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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강상원 Nov 21. 2024

여행의 이유와 기술

 호주에 오기 전의 목표를 다시 상기해 봤다. 영어, 돈(유학자금), 색다른 경험. 노트에 이 세 가지를 적은 뒤 지난 2년간의 호주 삶을 되짚어보았다. 기억을 더듬으 내 현재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했다. 그동안 세 가지 목표가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꼼꼼히 따져 보았다. 돈 옆에는 ‘X’ 표시를 했다. 영어와 색다른 경험 옆에는 ‘△’를 그렸다. 이 중 돈과 영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호주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그 시간 안에 영어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 것 같지도 않았고, 돈을 많이 벌 수도 없었다. 그렇게 영어 옆에도 ‘X’를 표시했다. 2개의 엑스와 한 개의 세모가 내 호주 워홀 성적표였다. 오직 '경험'뿐이 유일한 세모였다.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할 색다른 경험을 이 곳 호주에서 했다. 내 경험을 포장하기 위한 정신 승리가 아닌 사실이었다. 하지만 호주 워홀을 온다면 누구나 해봤을 법한 경험담이었다. 커뮤니티 등에 내 워홀 이야기를 올려도 조회수는 높지 않을 것 같았다. 그저 술자리 안주감거리에 불가했다. 하지만 남은 비자 유효 기간을 고려했을 때 유일하게 동그라미로 바꿀 수 있는 대상이라 생각했다. 유일하게 재수강 신청이 가능한 과목이었다.


 처음 호주에 왔을 무렵엔 호주 여행은 보류였었다. 유학 자금과 비상금까지 꽁꽁 싸매고 미국에 갈 작정이었다. 내 계획과 목표를 생각하면 호주 여행은 사치였다. 그럼에도 천해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 채 호주를 떠난다면 그것만큼 후회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호주 여행은 잠정 계획으로 남겨 두었다. 이제 그 잠정 계획을 꺼내 현실로 바꿀 차례였다. 하지만 여행 계획을 짜던 도중 의문이 들었다.


 ‘세 가지 목표 중 색다른 경험이란 목표를 세모에서 동그라미로 바꾸고 싶다며? 많은 워홀러들이 호주 여행을 하는데 뭐가 색다르다는 거야? 결국 나도 남들과 비슷한 경험 하는 거 아냐?’

 ‘그냥 평범한 여행은 안 돼. 특별해야 해. 나만의 여행이어야 해’


 약간의 강박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들과는 다른 여행을 해야한다는 강박이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일종의 도전의식이 고취됐다. 적어도 나만의 이야기를 여기서 만들고, 한국에가면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킬 수 있을것 같았다. 남들이 호주에서 뭐하고 왔는지 물어봤을 때 다른 워홀러들과는 다른 대답을 내놓고 싶었다. 그것만이 내 워홀 경험에 실패 낙인을 막아줄 것 같았다. 여권에 ‘도태’라는 도장 자국을 안남기게 해 줄 것 같았다. 나만의 여행은 무사히 한국 입국을 허락해 줄 일종의 비자로 느껴졌다.


 나만의 여행이 무엇일지 고민됐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매일 여행 정보를 수집했다. 지구에 흩어져 있는 여러 도시를 조사하고, 각각의 매력을 알아보는 일은 재밌었다. 호주 및 동남아시아 위주로 찾아봤다. 호주만 여행할지, 둘다 여행할지 고민이었다. 가능한 많은 곳을 가보고 싶었지만 집착하지 않으려 했다. 여권에 찍힌 도장 개수가 꼭 의미 있는 여행으로 이어질 것 같지 않았다. 각각의 여행지에서 내가 느낀 생각과 감정이 더 의미 있을거라 믿었다. 찍은 사진 수보다 내면에 새겨진 다양한 정서가 더 중요할거라 생각했다. 


 나의 괴로움이 목표 좌절과 상실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꿈에 대한 내 가치관과 철학이 부재해서 온 것인지 알아야 했다. 즉 내면 탐구를 위한 여행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몇가지 원칙을 세웠다.


 1. 느림의 미학: 유명 관광지를 숙제처럼 돌지 말 것. 특정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그곳의 일상을 경험하기. 속도보다 깊이에 집중해 성찰의 여유를 제공하기.


 2. 자연 속에서 시간 보내기: 외부 자극에서 벗어나 고요함 속에서 내면 목소리에 집중 해 보기.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사색에 잠기기. 나와 세상을 연결 해 보기.


 3. 미니멀리스트 여행: 필요한 물품만 최소한으로 챙겨 여행하기. 불필요한 소비하지 않기. 물질적 소유를 줄이고, 필수적인 것에만 집중 해 내적 자아에 몰두하기.


 4. 일지 작성: 사소한 것이라도 기록하기. 여행하며 느낀점 조금이라도 작성하기.


 여행 계획은 삶에 활력을 되찾아 주었다. 퇴근하면 늘 리쿼샾에 들러 술을 사기 바빴다. 하지만 여행이란 목표가 생기니 발걸음을 헬스장으로 돌릴 수 있었다. 여전히 어떤 여행을 할지 고민 이었지만, 여행을 위한 계획이나 자료 조사는 매일 했다. 구글 맵을 들여다보면서 여러 동선을 그려봤다. 그때마다 호주가 어마어마하게 큰 땅임을 느꼈다. 그렇게 호주가 단순한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대륙임을 실감하던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대륙을 자전거로 횡단한다면!?’



