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니 앤 크로커스 : 느긋한 어느 날의 브런치

11월 11일, 늦잠으로 시작하는 하루

by 백찬

미처 닫히지 못한 커튼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새어들어와 방 안을 유영하는 먼지를- 그 아래에서 고요한 숨소리를 내는 나를 따갑게 바라보고 있던 그제서야 잠에서 깰 마음이 든 모양이다.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액정을 터치해보니 시간은 어느새 11 : 37, 하루를 시작하기에 꽤나 느지막한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다행히 빠릿하게 움직여 늘 가는 장소에 도착했지만 (그 과정에서 아침 여덟 시의 루틴을 세 시간이나 미뤄서 하루가 그만큼 늦어지긴 했지만) 꽤나 만족스러운 시작이다.


혹시 영화를 좋아하는가? 영화를 보다 보면 가끔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푸근한 침대에서 기지개를 켠다. 커튼 너머의 창문으로부터 넘실거리는 햇살을 만끽하며 미처 다 깨지 못한 잠을 즐기다가 하루를 시작하러 걸음을 옮긴다. 투명한 유리컵에 우유를 가득 따라놓고, 새하얀 접시에는 갓 팬에서 내려 따뜻하고 퐁실한 팬케익 몇 점을 쌓아올려 위에 네모난 버터 한 조각을 올린 후 달콤한 메이플 시럽을 가득 뿌린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시럽이 가득 묻어나는 팬케익을 한 점 맛본다. 연출과 디테일은 제각각이라 해도 공통점이 느껴지는 그런 장면들을 보고 있다 보면 아무래도 어떤 환상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곡물 향을 꽤나 좋아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느긋한 아침에는 꼭 그런 향이 날 것 같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부드러운 우유의 향도, 포근하면서 쌉싸름한 아몬드의 향도, 고소한 밀의 향도 내가 좋아하는 카테고리의 향들이다. 이쯤되면 오늘 내가 소개하는 향과의 연관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허니 앤 크로커스, 조 말론이 2018년 출시한 잉글리쉬 필드 컬렉션의 향이다.


(출처 : fragrantica)



어떤 향일까.


허니 앤 크로커스의 향은 아주 직관적이다. 꿀 향, 그리고 아몬드 향이다. 조향사인 Mathilde Bijaoui의 말처럼 꿀 향은 너무 진득하지도, 너무 밀랍 같이 오일리하지도 않은 부드럽고 따뜻한 적정선의 것으로 느껴진다. 아몬드 향은 굉장히 고소하면서도 풍부하다. 다만 크로커스의 향은 사프란의 향과 비슷하다는데 솔직히 잘 느껴지진 않는다. 오히려 멀리서 맡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약간의 라벤더 향이 푸근함을 더해주는 걸 느낄 수 있다. 잘 다듬어진 재료로 조합된 허니 앤 크로커스는 따뜻한 온도감을 가지고 있어 분주히 하루를 준비하는 아침에 막 봉투를 뜯고 그릇에 부은 시리얼 같기도,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따스한 슬립스탠드의 은은한 빛 아래에서 홀짝이는 데워진 꿀우유의 향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고소하고 달콤하다.


(출처 : pixabay)


내가 생각하는.


이 향을 처음 맡은 건 작년 가을 끝무렵의 어떤 맑은 날이었다. 단종된 지 꽤 된 향이라는 말에 시향은 포기하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지인분이 오트 앤 콘플라워와 함께 보내주신 달콤한 꿀 향은 맡자마자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머리에서 떠오른 건 ‘니트에 뿌리면 굉장히 잘 어울리겠다!’ 는 생각. 포근함, 따스함, 달콤함, 온갖 따뜻함에 관련된 키워드들이 머릿속에 맴돌게 하는 향이지만, 정작 단종이라는 슬픈 소식에 어찌저찌 구한 한 병을 빼고는 구할 수가 없어서 자주 뿌릴 수는 없는 향이다.


허니 앤 크로커스라는 향을 맡으면 어느 여유로운 오전이 떠오른다. 바쁜 일이 없어 근심도 걱정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어느 오전의 시간. 온전한 나만의 공간을 가득 채우는 고소한 브런치의 향. 그렇기에 이 향을 즐기고 있다는 건 역설적으로 내게는 가장 여유로운 날이 아니면 안 된다. 안락함을 모으고 모아 작은 향수병에 담아놓았다. 모든 일을 마치고 마음이 편안한 어느 날에야 보상으로 즐기는 향이라고, 그렇게 정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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