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만약 승무원이 된다면?

여정

by Ted 강상원

나는 결국 승무원이 되지 못했다 part2: 여정



"작년 봄에 시작한 도전이 1년에 다다를 무렵쯤 합격한다면 얼마나 달콤할지를 상상했다. 그와 반대로 혹시나 탈락한다면 이제는 미련 없이 마음을 비우자는 다짐을 되뇌었다. 그렇게 스스로 정한 1년의 유예 끝에 내가 서있음을 느끼며 늦은 시간의 이슬비 사이를 걸었다."



#실크에어(Silk Air), 에미레이트(Emirates)


실크 항공사의 면접은 두 번째 도전이었기에 면접 절차가 익숙했다. 1차 면접은 20명 정도의 지원자가 차례차례 면접관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한 번 겪어본 과정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탈락했기에 긴장감을 완전히 누르기는 힘들었다. 곧이어 내 차례가 됐고, 나는 자리에 일어나 최대한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면접관의 질문을 기다렸다. 면접관은 내 이력서와 나를 번갈아 보며 자기소개와 왜 실크 항공 승무원이 되고 싶은지를 물어봤다. 약간의 떨림이 없지 않았지만 예전에 비해 훨씬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책을 쓰겠다는 또 다른 목표가 생긴 후 더욱 단단한 자세로 면접에 임할 수 있었다.

1차 면접이 끝난 후 나와 같이 면접을 본 지원자들은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약 20여 분의 회의를 거친 뒤 면접관이 나와 번호를 불렀다. 면접관이 호명한 번호에 내 번호가 있었다. 1차 합격이었다. 승무원을 준비하고 난 뒤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1차 합격이었다. 에어마카오에서도 1차 합격을 해본 경험은 있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해외로 나와서 보는 면접이었고, 에어마카오처럼 국내 승무원 학원이 면접 대행을 진행한 것도 아니었다. 즉 항공사로부터 처음으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기쁘긴 했으나 곧이어 있을 2차 면접을 위해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면접관이 전해 준 서류를 작성한 뒤 2차 면접을 봤다. 2차 면접은 1:1 면접이었다. 약 15 ~ 20분 동안 치러졌다. 2차 면접을 보는 동안 그간 준비해온 노력이 빛을 발하듯 순조롭게 진행됐다. 무엇보다 면접을 보는 과정이 편안했다. 2차 면접 또한 합격이었다. 나는 최종 면접실로 향했다. 1차 면접을 보기 전 서류 제출과 키를 측정하던 방이었다. 방에는 최종 면접에 진출한 모든 지원자들이 모여 있었다. 곧이어 눈에 익숙한 면접관들과 처음 보는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실크 항공의 임원급 인사로 보였다. 지원자들은 차례차례 앞으로 나가 4명의 면접관 앞에 서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3차 면접까지 마치고, 짐을 챙겨 나왔다. 최종 결과는 며칠 뒤에 이메일로 통보될 예정이었다.

공항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말레이시아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이틀 뒤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릴 ‘에미레이트(Emirates)’항공의 오픈 면접을 보기 위함이었다. 실크 항공에 최종 합격을 한다면 좋겠지만 중동 3대 항공사 중 하나인 에미레이트 항공에 입사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다.

버스에 탑승 한 뒤 스터디원들로부터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아직 최종 합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종 면접까지 갔다면 합격할 확률이 높았기에 다들 축하 인사를 보내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버스는 어느덧 말레이시아 국경선에 도착하였다.

공항이 아닌 곳에서 입국 도장을 받는 것이 생소했다. 여권을 비롯해 몇몇 귀중품을 챙겨 입국심사장으로 향했다. 알아본 바로는 입국 심사가 늦어질 경우 버스가 그냥 출발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최대한 서둘렀지만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낡은 입국장에서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군집해 있는 사람들을 보니 마치 피난길의 한 장면 같았다. 다행히 버스는 제자리에 있었다. 이후 늦은 새벽 쿠알라 룸프에 도착해 체크인을 했다. 에미레이트 면접까지 약 30시간이 남아 있었다.

