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에서 내가 맡은 주된 일은 스프링 쿨러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스프링 쿨러가 작동하는 동안 우비를 입고 작동 안 하는 스프링 쿨러를 정비했다. 쨍쨍한 햇살아래에서 스프링 쿨러를 틀면 금방 무지개가 떴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시원한 빗줄기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은 늘 상쾌했다. 그 무지개와 인공 비 속으로 들어가면 다른 세상에 들어간 듯했다. 세상과 단절된 공간에 들어가는 느낌이 나를 기분 좋게 가라앉혔다. 우비에 달린 모자를 두드리는 물소리와 풀잎과 흙에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졌다.
스프링 쿨러가 다 돌아가고 나면 스프링 쿨러를 해체했다. 파이프 안에 물이 고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파이프 하나하나를 분리해 그 자리에 그대로 뉘어 놨다. 눕힐 때는 작물이 안 다치게 잘 살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스프링 쿨러를 돌려야 할 때면 하나하나 파이프를 다시 연결했다. 매일매일이 데드리프트의 연속이었다.
농장 주인의 아들이 키우는 개가 있었다. 개의 이름은 Spud(감자)였다. 처음에는 내가 잘 못 들은 줄 알고 우리가 농사짓고 있는 그 스퍼드(Spud)가 맞냐고 물어봤다. 맞다고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감자 농장에서 기르는 개 이름을 감자라고 지은 샘이다. 스퍼드는 운동량이 엄청나고, 덩치가 큰 개였다. 성격이 온순하면서 활발해 나도 무척 좋아했다. 스퍼드도 나를 잘 따랐다. 문제는 스퍼드가 나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내 스프링 쿨러 작업을 자주 방해 했다. 내가 스프링 쿨러 파이프를 연결하거나 해체할 때면 늘 내게 달려왔다. 파이프 연결 및 분리 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저 멀리서 덩치 큰 검은 개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 개는 입을 벌린 채 혀를 잔뜩 휘날리며 내게 달려왔다. 얼핏 보면 성격만 착한 동네 바보 같았다. 스퍼드는 내가 파이프를 들 때까지 엎드린 채로 꼬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파이프를 들어 올리는 순간 바로 파이프를 입으로 물었다. 그 채로 파이프를 흔들었다. 스퍼드는 그 쇳덩이를 무는 것이 전혀 아프지 않았던 것 같다. 영락없이 장난감을 물고 흔들어대는 강아지의 모습이었다. 결국 스퍼드의 주인이 “Damm you Spud. Come here!”라고 소리쳐야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래도 노동 중간에 맛보는 귀여움이 좋았다.
농장에 들어가자마자 농장 일이 많았다. 감자를 아침 일찍 출하해야 했다. 그 때문에 새벽에 출근했다. 새벽 3시부터 해 뜰 때까지 수확기가 감자를 수확하고, 나는 수확기에 탑승해 감자와 함께 올라오는 돌 따위를 분류했다. 그렇게 수확한 감자를 옵티머스 프라임 같은 차량에 실었다. 일의 특성상 장갑을 껴도 손과 손톱에는 항상 흙이 묻어 있었다. 집에 와서 샤워를 할 때 아무리 세게 문질러도 손톱에 낀 흙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손바닥의 경우 흙이 깨끗이 떨어져 나가도 묘한 황토색이 보였다. 처음엔 찝찝했지만 이내 신경 안 쓰고 생활했다. 그 손으로 요리도 하고, 설거지도 했다. 그럼에도 그 농장에 있는 동안 한 번도 배탈이 나거나 하지 않았다.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초기 무렵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그 덕에 일주일에 1000불 이상을 벌었다. 제일 많이 벌었을 때는 2000불 가까이 벌었던 것 같다. 결국 대박 농장이란 것을 체험했다. 하지만 이미 호주에서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열정은 사라져 있었다. 그냥 남은 기간 동안 돈이나 모아서 돌아가겠단 마음이었다. 호주에 처음 왔을 때와 달리 무언가 뜨거운 것이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