 사람 많은 곳에 혹여 아이 손을 놓치기라고 할까 그렇게 집에서 수유리 어린이집까지 매일을 시외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래도 집 앞에 바로 버스정거장이 있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게 다녔던 기억이 난다.

매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언 듯 보기에도 몸이 불편한 아이를 꼬박 안고 다니는 나를 터미널에 매점 아저씨는 오랜 기간 말없이 보셨던 것 같다.    

그런 어느 날 장애인 인식에 관한 설문지인가 아님 새로운 장애인법 개정 때문에 서명을 받을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나도 참 무모했던 것 같았다.

난 우리 아이들이 숨어서 지내는 게 싫었다. 당당하게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이 더 자연스럽게 받아주길 바랬다. 그래서 아이를 안고 사람들에게 터미널에서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때 마침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아주머님들이 몇 분 모여 얘기를 나누시기에 아이를 키워보신 마음으로 조금 더 공감하시겠단 생각으로 그분들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분들은 다행히 관심을 가져주셨다. 그런데 그 관심은 내게로 쏠렸다.

“어쩌다 아이가 그렇게 태어났데요?”

“무슨 병이라고요?”

“아이는 몇 살이에요?”

“엄마는 몇 살?”

“아이고 안됐네 젊은 사람이...”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난 후 난 서명서를 내밀었다.

그때 돌아오는 반응은 의외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분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는 주민번호와 전화번호 주소 때문이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긴 하지만, 결국은 터미널 매점의 젊은 아저씨는 보다 못해 그분들의 모습에  화가 나셨다.     

몇 년은 봐온 그 아기 엄마가 그런 모습으로 거절당하는 모습에 큰소리로 아저씨가 화를 내시기 시작했다. “아니, 해주지 않을 거면서 왜 쓸데없이 물어보냐고”

흥분하신 아저씨가 뭐라 뭐라 하시자 그분들은 더 황급히 자리를 피하신 듯했다.

나는 웃으며 아저씨께 말했다.

“그럴 수 있어요. 그러지 마세요. 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인데. 강요할 수는 없죠”라고,


그리고는 마침 온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집에 도착해서 아이를 내려놓고는 큰소리를 내며 엉엉 울었다.

어쩜 그 아주머님들 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동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더 감정이 상하고 말았다. 여직 이렇게 살아오면서 내가 라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나는 보육교사를 공부하며 천성적으로 아이랑 잘 맞고 아이를 좋아한다고 생각을 해서, 남편과 결혼을 할 때  아이를 3명 낳고 2명은 장애가 있거나 보육원에 있는 아이를 입양해 키우자고 까지 약속을 하며 결혼을 했는데.    

막상 그런 약속이 다른 아이의 장애는 내가 보듬고 안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의 아이에 대한 장애는 내가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남들 앞에 당당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나 스스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는 걸 하지 않았나도 싶었고, 이렇게 받아들이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곤 어느 순간부터 꽤 자주 나의 예전의 약속이 떠올랐다.

‘난 아마도 제대로 성장하는 어른이 될 건가 봐, 이렇게 귀한 감정을 배우고 직접 경험할 수 있으니 말이야.’ 라며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쉽지 않았던 일상이지만 흔들리지 않고 감사히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러기에 오늘도 아들의 자리는 비워있어도 변함없는 엄마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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