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는 와인으로 유명한 나라다. 호주 전역에 아름다운 와이너리가 있다. 포도밭이 넓게 펼쳐진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내면도 평화로 물든다. 특히 하늘이 점점 노을의 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포도나무 위로 노을 빛깔이 아름답게 굴러 떨어진다. 호주를 간다면 와이너리 관광은 놓칠 수 없는 코스다.
애들레이드에는 호주에서 가장 큰 와이너리 지대가 있다. 애들레이드에서 북동쪽으로 약 60km 지점에 있는 “바로사 벨리(Barossa Valley)”라는 곳이다. 호주 전역에서 쉬라즈(포도 품종이자 이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를 만들지만 바로사 밸리 생산품을 더 알아준다. 바로사 벨리는 아들레이드 지역 최고의 관광 상품이자 자랑이다.
와인을 잘 모르는 나는 바로사 밸리에서 가장 유명한 와이너리로 향했다. “제이콥스 크릭(Jacob’s Creek)”이라는 와이너리였다. 가장 가까운 곳까지 트램을 탄 뒤 그곳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갔다. 수레는 백패커에 잘 모셔놨다. 새로 산 자전거는 탄성이 뛰어났고, 메커니즘이 부드러웠다. 내 허벅지가 만들어 낸 에너지를 낭비 없이 바퀴로 전달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전거 성능과는 별개로 바로사 밸리로 향하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Valley라는 이름답게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숨이 찼다. 하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무엇보다 중간중간 끝없이 펼쳐지는 와이너리 풍경이 환상적이었다. 잠시 멈춰 서서 풍경을 감상하면 힘든 느낌은 금세 사라졌다.
호주 와이너리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무료 시음이다. 어느 와이너리를 가든 몇몇 와인을 무한히 맛볼 수 있다. 관광객들은 방문한 와이너리에서 제공하는 음식과 함께 무료로 와인을 즐기곤 한다. 그리고 그중 마음에 드는 와인 몇 병을 사가지고 온다. 유통을 거치지 않으니 와인 가격 또한 무척 저렴하다.
제이콥스 크릭에 도착하니 방문객 센터(셀러 도어(Cellar Door)라고도 한다)가 바로 보였다.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센터로 들어갔다.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훑어봤다. 제이콥스 크릭은 무료로 시음할 수 있는 와인이 30종이 넘었다. 메뉴판에는 와인별로 한, 두 줄의 설명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설명을 바탕으로 호기심 가는 와인부터 차례차례 부탁했다. 당시 나는 모든 여행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있었다. 작은 노트에 정말 사소한 것까지 적었다. 이 기록은 제이콥스 크릭에서도 성실하게 수행 됐다. 그저 와인을 천천히 맛보면서 와인의 이름과 내 느낌을 적당히 적었다. 이것만 보면 꾀나 고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실 무슨 차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당시 내 기록은 ‘시큼함, 쌉싸름함, 덜 쌉싸름함, 포도 맛 잘 느껴짐, 포도 맛 이상함’ 등 초등학생 수준(어쩌면 초등학생보다 못한)의 진단이었다. 기록 자체에 의의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와인의 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유치하고 단순한 맛 평가가 재밌었다. 사소한 기록들이 여행에 깊이를 더해 주었다. 얼핏 스쳐 지나갈 경험을 내면에 더 깊이 새기며 내 여행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과정을 즐겼다.