승무원들 사이에서는 카타르, 에미레이트, 에티하드 항공을 중동 3사라고 부른다. 에미레이트는 카타르와 더불어 내가 제일가고 싶었던 항공사였다.

다음날이 되어 같이 면접을 보러간 동생들과 에미레이트 면접이 열리는 호텔을 둘러보기로 했다. 하루 뒤면 면접이 열리는 곳이었다. 미리 둘러보며 동선 등을 파악하고, 분위기에 조금이라도 익숙해 지기 위함이었다. 텅 빈 홀을 보면서 지원자들이 어디서 대기하고 면접관들이 어디서 면접을 진행할지를 상상하며 모의 면접을 시뮬레이션 해 보았다.

또다시 날이 밝았다. 에미레이트 면접장에는 많은 지원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제법 앞쪽에서 면접을 보고 좀 더 일찍 나올 수 있었다. 다만 워낙 지원자가 많았기에 1차 면접 합격자 발표를 듣기까지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중동 3대 항공사 중 한 곳에서 1차 합격을 했다는 사실이 조금 믿기지 않았다. 1차 합격을 확인한 후 숙소로 향해 휴식을 취했다. 2차 면접은 이튿날에 치러졌다.

2차 면접은 지원자들 간의 대화를 주고받는 자리였다. 면접관이 제시한 주제를 바탕으로 3명의 지원자가 한 조가 되어 대화를 주고받고, 이를 면접관이 관찰하는 형식이었다. 당시 나는 필리핀에서 온 여성 지원자 한 명, 말레이시아 현지 여성지원자 한 명과 같은 조가 됐다. 5 ~ 10여분의 시간이 지나 내가 속한 조의 2차 면접이 끝났다. 호텔 로비에서 2차를 기다렸다. 1시간 남짓한 시간이 지나 2차 면접 통과자들의 면접 번호가 적인 종이가 대자보처럼 호텔 벽에 붙여졌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미련을 달래기 위해 몇 번이나 2차 면접 통과자 명단을 보러 갔다. 혹시 내가 내 번호를 착각한 것은 아닌지, 숫자를 잘 못 읽은 것은 아닌지 생각하며 희망과 낙담을 오갔다. 실크 항공으로부터 최종 합격 연락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더욱 간절 해 졌다.

늦은 밤에 쿠알라룸푸르를 출발해 이른 아침 인천에 도착하는 비행기였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내내 에미레이트 면접 탈락의 아쉬움과 실크 항공 최종 합격 기원을 바라는 간절함 사이를 오갔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해가 화창한 아침이었다. 공항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몇몇이 출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행을 위해 지나가는 파일럿과 승무원들이 보였다. 실크 항공에서 최종 합격 메일만 온다면 나도 저 사람들처럼 유니폼을 입고, 가슴에 날개를 달고, 캐리어를 한 손에 쥔 채로 공항을 거닐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해리포터 세계관에서 마법사들을 선망하는 머글이 된 느낌이었다. 승무원 유니폼은 그린핀도르 교복 같았고, 캐리어는 파이어 볼트 빗자루 같았고, 가슴에 달린 날개 배지는 마법사의 손길에 빛을 발산하며 변신하는 지팡이 일 것 같았다. 어느덧 승무원을 많이 동경하고 있는 나였다.

출근 시간까지는 제법 여유가 있어 집에서 잠을 청한 뒤 출근하려 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에미레이트 탈락의 짙은 아쉬움이 또 몰려오는 듯싶었지만 이번에는 적어도 소득은 있는 출국이었다고 생각했다. 그간 오픈 면접으로 자주 해외를 오갔다. 그리고 결과는 매번 1차 탈락이었다. 인천공항으로 돌아와 바로 일터로 향하거나 집에서 휴식을 취한 후 출근했다. 그로 인해 인천 공항은 내게 탈락의 씁쓸함과 승무원들을 바라보며 부러움을 느낀 공간이 되어 갔다. 하지만 이번 해외 면접은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종 합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인천공항이 피로, 상실, 좌절의 장소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신기루


