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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강상원 Oct 16. 2024

흩어진 노력, 흐려진 목표: 워홀은 시간낭비 일까? 2

벌써 1년

#벌써 1년


 부모님은 내가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을 한 번도 지지해 주신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꿈을 강하게 반대하셨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기계공학을 처음 접했는데, 그 시간은 내게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1학년 수업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매일 좌절 속에서 허덕였다. 그나마 수학은 흥미로웠지만, 물리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늘 한계가 느껴졌다. 어느 날 동기가 '이해가 안 되면 그냥 받아들여'라고 말했을 때, 그 친구가 천재처럼 보였다. 나는 그저 겨우겨우 따라가는 게 전부였다.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괴로움은 연극영화과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다. 원래 연극영화과에 가서 연출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수능 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가야 했고, 결국 숭실대 기계공학과에 오게 됐다. 매일 학교에 가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버스에서 내려 학교 건물을 바라볼 때마다 원망 섞인 소리를 외쳤다.


 '여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

 '나 여기 안 다닐 거야’

 ‘아, 이 학교 진짜 싫다’


 결국 한 달쯤 지났을 때, 나는 자퇴를 결심했다. 학교 행정처에 가 지금 자퇴하면 등록금을 얼마나 돌려받을 수 있는지 물어봤다. 이 사실을 부모님께 알려드렸다. 하지만 부모님은 4수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집안 사정이 넉넉한 편도 아님에도 재수, 3수까지 지원해 주셨으니 나는 집안의 혜택 받은 죄인이었다. 그런 죄인이 한 번 더 혜택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점을 충분히 인지했어서 학원에 보내 달라 하지 않았다. 그간 3수를 하며 나름대로 터득한 공부법이 있었기에 독서실을 다니며 혼자 공부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마저도 극구 반대하셨다. 재수에서 3수까지 이어지는 수험생활 동안 부모님은 많이 지치셨고, 질려 있었다. 무엇보다 기계공학과를 포기함은 부모님께 말 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당시 기계공학과는 '취업 깡패'라는 별명까지 붙어 있을 정도로 취업에 유리한 학과였다. 미래도 불투명하고, 수입도 불확실한 영화감독 따위는 쳐다봐서도 안 되는 대상이었다. 놀이터에 갑자기 등장한 엄마가 “쟤랑은 절대 같이 놀지 마”라는 경고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연출이 하고 싶으면 집을 나가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나는 체념 한 채로 1년을 버텼다. 그 후 말 그대로 알아서 하기로 했다. 공학인증을 포기하고, 영화와 연출 관련 교양 과목을 듣기 시작했다. 처음엔 기대했던 것만큼의 만족도가 높지는 않았다. 그래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수학은 좋아했지만 그 숫자를 가지고 물리적 현상을 다루는 일에는 염증을 느꼈다.  그 염증이 해소될 곳이 필요했다. 숭실대 기계공학과에 합격했을 때 영화나 연출과 관련된 수업을 꼭 듣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다짐이 1년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은 우연히 내 시간표를 보게 됐다. 부모님은 나를 식탁 앞에 앉혀놓고 시간표를 들이미셨다.


 "이게 뭐야?"


 그 한 마디와 부모님의 눈빛에는 ‘뭐 하는 짓거리야’, ‘왜 쓸데없는 짓 해?’, ‘취업 잘 되는 기계공학과 나 두고, 무슨 엄한 짓을 하는 거야?’, ‘엄마가 쟤랑 놀지 말랬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래?’, ‘우리가 너를 어떻게 공부시켰는데 엄마 아빠를 배신할 수가 있어?’와 같은 말들이 담겨 있었다. ‘하고 싶으면 알아서 해’라고 하셨으니 말 그대로 알아서 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하고 싶으면 너 알아서 해’라는 말은 허락이 아니었다. ‘절대 하지 마’라는 엄포였다. 실망과 분노가 가득한 말이 내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언쟁은 자정을 넘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 언쟁 끝에서 엄마는 내 시간표를 찢어버렸고, 아빠는 몇 번이나 식탁을 내리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결국 나는 다음학기 휴학을 했고, 1년간 아르바이트와 방황을 오간 뒤 입대했다.


