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퇴근길에 히치하이커를 봤다. 멀리서 봐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재밌는 경험이 될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이 그녀들을 태우기 전에 얼른 덜덜이를 몰았다. 그녀들은 퍼스에서 오로지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여자임에도 자기 몸보다 큰 가방을 각자 매고, 로드트립 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덜덜이 뒷좌석에는 문이 없었다. 조수석을 앞으로 기울이고 타야 했다. 히치하이커 한 명이 뒤로 가 앉았다. 나는 다른 한 명은 조수석에 앉을 줄 알았는데 일행과 같이 뒤에 앉았다. 두 히치하이커 모두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앉은 모습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출발했다. 나는 “Where are you from?”을 시작으로 외국인들끼리 만나면 흔히 하는 질문을 던졌다. 프랑스에서 온 그녀들은 그저 단답으로만 대답했다. 대답을 하고 나면 자기들끼리 프랑스어로 이야기하기 바빴다. 나는 어색한 공기를 깨고자 질문을 던졌다. “프랑스 와인과 이탈리아 와인 중 어떤 게 더 좋아요?”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있어서 두 나라가 열정적으로 그리고 재치 있게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좋은 질문이 될 것 같았다. 한 명이 “두 와인 모두 좋아”라고 대답하곤 핸드폰만 들여다보기 바빴다. 다른 한 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두 프랑스 여자 모두 전혀 소통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나도 조금은 짜증이 났다. 히치하이킹 매너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들의 태도는 예의 없다고 느꼈다. 여행 도중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최소한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 같았다. 나도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끼리 오가는 프랑스어만 침묵을 매웠다. 운전기사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대충 그들을 내려줬다. 우리 덜덜이에 그들을 태운 것이 후회됐다.
그들의 행동이 비매너라고 느낀 이유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문화 차이로 인한 해프닝일 거라 짐작했다. 예전 함께 살던 프랑스 친구는 미국의 스몰토크 문화를 무례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개인의 자유보다 공공의 법도와 예의 등이 더 중요한 사회에서 자랐다. 호주인의 의연이 궁금했다. 다음날 출근해 올리버와 이야기를 했다. 올리버는 무례한 행동이라고 했다. 이어서 히치하이킹에 대해 말했다.
호주에 히치하이킹 문화가 있지만 주로 유럽 사람들이 한다고 알려줬다. 정작 호주인들은 대부분 차가 있어 히치 하이킹을 할 일이 드물다고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또 다른 직원은 이들을 욕했다. Free Ride를 뻔뻔하게 요구하는 문화를 만들었다는 게 이유였다(이 분은 연세가 제법 있었다). 그 무렵이 농장주가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여행을 하고 왔을 때였다. 농장주는 프랑스 여행이 최악이었다고 말했다. 음식과 볼거리는 최고였지만 사람들이 차갑고 별로라고 했다. 호주인 특유의 환영하는 태도와 프랑스인 특유의 시크함은 좋은 조합이 아니었다.
그저 프랑스인 특유의 시크함을 맛본 경험으로 삼기로 했다. 다만 우리 덜덜이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히치하이킹 경험을 한 점이 유감이었다.
덜덜이는 오래된 똥차였다. 하지만 그 똥차가 나는 사랑스러웠다. 창문을 여는 것도, 차를 잠그는 것도 전부 수동이었다. 덜덜이 운전석 문은 밖에서 잠글 수 없었다. 운전석 문에 달린 차 키 구멍에 키를 꽂아도 키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차에서 내린 뒤 운전석 잠금쇠 버튼을 누른 후 차문을 닫아야 했다. 즉, 차를 잠그기 위해 차키는 필요 없었다. 그래서 가끔 깜빡하고 차키 뽑지 않았고, 차를 잠가버렸다.
