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6일, 겨울의 초입에서
사실 향이라는 카테고리에 발을 담그게 된 건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전까지 이것저것 해보며 정착하지 못하고 있던 취미 부랑자였던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이유라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향에 극히 민감하신 어머니의 영향일 수도 있을 것이고, 학생 신분으로는 구매하기 힘든 가격대라는 현실적인 장벽도 배제하긴 어렵다. 확실한 건, 새 향수를 처음 사 본 것은 불과 작년 3월이었다는 거다.
2023년 3월 즈음에 어떤 글을 하나 보게 되었다. 향수 세일 정보글이었는데, 글에 적힌 유례 없는 대규모 세일이라는 말에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손가락을 움직여 딸깍, 하는 클릭 한 번으로 링크된 페이지로 넘어갔다. 형형색색의 향수가 담긴 깔끔한 직사각형의 향수병들이 주욱 진열되어있는 온라인 몰의 광경, 그중에서도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바로 이것,
봄날의 잔디밭을 떠올리게 만드는 수색의 ‘도쿄 블룸’이라는 향이었다. 다행히 가격도 그렇게 비싸진 않았다. (사실 휴학하는 동안 몇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아놓은 돈이 있는 학생에게 듣도보도 못한 폭의 할인률은 눈이 돌아가게 만들기 충분했다.) 할인 기간인 탓에 일주일 정도를 기다려 받은 나의 첫 니치 향수인 도쿄 블룸, 때문에 다른 향수들보다 조금 더 애정이 가는 향이기도 하다.
어떤 향일까.
도쿄 블룸의 향은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수색 그대로의 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민들레와 바질, 블랙커런트의 조화가 만드는 가볍고 신선한 풀밭의 향이라는데, 사실 나는 민들레의 향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는 못한다. 향을 맡아보면 바질의 씁쓰름한 풀향과 블랙커런트의 시큼한 뒷맛을 가진 프루티한 뉘앙스, 그 사이에 화사하고 밝은 플로럴 향이 느껴지는데 아마 이 향이 도쿄 블룸에서 민들레 향이라는 역할을 담당하는 듯하다. 덕분에 모던 시프레 향에 자주 사용되는 블랙커런트 향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굉장히 가벼운 느낌의 그리너리 향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고 느꼈다.
내가 생각하는.
‘도쿄의 벚꽃이 만발한 화려한 봄’을 연상시키는 브랜드의 향수 소개문처럼 봄이라는 계절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늘 4월에서 5월로 넘어가는 계절의 건널목에 길을 걷다 보면 이곳저곳 만발한 노란 빛의 민들레들이 만개해 있었다. 꽃샘추위가 가시고 여름이 다가오기 직전의 날들에 스니커즈를 신고 등교길을 걷다 보면 길모퉁이에, 인적이 드문 곳에 놓인 벤치 아래에, 갓 꽃봉오리를 틔워낸 철쭉 화단 앞에, 선생님들이 출근하며 대어놓은 차들 뒤편의 좁다란 풀밭에, 눈길이 가는 모든 구석마다 민들레 한 송이씩 눈에 들어오곤 했다. 가끔 민들레 꽃잎이 지고 나면 남는 하얀 솜털을 후, 불어 홀씨를 날리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있는 날도 있었다.
도쿄 블룸이 가져오는 기억은 그런 것들이다. 어린 시절 민들레가 만발한 화사한 봄날의 환희처럼 순수하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누군가에겐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만큼은 잠겨있고 싶은 노스탤지어인 순간의 기억들.
이 글을 쓰는 오늘을 준비하는 어젯밤에도 잠들기 전 베개맡에 세네 번 정도 뿌려놓은 도쿄 블룸과 함께 평온한 잠을 잘 수 있었다. 올해는 유독 무더웠다. 여름의 그림자가 햇빛 아래에서 길게 늘어지고, 11월 초인 이번 주에 들어서야 여름에서 벗어나 짧디짧은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잠에 들기 전에만큼은 늘 봄을 즐기고 싶다. 연두색의 향기가 오늘의 꿈에서만큼은 점점 치열해지고 간절해지는 현실로부터, 걱정도 근심도 없던 어린 봄날의 하루에 나를 데려다주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