 도망쳐야 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세상에서 벗어나야 했다. 제대하는 날이 다가 올 수록 빨리 해외로 가고 싶었다. 그리고 내 꿈을 무시하거나 반대한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성공해 돌아오겠다고 결심했다. 내 안의 뜨거운 기운은 꿈을 향한 열정과 내 꿈의 적대자를 향한 복수심이 적절히 섞여 있었다.(그 당시에는 내 꿈을 향한 열정으로만 생각했다)


 부모님께는 영어 공부 겸 경험을 쌓는다는 핑계로 호주에 간다고 했다. 영화학교라든지 유학이라는 등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출국을 1주일 앞둔 시점에서, 나는 제일 친한 친구들과 송별회를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한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거 시간 낭비야"


 벗어나야 했다. 나를 가두기만 하는 곳에서 빨리 떠나고 싶었다. ‘시간 낭비’라는 말은 나를 깊게 찔렀다.


 그렇게 열정, 희망, 분노, 도피가 적절히 섞인 채로 호주에 왔다. 그리고 어느덧 1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 1년 동안 목표했던 것 중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젼혀 없는 것 같았다. 호주에 오기 전 호기로웠던 기세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어느 늦은 밤, 소파에 누워 지난 1년을 되돌아봤다.


 ‘호주에 온 지 벌써 1년이 넘었는데, 나는 대체 무엇을 이뤘지? 돈, 영어, 경험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것 자체가 무리였나? 지금이라도 한국에 돌아가야 하나?’


 하루빨리 귀국해 복학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현실적이고 옳은 선택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1년 동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갈 수는 없었다. 영어와 경험은 둘째 치더라도, 모은 돈은 푼돈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졸업까지의 학비로는 택도 없었다. 남들은 호주 워홀 가서 몇 천만 원씩 모아 온다는데 내가 모은 돈은 형편없었다. 지금 한국에 간다면 더 큰 조롱을 받을 것 같았다. 그 어떤 선택도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혼돈만 가중 됐다. 불안이 점점 커졌다. 뼛속 싶은 좌절감을 한숨으로 토해 냈다.


 ‘하…. 친구들이랑 소주 한 잔 하고 싶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때마침 친구들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야, 우리 갈매기살에 소주 마시고 있다!"


 친구들은 장난스럽게 나를 약 올렸다.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농담이 반가웠다. 나도 웃으며 농담을 받아쳤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장난을 주고받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중 한 친구가 내 워킹홀리데이 선택을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약 1년 전 무렵처럼.


"너 거기서 뭐 하고 있냐? 그냥 한국 와서 우리랑 놀자. 거기서 뭐 제대로 되긴 하냐?"


 말투는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속에 깔린 무시와 조롱은 느껴졌다. 그 친구는 호주에 오기 전부터 내 선택을 존중해주지 않았고, 호주에 온 후에도 비슷한 말을 계속해왔다. "거기 가서 뭐 할 건데?", "차라리 한국에 돌아와서 제대로 된 일이나 해"라는 식의 말을 해 왔다. 오랜만의 통화에도 그 태도는 다르지 않았다.


 술에 취한 말투와 농담조로 이야기하니 나도 화를 내기 민망했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거기서 얼마나 번다고? 결국 시간 낭비 아니야?"


 ‘시간 낭비’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그 친구의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내 꿈을 위한 여정이 이미 실패로 끝났다고 낙인찍는 것 같았다. 그 친구는 술에 취해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말들을 나를 깊숙이 찔렀다.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도 내 꿈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느낌이 점점 커졌다. 호주에서 겪은 모든 일이 갑자기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불안이 내 마음을 잠식해 나갔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닭 농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닭 발톱에 찔려가며 돈을 모으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나는 내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런 믿음은 사라졌다. 불안과 혼돈만 가중되는 질문들만 계속 떠올랐다.


‘그 꿈이 정말 이뤄질 수 있을까?’

‘내가 이 길을 선택한 게 맞는 걸까?’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까?’


 불안감이 가슴을 조여왔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저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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