처음 차키를 안에 놔두고 잠갔을 때는 당황스러웠다. 얼핏 옛날에 티브이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리며 옷걸이를 이용해 문을 열었다. 자동차 털이범 같은 좀도둑이 된 것 같았다. 철사로 된 옷걸이를 개조해 갈고리처럼 사용했다. 창문이 들낙거리는 틈새로 내가 만든 자동차 문따개를 집어넣었다. 적당히 들어갔다 싶었을 때 갈고리 부분을 살살 돌렸다. 무언가 걸리는 느낌과 함께 차의 잠금장치가 들썩였다. 그것이 차의 잠금 버튼과 연결된 부분임을 알 수 있었다. 적당히 걸린 느낌이 들어 (옷걸이였던) 문따개를 위로 당겼더니 잠금 버튼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능숙해졌다. 깜빡하고 차키를 놔둔 채 차를 잠그는 일은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한 번은 마당에서 차 문따개로 차 문을 열고 있던 도중 한 백인 아저씨가 지나갔다. 그는 날 의심하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의 상상이 십분 이해됐다. 즉시 오해를 풀지 않으면 그가 나를 신고할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을 보며 “Don’t worry. It’s my car. I locked it with leaving my key”(안심해도 돼요. 제 차예요. 키를 안에 놔두고 잠가버렸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고 손짓하며 계속 걸어갔다. 경찰이 오는 귀찮은 일이 발생할까 걱정됐다. 다행히 우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연식은 거의 20년이 되었고, 주행 거리는 15만 km를 넘은 상태였다. 시속 80km만 되어도 차체가 흔들렸고, 100km면 크게 덜덜 거렸다. 게다가 시속 100km까지 속도를 내려면 한참을 달려야 했다. 어떤 스포츠카는 제로백이 5초도 안 걸린다는데 덜덜이는 5분은 필요했다. 와이퍼는 움직일 때마다 뻑뻑한 소리를 냈다. 창문은 어렸을 때나 봤던 회전식 수동 장치였다. 장치를 잡은 채 마구 돌려야 했다. 그 마저도 조수석 창문은 다 내려가지도 않았다. 그만큼 낡고, 잔고장이 많은 차였지만 연비는 제법 좋았다. 뭐 하나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아도 자동차의 본질은 잘 지키는 덜덜이가 좋았다. 그냥 덜덜이가 예뻤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세차를 해 주었다. 시골길을 오다니니 금세 더러워졌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나이가 많은 덜덜이는 이미 겉면이 낡고 해져 있었다. 새 차를 해도 큰 차이는 없었다. 그래도 덜덜이를 아끼는 마음에 꼬박꼬박 씻겨 주었다.
당시 무기력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허리는 아프고, 마음은 지쳐 있었다. 덜덜이도 똥차답게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당장 폐차 시켜도 이상하지 않았다. 후드를 열면 차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장비들이 많이 낡았음을 알 수 있었다. 가끔은 왠지 쓰임새가 없는 내 처지와 닮아 보였다. 그럼에도 덜덜이는 내 출퇴근을 책임져 주었다. 심지어 나는 덜덜이가 아주 잘 달린다고 느꼈다. 덜덜이가 덜덜거리며 달릴 때마다 덜덜이의 마지막 불꽃을 나를 위해 태우는 것 같았다. 내 마지막 호주 일터의 왕복을 책임져 주는 덜덜이가 어여뻤다. 내 인생 첫 차와 쌓은 잠깐의 추억이 무척 즐거웠다. 그리고 덜덜이 덕분에 하나 배운 교훈이 있었다. 어떤 물건이든 내가 정 붙이는 물건이 최고임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아끼는 옷, 아끼는 신발과는 느낌이 달랐다. 물건에 처음으로 고마움과 애잔함을 느꼈다.
그런 덜덜이와 헤어질 때는 조금 눈물이 났다. 진진에서 알게 된 한국인 커플이 있었다. 그 동생들에게 덜덜이를 넘겼다. 내가 800불에 구매했다고 하자 동생이 700불에 넘겨 달라고 했다. 나는 600불에 넘겼다. 차키를 건네고 나서 덜덜이를 안아줬다. 호주의 뜨거운 햇살 때문에 덜덜이의 표면이 너무 뜨거웠다. 오래 안아주며 인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동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길목을 떠나는 내내 덜덜이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동안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