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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쉬는 별 Jan 13. 2022

제9화.살아야 한다는데 무슨 우울증

내가 39살이던 어느 날

열감으로 얼굴이 화끈거리고 온몸이 더웠다 추웠다를 반복하며 몇 시간의 잠도 제대로 청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문득 더 아프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예민함도 더 늘었고 그러다 깊게 잠들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게 깊은 잠에 빠지는 상황이 될까도 두려웠다.   

  

그래서 난 집 근처 가까운 종합병원을 찾아갔다. 이유를 알아야 어떻게 할지 알 수도 있었고 약이라도 먹고 제대로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희귀병과 과잉행동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들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내가 아프다는 건 아들을 돌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장애인 활동보조인이라는 직업이 생겨 지금은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심지어 나의 친정엄마는 오랜 당뇨를 앓고 있는 상황이고 오빠들 사이에 태어난 나는 어쩌면 올케들에게 조차 도움을 요청하기도 힘들었다.  

  

예전엔 보다 못한 시어머님이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아이의 진료가 있는 날 시내의 모대학병원에 함께 가시 마 하시고 나서 주셨다.

그날은 심장 검사를 하는 날이다 보니 어머님의 “나와 함께 가자”

라는 말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너무나 든든하고 감사했다. 하지만 상황의 전개는 달랐다.     

심장검사를 하면서 아이가 많이 움직이고 가만히 있질 않으니 수면검사를 해야 했고, 수면제를 처방받아먹고 아이가 잠들 때를 기다렸다. 검사를 하기로 하였기에 수면제를 먹였는데. 아이는 무얼 어떻게 알았는지 기분이 이상했는지 약을 먹고도 잠이 들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이 어떤 것들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였던 것 같았다.


불편함에 몸부림을 치고 약조차 먹이는 것조차 강제로 먹여야 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난 아이의 심장에 혹여 이상이 생겼나 검사를 위해 억지로라도 약을 먹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안 좋으면 수술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보니, 몸부림치고 안 먹으려고 하는 상황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는 아이는  낼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한의 괴성에 몸부림으로 난리가 났다.      

1층 어린이병원에 진료를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는 상황이 되었고, 약을 먹은 후에도 몸에서 느껴지는 불편감에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나 보다. 결국은 충분히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잠들지 않은 아이는 다시 수면제 처방을 받았고 다시 또 아이의 몸 부림은 그렇게 시작하였다.     


어머님은 그런 시선이 익숙지 않고 이런 상황조차 처음 경험하신 이유로 아이의 몸부림에 1층 병원 끝 의자에 앉으셔서 우시기 시작하셨다.

난, 어떡해서든 아이가 갑자기 나빠지는 상황을 만들면 안 된다는 굳은 결심에 아무리 힘들어도 울 수만은 없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 우시며

“난 네가 이렇게 힘들게 와서 고생하는 줄 몰랐다”

며 하염없이 우시는 어머님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그러실 거면 함께 오시지 마세요.”

그 소리에 어머님은 더 소리 없이 눈물을 닦으시며 애써 참으셨다.


어쩜 어머님도 아이를 키우셨던 한 여자로서 나의 모습이 더 마음이 아프셨고

내가 엄마로서 왜 그렇게 밖에 말을 하지 못했나를 알고 계시기에

억지로 눈물을 닦고 안으로 삼키신 걸 나도 알았다.    


내겐 그때 그랬다. 내 기분, 슬픔, 어려움, 남의 눈치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오로지 내 아들만 눈에 보였다.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난 며느리로서 시어머님의 그 아끼는 마음조차 받아들일 여유조차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 전 마지막 이별을 하며 내게 눈물을 보여주신 어머님께 너무나도 죄스런 마음이다.    


그랬다. 난 아들을 지키기 위해 살았다. 내가 아픈 것도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이유도 내가 있어야 나의 아이를 지킬 수 있기에. 나 아니면 아무도 내 아이에게 나만큼 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였다.    

나의 증상을 듣고 산부인과 진료를 권했고 난 갱년기 증상이 내게 온 걸 알았다.

산부인과에서는 호르몬제를 처방해주었고, 신경정신과 진료를 의뢰했다.

그렇게 시작한 신경정신과에서는

“혹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으세요?”라는 의사 질문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절대로 죽으면  되는 사람이에요,   살아야 한다고요"

그런 대답에 의사는 내게 물었다. 무슨 이유냐고

난 얘기했다.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들이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난 죽을 수 없다고 죽어서도 안된다고 그러니까 난 꼭 살 거라고

그런 내게 의사는 말했다.


“우울증 이세요”

난 반박했다

“아니 꼭 살아야 한다는데 무슨 우울증이냐고”

하지만 의사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조차 우울증이라고 난 그 때야 알았다.


내가 몸이 아픈 이유를 하루에 많이 자야 4시간의 잠으로 버텼고 종일을 그렇게 눈도 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나폴레옹도 하루에 4시간밖에 안 잤데’, ‘어차피 잠자는 시간은 죽은 시간이야, 죽은 다음엔 종일 잘 텐데’, 라는 말로 나의 상황은 견뎌낼 수 있는 상황이라고 위로를 하고 괜찮다 하고 지내던 때였다.    

그렇게 나는 호르몬제를 먹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2년 후 급작스레 아들을 잃었다. 난 혹여 아들을 잃어버릴까 손도 놓지 않았던 엄마였는데, 그렇게 눈앞에서 아들을 잃어버렸으니 그나마 다행일 수 도 있단 생각을 아들을 보낸 10년 후에나  그나마 다행이라는 걸 알았다. 혹여라도 아이를 잘못하여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면, 난 아마 이렇게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그때 서야 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이 가끔은 그렇게 길을 잃어 다시 찾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의사 표현이 넉넉지 않은 경우에는 정말 찾기 힘들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 걸 알게 되면서, 어쩜 그런 상황이었으면, 난 아마도 모든 걸 포기하고 아이를 찾으러 다닐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돌아보아도 슬펐던 그날이 언젠 가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그 아이가 내 아들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임을  

알기에 이렇게 그날의 추억조차 모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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