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헤어지고 글레넬그 해변에서 자전거 하나를 발견했다. “Sale for 50$(불에 판매합니다)”라고 적힌 종이가 자전거에 붙어있었다. 나는 종이에 적힌 번호로 연락을 했다. 10분 뒤 연세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나타났다. 자전거 상태가 좋아 보였는지 옆에서 거래를 지켜보던 한 아저씨가 “Nice deal(좋은 거래)”이라는 말을 건넸다.
글레넬그에서 자전거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자전거는 튼튼했고, 기어도 부드럽게 돌아갔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가속이 시원하게 됐다. 이 자전거로 본격적인 로드 트립을 할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신나는 마음으로 자전거를 타는데 갑자기 페달이 헛돌았다. 정확히는 페달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길에 떨어진 페달을 주워와 다시 연결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다시 분리되었다. 때마침 자전거 샾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가게에 가서 고장 난 부분을 보여주니 크랭크 암과 페달의 연결부가 약해진 상태였다. 수리비가 50불이 나왔다. 결국, 100불이나 주고 자전거를 산 셈이었다. 다시 가게를 나와 힘차게 자전거를 밟았다. 아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다른 느낌이 또 얼마 못 갔다. 문제의 페달이 또 떨어져 나갔다. 나는 잔뜩 화가 난 상태로 자전거 샾에 다시 갔다. 가게 주인은 다시 고쳐 주면서 내게 말했다. 수리해도 얼마 못 가 또 같은 말썽을 일으킬 거라고 했다. 판매한 할아버지와 “좋은 거래”라며 바람 잠은 아저씨 둘이 사기꾼 듀오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쓰린 속을 안은 채 자전거를 처분하기로 했다.
애들레이드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호주의 유명 중고 거래 프랜차이즈인 캐시 컨버터스(Cash Converteers)가 차이나타운에 있었다(호주 워홀을 간다면 이 중고 상점을 한 번쯤은 들리게 된다. 각종 중고 물품을 사고, 파는 곳이다. 보통 중고 거래는 한인 커뮤니티를 이용하지만 캐시 컨버터스 같은 곳을 이용하기도 한다). 자전거를 처분하는 김에 차이나타운도 둘러볼 요량이었다.
애들레이드 차이나타운은 퍼스의 차이나타운과 달랐다. 훨씬 볼거리가 많았다. 퍼스의 차이나타운은 허름한 골목에 각종 아시아 식당이 들어선 형태였다. 하지만 애들레이드 차이나타운은 영화에서 보던 화려한 색감을 자랑했다. 나는 화려한 거리를 구경하며 중고 상점으로 향했다. 10불에 거래했다. 보자마자 10불을 외치길래 황당했다. 최소 30불은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거래의 프로였다. 사기당한 자전거에 염증이 가득해 그냥 거래했다. 오히려 속 시원했다. 그리고 자전거는 중고가 아닌 새것으로 사기로 다짐했다.
거래를 마친 뒤 허기가 몰려왔다. 생각해 보니 새벽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커피 한잔이 전부였다. 나는 차이나타운에 온 만큼 중식을 먹기로 했다. 너무 화려한 식당은 왠지 비쌀 것 같아 피하기로 했다. 적당히 평범해 보이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메뉴판에 영어 해설이 있었지만 어떤 맛일지 짐작이 안 갔다. 그래서 사진을 바탕으로 맛있어 보이는 면 요리를 시켰다. 꼬불거리는 납작한 면, 각종 채소, 빨간 양념이 적당히 버무려진 요리였다. 중식 특유의 매콤함과 함께 이색적인 맛이었다. 허기가 최고의 찬이라지만 그 말이 무색했다. 그만큼 내가 먹은 면 요리는 그 자체로 훌륭했다. 순식간에 해치웠다.
호주를 여행하는 젊은 사람들은 주로 백패커를 이용한다. 가격도 저렴하고,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몇몇 백패커는 매주 파티를 열거나 투숙객들을 대상으로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애들레이드에 있는 백패커에서 신기한 인연을 만났다. 그는 일본에서 온 친구(이하 료타)였다. 나와 같은 도미토리 룸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며 말을 텄다. 료타는 호주에 온 지 얼마 안 된 워홀러였다. 하루는 료타와 백패커의 공용공간으로 내려가 맥주잔을 부딪히며 이야기를 나눴다. 호주에 온 지 얼마 안 된 료타에게 나는 워홀 대선배였다. 료타는 각종 궁금한 점을 내게 물어봤고, 나도 신나게 내 썰을 풀었다. 그러던 와중 료타가 필리핀의 한 어학원에서 영어공부를 한 뒤 호주로 넘어온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료타가 다닌 필리핀 어학원이 내가 다녔던 곳과 같았다. 나와 료타 모두 세상 좁다고 말하며 웃었다. 작은 우연이 이야기의 재미를 더해 주었다.
자전거는 비싸고 좋은 것을 사기로 했다. 그리고 짐이 많은 만큼 자전거 후미와 연결할 수 있는 수레도 필요했다. 위험하고, 먼 길을 떠나는 만큼 장비에 돈을 아끼면 안 될 것 같았다. 시내의 한 자전거 가게로 향했다(사기당한 자전거를 수리해 준 점으로는 가지 않았다). 그곳에서 마음에 쏙 들어온 디자인이 있었다. 1000불 조금 넘는 금액을 지급했다. 이어서 수레도 구매했다. 수레는 특별할 것 없는 그냥 수레였다. 그런데도 200불이 넘었다. 자전거에 투자한 돈은 아깝지 않았다. 수레에 쓴 돈은 너무 아까웠다. 그나마 아주 튼튼한 수레여서 다행이었다. 가게 사장은 내게 자전거와 수레를 연결 및 분리하는 방법을 보여줬다. 간단했다.
자전거는 제법 큼직했다. 그런데도 매우 가벼웠다. 직접 손으로 들었을 때도 가벼웠고, 직접 몰아보니 그 가벼움이 더 잘 전달 됐다. 자전거에 매달린 수레도 부드럽게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