나는 비행기 환승을 위해 경유 공항에 있었다.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 시간까지 제법 남아 공항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 나라 공항 근처의 풍경은 어떠할지 궁금해 밖으로 향했다. 공항 밖은 사막이었다. 다양한 높낮이를 가진 사구로 가득했고, 그 사구들은 바람에 따라 모래를 뿌리고 있었다. 그런 사막 한가운데 큰 호텔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 호텔은 마치 소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어린 왕자 고향별의 장미 같았다. 외로이 별을 지키는 장미처럼 사막을 지키는 듯한 호텔의 모습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공항으로부터 거리는 제법 있었지만 호텔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호텔에서 무슨 이벤트를 하나 싶어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정장 차림을 하고 있음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승무원 면접장 같았다. 나는 꼬리처럼 늘어진 줄 속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 무슨 행사 같은 것이 진행 중인가요?”


그는 지금 카타르 항공의 오픈 면접이 이 호텔에서 열렸고, 현재 1차 면접이 진행 중이며 자신은 그 면접을 위해 현재 대기 중이라 했다. 카타르 항공의 오픈 면접 일정이라면 내가 모를 리 없었다. 내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다른 항공사의 면접을 보는 동안 카타르 항공이 새로운 면접 일정을 공지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최소 1달 이상의 유예기간이 있어야 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픈 면접이 진행될 수는 없었다. 나는 당장 휴대폰을 통해 카타르 항공의 채용 일정을 확인했다. 그의 말대로 새로운 오픈 면접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내가 환승을 위해 경유하고 있는 이 나라였다. 아무래도 내가 좀 더 꼼꼼하게 확인하지 못한 듯싶었다.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나는 예기치 못한 기회가 왔음에 기뻤다. 가방을 확인해 보니 얘 비용 이력서와 기타 서류가 있었다. 헤어, 메이크업, 의상을 위한 것들은 캐리어에 그대로 담겨 있을 터였다. 나는 서둘러 면접 볼 준비를 한 뒤 내 눈앞에 펼쳐진 긴 대열에 합류할 생각이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공항에 있는 한 화장실로 향했다. 두 번의 면접에서 1차 이상 통과했기에 흐름도 기운도 내 편이라 생각했다. 마침 내가 경유하는 공항에서 그것도 공항 바로 앞에 있는 호텔에서 면접이 진행되는 것이 신기하면서 운때가 맞아 들어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약간의 기분 좋은 상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캐리어를 열었지만 옷이 없었다. 상의는 있었는데 바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가방을 다 뒤져 봤지만 정장 바지가 보이지 않았다. 공항 면세점에서 정장 바지를 팔지 않을까 했지만 그런 곳은 없었다. 할 수 없이 지원자들 몇몇에게 부탁을 했다. 면접을 보고 난 후 나에게 바지를 빌려 줄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염치없는 행동임을 알았지만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다. 운 좋게도 바지를 빌려주겠다는 지원자를 만났고, 나는 연신 “Thank you”를 외쳤다. 그가 면접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며 머리와 화장을 하기 위해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던 와중 가방을 확인했는데 이번에는 넥타이가 사라졌었다. 분명 바지를 제외한 다른 정장의 구성요소들은 무사함을 확인했는데 10분 사이에 넥타이가 없어졌다. 꽉 부여잡고 있다 생각한 손에 어느새 허전함만 남아 있는 듯이 조금 전까지 손잡고 놀이공원을 즐기던 아이를 어느새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다른 물건들은 잘 있는지 확인했다. 확인 결과 다른 물건들 또한 멀쩡한 것이 없었다. 서류는 물에 젖어 있었고, 찢어지거나 구겨진 서류까지 존재했다. 누군가 나에게 일부러 해코지를 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남은 멀쩡한 물건들을 잘 챙기고, 하나씩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제 물건 하나 간수하지 못하는 내가 승무원으로서 자격이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소지품을 하나씩 다시 챙기며 캐리어를 정리하면서 나를 향한 짜증과 분노가 밀려왔다. 어느덧 면접은 끝나 있었고, 나는 눈앞에 펼쳐진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나 자신을 향한 한심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눈을 뜨니 출근할 시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꿈이었다. 인천 공항 도착 후 출근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집에 들러 짧은 단잠을 청했다(나는 수학 강사로 일했고, 출근시간이 오후였다). 조금 전 일이 꿈이어서 참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실크 항공사로부터 최종 합격여부 메일은 늦어도 1주일 내로 연락이 올터였다. 잠깐의 낮잠에서 얻은 꿈자리가 뒤숭숭했지만 꿈과 현실은 반대라며 연신 불안감을 달랬다. 회사 건물에 다다를 때쯤 이메일 알람이 울렸다. 실크 항공으로부터 온 메일이었다. 바로 메일을 열어 확인했다. 첫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Unfortunately(유감스럽게도)’였다. 이후의 내용은 읽어볼 필요가 없었다. 최종 입사 여부의 메일의 첫 시작이 저 단어로 시작한다면 이는 탈락임에 틀림없었으니. 수업에 들어가기 전 한 번 더 이메일을 확인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이메일 내용을 끝까지 읽어야 할 것 같았다. 결과는 역시 탈락이었다.