그러던 와중 재밌는 일이 발생했다.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내 모습을 본 직원들이 나를 소믈리에 비슷한 것으로 착각했다. 한글로 적었으니 직원들은 내 볼품없는 와인 평가를 알아채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로선 외국어가 마구 적혀 있으니 뭔가 있어 보였나 보다. 내가 와인과 관련된 일을 한다고 착각한 한 직원이 메뉴에 없는 와인을 들고 다가왔다. 병에는 라벨도 안 붙어 있었다. 현재 농장에서 새롭게 만들고 있는 레드 와인이라면서 맛 평가를 부탁했다. 나는 의도치 않은 행운을 즐겁게 누렸다. 와인의 맛은 그저 그랬다. 앞서 맛본 몇몇 와인들이 내 입맛에 더 맞았다. 잔을 내려놓고 나니 직원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전문적인 조언을 갈구하는 눈빛이 쏟아졌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혜택을 누린다면 그만큼의 책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다. 나는 앞선 와인들이 더 훌륭한 것 같다는 적당한 핑계를 둘러댔다. 이내 라벨이 붙지 않은 또 다른 와인을 가져다 주었다. 이번에는 화이트 와인이었다. 레드 와인만 계속 마셔서 인지 입이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 화이트 와인은 아주 훌륭하다고 했다. 그때부터 조금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 메뉴에 있는 와인만 시음하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 메뉴판을 받았을 때 약 30종은 돼 보이는 와인 목록을 보고 신이 났다. 여기 있는 와인 전부 맛보겠다고 속으로 외쳤다. 처음에는 메뉴판에 적힌 설명을 바탕으로 시음을 부탁했다. 얼마 안 가 전략을 수정했다. 가격을 기준으로 요청했다. 비싼 순으로 와인을 한잔 한잔 즐겼다. 한 모금이지만 적당한 안주도 없이 여러 와인이 들이키니 금세 술기운이 돌았다. 첫 기새와는 달리 금방 취했다. 이 이상 마시면 돌아가는 길이 위험할 것 같았다. 자전거를 타야 했으므로 시음을 멈추었다. 이내 밖으로 나와 와이너리를 둘러봤다.
와이너리에는 야외에서 음식과 와인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몇몇 관광객이 평화로운 풍경을 안주 삼아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들이 그들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피크닉이었다. 약 2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고, 빈속에 와인을 연거푸 집어넣으니 배가 고팠다. 관광객들이 먹는 피자가 너무 맛있어 보였다. 이곳 제이콥스 크릭에서 직접 만든 화덕 피자였다. 사실 겉모습은 냉동 피자처럼 허접해 보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포도밭을 바라보며 즐기는 와인과 피자라면 무조건 맛있을 것 같았다. 나도 그들처럼 피자와 와인을 즐기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정해놓은 하루 예산을 초과해선 안 됐다.
이내 배고픔을 뒤로하고, 전시관으로 향했다. 바로사 밸리의 역사, 제이콥스 크릭의 역사, 와인 제조 과정, 포도 품종 등을 천천히 구경했다. 관람을 마친 후 와이너리 풍경을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이후 와인 한 병을 산 후 숙소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은 조금 돌아가는 경로를 택했다. 바로사 밸리를 더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시내로 가는 길은 편했다. 오는 길이 오르막길의 연속이어서 가는 길은 내리막의 연속이었다. 편하게 체중을 실은 채 풍경과 바람을 즐겼다. 바람에서 상쾌한 향이 났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이슬을 머금은 포 나무가 내뿜듯 한 싱그러운 향이었다. 바로사 밸리 전역에 맑은 공기가 해무(海霧)처럼 퍼져 있었다. 그렇게 바로사 밸리가 선사하는 자연의 축복을 만끽하던 중 온몸에 전율이 이는 장면을 마주했다. 멀리 서부 터 따스한 빛깔을 품은 밭이 보였다. 처음에는 갈대인 줄 알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밀밭이었다. 몇몇 소설에서 황금빛 밀밭을 아름답게 묘사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가을철 고개를 잔뜩 숙인 벼를 떠올렸다. 직접 마주한 밀밭은 고개 숙인 벼 이삭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독특하고, 부드러웠다. 햇살을 붙잡아 절구에 넣고, 이를 곱게 빻아 만든 가루를 비료 삼아 들녘에 뿌리면 이러할까 싶었다. 햇살이 구석구석 머물다 이내 따스함을 촘촘히 새겨 놓은 듯했다. 그 따스함이 마음 깊숙이 포근함으로 다가왔다.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밀밭 위 잔잔히 내려앉은 햇살에 숨을 불어넣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스치자 밀 하나하나가 손을 잡고 대열을 이뤄 춤을 췄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출렁이는 모습은 밀밭 전체가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밀밭 위로 햇살의 금빛 파문이 번져 나갔다. 눈앞의 키 큰 강아지풀은 완벽한 그림을 위한 마지막 붓 터치 같았다. 이 풍경을 노을이 질 때 보지 못함이 아쉬웠다. 마음 같아서는 노을이 지는 시각까지 마냥 기다리고 싶었다. 화창한 대낮에도 따스한 빛을 머금은 밀밭은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그 안온한 생의 율동에서 나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애들레이드 여행 오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