 구글 맵은 자전거 경로를 검색할 수 있다. 내가 있는 번버리에서 아들레이드, 멜버른을 거쳐 동생이 있는 시드니까지 경로를 검색해 봤다. 자전거로 평원만 달리면 심심하니, 해안 도로 위주로 경로를 설정했다. 경로를 탐색 해 보던 와중 엄청난 사진을 발견했다. 장엄한 대자연에 압도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곳이었다.

 서호주와 남호주를 잇는 유일한 포장 도로인 Eyre Hwy가 있다. 총 길이가 1,675km이다. 샛길이 없지는 않지만 사실상 외길로 봐도 무방하다. 더욱이 중간에 마을이 없고, 편의 시설도 드물다. 그럼에도 이 도로를 통과하고 싶었다. 그 길이 내 모험심과 도전욕구를 자극 시켰다. 위험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간 중간 볼 수 있는 장엄한 광경이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분다 클리프(Bunda Cliff)’ 사진을 보는 순간 강력한 욕구가 솟아  올랐다. 그 풍경을 눈에 꼭 담고 싶었다. 분다 클리프는 거대한 절벽과 절벽 아래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를 감상 할 수 있는 장소다. 시기를 맞춘다면 근처에서 남방긴수염 고래를 볼 수 있고, 운이 좋다면 흑등고래까지 볼 수 있다. 아쉽게도 내가 여행을 떠다려던 무렵에는 고래를 볼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내가 경험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웅장한 크기의 낭떠러지 끝에서 수천년간 파도를 맞은 절벽 단면, 끝없이 펼쳐진 절벽 윤곽선, 절벽을 때리는 파도 소리, 호주와 남극 사이에 펼쳐진 드넓은 바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전거로 가로지르고 싶었다. 대자연을 온전히 느끼며 한 점으로서 존재하고 싶었다. 그렇게 단애(斷崖)에서 황홀경에 빠져들고 싶었다. 


 그렇게 루트를 짜고 나니, 자전거로 약 200시간이 나왔다. 매일 7시간씩 탄다면 한 달 안에 호주 남부 해안을 다 둘러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욕심이 조금 생겼다. 가능하다면 울루루(Uluru)도 다녀오고 싶었다. 시시각각 다른 빛을 반사하는 지구의 배꼽과 그 위로 쏟아지는 별. 자연의 황홀경에 흠뻑 빠지길 바랬다. 동생이 있는 시드니는 반드시 가야 했다. 그리고 호주에 왔는데 오페라 하우스를 못 보고 갈 순 없었다. 시드니에 도착하고 나서 동생과 함께 뉴질랜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과욕을 부리지 않기로 원칙을 세웠지만 여행의 기쁨이 주는 고양감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새롭게 생긴 목표에 흥분됐다. 동시에 여행의 위험성 또한 인지했다. 한국은 어딜 가든 가로등과 편의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호주는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아무것도 없다. 더욱이 지나다니는 차도 거의 없다. 내 여행 루트는 자칫하면 길에서 객사하기 쉽상이었다. 나는 위험성을 줄이면서 동시에 여행을 더 특별하게 만들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동행을 모집하기로 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퍼스(Pearth) 지역을 기반으로 한 각종 여행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그중 활발한 커뮤니티 몇 곳을 골라 글을 올렸다. 상세 루트, 날짜, 예산 등을 적어서 포스팅했다.


 다음 날 페이스북에 접속하니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종모양 알람 표시에 엄청난 숫자가 기록 되었다. 마치 시뻘건 불이 난 것 같았다. 그것이 댓글이든 좋아요든 사람들이 엄청난 반응을 보여줬음이 분명했다. 흥분된 마음으로 글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사람들 반응은 뜨거웠다. 다만 내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뜨거웠다. 몇몇 사람들이  비현실적이고 멍청한 계획이라며 비웃었다. 이에 반응한 몇몇 사람들은 나를 옹호했다. 누군가 "What a stupid dream(바보 같은 꿈이네)"이라고 코멘트를 달면, 누군가 "No one is allowed to laugh at someone’s dream(다른 사람 꿈을 비웃으면 안돼)"이라고 되받아쳤다. 어느덧 여행과 관련된 이야기는 사라졌고, 사람들은 서로 싸우기 바빴다. 여행의 현실성 여부는 더 이상 토론 주제가 아니었다. 개인의 자유, 타인의 삶에 간섭할 권리, 비난과 비판의 차이,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 등. 이대로 놔두면 계속 싸울 것 같아 글을 삭제했다.


 사실 조금 비현실적인 계획임을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담도 있었다. 자전거로 애써 힘든 여행을 떠나려는 마음이야 그렇다 쳐도,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었다. 시간과 비용도 부담이었다. 동료 모집의 글은 수많은 경고 문구로 도배됐지만,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내 계획을 객관화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계획을 수정했다. 퍼스에서 아들레이드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자전거 여행은 아들레이드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분다 클리프는 포기했다. 하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절벽위를 질주하고 싶은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들레이드에서 멜버른으로 향하는 길목에 “그레이트 오션 로드(Great Ocean Road)”가 있다(정확히는 우회 경로지만). 이 도로에서 내 꿈을 이룰수 있었다. 게다가 그레이트 오션로드에는 “12사도 바위(The Twelve Apostles)”를 비롯해 더 멋진 경치가 있다. 계획을 수정하니 시간과 거리가 확 줄었다. 시간과 거리가 줄어든 만큼 비용도 아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동행은 구하지 않고, 나 혼자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여행하는 동안은 Ted가 아닌 내 한국 이름으로 다니기로 결심했다. 남은 호주 생활 동안 원래 이름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집 앞 미용실에서 머리도 새로 자르고, 마트에 들려 염색약도 샀다. 완벽한 금발을 원햇는데 실패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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