당시 실크 항공이 한국인 채용을 늘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실크 항공은 한국발 노선을 늘릴 계획이 있었고, 이에 따라 한국 국적 혹은 한국어에 능통한 승무원이 더욱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승무원 커뮤니티를 통해 내가 알아본 바로는 최종 면접까지 간 남자 지원자가 나 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이런 정보를 종합했을 때 합격할 확률이 높을 것으로 판단됐다. 하지만 이는 내 희망 사항이었다. 나한테 유리한 정보만 편집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사실 최종 탈락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찌 됐든 그 회사 입장에서 나를 채용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주저앉아 있을 시간은 없었다. 술 한잔으로 털어버리고, 다음 면접을 알아보았다. 당분간 실크 항공은 채용이 없을 것으로 보였다. 승무원이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도전 기간을 1년으로 정했고, 그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나는 며칠 뒤 ‘비엣젯 항공’ 면접을 보기 위해 베트남으로 향했다.



#The End


내가 베트남으로 향하기 몇 주전 스터디원 몇 명이 최종 합격을 했다. 한 명은 국내 항공사에 최종 합격을 했고, 다른 멤버들은 외국 항공사에 최종 합격을 했다. 이제 스터디 그룹 내에서 아직 최종 합격을 못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스터디를 처음 시작할 때 모두가 카타르 항공을 목표로 도전했다. 카타르 항공에 입사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지만 결국 모두 승무원이 됐다.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었다. 한국 나이로는 33, 만 나이로도 31살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몇 달 전 친구와 여행 삼아 갔던 호찌민으로 향했다. 내가 처음 승무원의 꿈을 결심하게 된 그곳으로.

1차에서 탈락했다. 1차 합격은 어느 정도 자신 있었는데 허무하게 기회가 날아갔다. 내 승무원 도전은 이제 끝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비엣젯 항공의 채용 일정을 확인했는데 새로운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1주일 뒤 하노이에서 오픈 면접이 또다시 열리는 것이었다.

한 해가 끝나기까지 2달 남짓 남았을 시점이었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스스로 정한 기한까지 남은 시간도 적었을뿐더러 앞으로 어떤 항공사에서 채용 소식이 뜬다는 보장도 없었다. 각오를 다지는 것도 좋지만 객관적이고, 실용적인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숙소 근처를 걷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그날 아침 면접장에서 본 면접 진행 요원이 보였다(면접 진행 도우미는 인사팀 직원 몇 명과 승무원들이었다). 그는 비행을 마치고 퇴근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자 승무원과 함께 있었다. 실례임을 알았지만 절박한 마음에 조언을 구하고자 말을 건넸다. 남자 승무원은 단번에 나를 알아보았다. 오늘 아침에 면접 보러 온 사람 아니냐며 내 인사에 화답했다. 나는 그와 그녀에게 다음 주 하노이에서 열릴 오픈 면접에 지원할 생각인데 혹시 먼저 합격한 사람으로서 해줄 수 있는 조언 혹은 팁을 물어보았다. 그와 그녀의 말로는 화장을 짙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했다. 그의 말로는 BB혹은 CC만 옅게 바르는 것이 좋다 했다. 승무원 화장이 보통은 진한 법인데 이곳은 조금 달랐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꿀팁을 얻은 것 같았다. 이후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나는 하노이로 향했고, 1차 면접을 통과했다. 그 친구의 말 덕분이었는지 1차는 통화했다. 그 친구에게 말을 걸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비엣젯 항공이 당시 대대적인 채용을 하고 있어서 승무원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오픈 면접 일정이 거의 매월마다 있었다. 문제는 내 나이였다. 비엣젯 항공 규정상 만 30세 이하가 기본 자격요건이었다. 나는 얼마 안 있으면 만 31살이었다. 내 생일이 다가오는 것이 반갑지 않았다. 이번 하노이 면접으로 비엣젯 항공에 지원할 수 있는 것도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내 모든 외항사 면접이 끝나갔다.


그리고 비엣젯 2차 면접에서 탈락했다.


이제는 승무원을 포기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매일 승무원 채용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승무원 오픈 면접 일정이 올라오는 홈페이지, 승무원 커뮤니티, 해당 항공사의 채용 일정 공지 등을 확인했다. 그런 와중 비엣젯 항공의 또 다른 오픈 면접이 다음 주 오사카에서 열리는 것을 발견했다. 문제는 내가 만 31살이 되는 시점(내 생일) 이후에 진행되는 면접이었다. 면접은커녕 서류 제출을 하는 과정에서 집으로 돌아가라 할 것이 분명했다. 어찌어찌 최종 합격을 해도 회사에서 최종적으로 서류를 다시 확인하면 최종 합격을 취소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첫 해외 오픈 면접을 봤던 오사카로 향했다.

서류 제출을 하는 과정 또한 면접의 일부다. 하지만 비엣젯 항공의 경우 서류제출은 말 그대로 서류 제출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면접 진행 요원들이 서류에 적힌 인적사항을 확인만 할 뿐이다. 그렇기에 서류 제출 과정에서 긴장할 필요도 전혀 없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가 오사카에서 비엣젯 항공을 보던 시기에 나는 만으로 31살이었다. 즉 비엣젯 항공의 기본 자격 요건에서 이미 탈락이었다. 예를 들어 토익 기본점수에 못 미치거나 회사에서 요구하는 신장에 못 미치는 것과 같았다. 1주일 사이에 나는 처음부터 기회가 주어질 수 없는 지원자가 됐다. 서류 제출하는 과정에서 퇴짜를 맞아도 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과 내 절박한 마음이 운 좋게 작용했을까? 다행히 서류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퇴짜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차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베트남에서 이미 두 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1차 면접은 떨리지 않았다. 면접의 프로세스에 이미 익숙했고, 면접관도 자주 보니 처음에 비해 긴장감은 줄어 있었다. 면접관 또한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주었다. 1차는 우선 통과였다. 1차는 통과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여전히 2차였다. 비엣젯 항공의 2차 면접은 장기자랑이었다. 면접관뿐만 아니라 모든 지원자들이 보는 대서 진행된다. 대부분 노래와 춤을 준비하는데 나는 음치, 몸치다. 무대 체질은 더더욱 아니다. 비엣젯 항공사에서도 끼가 있는 친구를 보려는 것이 아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고,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지원자를 선별하려는 의도이다. 이를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벽을 넘지 못했다. 나는 2차 면접에서 탈락했다. 2차 면접 탈락 직후 바로 숙소로 가고 싶었지만 다른 지원자들의 면접을 다 지켜보았다. 면접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지속됐다. 그렇게 그들을 부러워하며 내 승무원 도전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난 뒤 익숙한 오사카 길거리를 걸었다. 여러모로 익숙한 길거리를 계속 걷고 걸었다. 걷던 와중 낯익은 신사가 눈에 띄었다. 호젠지 신사였다. 몇 개월 전 에어아시아 면접을 보기 위해 오사카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신사 앞에 서서 눈을 감고 기도했다. 하지만 빌고 싶은 소원이 없었다. 승무원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왠지 모를 이유로 빌 수 없었다. 몇 개월 전 같이 소원을 빌었던 친구들은 모두 승무원이 되었다. 나 홀로 다시 이 신사를 찾았다. 승무원이 아닌 승무원 지망생으로. 이제는 이마저도 보내야 할 때처럼 느껴졌다. 처음 승무원을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동안 연습해온 과정과 치러온 면접 장면 등이 머리를 스쳐갔다. 기도 아닌 기도가 조금 길었는지 뒤에서 일본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죄송하다는 뜻의 목례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해외 오픈 면접을 보기 위해 매번 지출해야 하는 금액도 적지 않았다. 일하면서 번 돈을 해외 오픈 면접 때문에 다 날릴 수도 없었다. 외국 항공사를 목표로 하는 승무원 준비생 사이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면접 풍년’일 때 합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외국 항공사들이 대대적인 채용을 몰아서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흐름에 합류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면접 풍년이라는 것이 끝나가고 있었다. 항공사는 그 회사가 취항하는 노선에 따라 특정 국가의 인원을 채용한다. 당시 한국인 남자는 채용이 점점 힘들어지는 추세였다. 이미 뽑힐 사람은 거의 뽑혀가고 있었다.

물론 이와 상관없이 합격하는 사람들도 있다. 항공사 입장에서 원하는 인원수만큼 한국 국적의 승무원을 채용했으면 그 이상 한국인을 채용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지원자가 회사 입장에서 놓치기 싫을 인재라면 면접 풍년이든 면접 가뭄이든 뽑히곤 한다. 국적에 상관없이 채용한다. 내 주변인 중에도 이에 해당하는 사례가 있었다. 즉, 결론은 내 부족함이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나는 한국 나이로 33살이 되었다. 승무원 도전은 이제 말 그대로 끝이었다. 미련을 떨칠 수 없어 승무원 스터디를 나갔다. 당시 스터디 내에서는 의욕적으로 도전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마음속에서는 미련을 떨쳐내는 행위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내면의 진실이 수면 위로 올라올 때마다 애써 외면했다. 그때 한 국내 항공사를 목표로 하는 스터디에서 나보다 한 살 많은 사람을 봤다. 경력이 아닌 신입으로 도전하려는 그분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 인상 깊음에 나도 도전을 조금만 더 이어나갈까 망설이던 와중이었다. 그분의 도전은 존경했지만 나의 것과는 별개였다. 이것이 나의 도전을 지속할 핑계로 삼을 수는 없었다. 이 이상 해외 오픈 면접에 돈을 쓰기도 부담스러웠고, 내가 지원 가능한 외국 항공사의 채용 소식 또한 줄어갔다. 다가올 봄에 있을 국내 항공사의 공채 채용을 마지막으로 도전한다면 미련을 떨쳐낼 수 있을까 싶었다. 승무원이 되기로 처음 결심한 그날로부터 스스로 정한 1년의 유예기간이 끝나가기 까지 아직 2달이 남았었다. 다가올 3월에 있을 국내 몇몇 항공사들의 공채 채용을 정말 마지막 도전으로 하고, 그때도 안된다면 정말 포기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와 동시에 그저 미련한 집착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결심에 조금의 의구심을 품던 와중 한 외국 항공사 채용 소식이 올라왔다. 이번 오픈 면접의 장소는 해외가 아닌 국내였다. 한국에서 오픈 면접이 진행된다는 공지였다.


‘에티하드 항공(Etihad Airways)’, 3월 25일 서울



#만약 승무원이 된다면?: 취중진담


제일가고 싶어 했던 중동 3사 중 한 곳인 ‘에티하드(Ethihad)’ 항공이었다. 에티하드는 한국인 채용이 드문 편이었다. 유럽노선이 많은 에티하드 항공사는 유럽인을 주로 채용했기 때문에 주로 유럽에서 오픈 면접이 열리곤 했다(몇몇 한국인 중 유럽으로 직접 가서 오픈 면접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에티하드에서 한국인 채용을 위해 한국으로 직접 오는 것이었다. 이력서만 들고 가면 모두가 면접을 볼 수 있는 오픈 면접은 아니었다. 사전에 서류를 제출해야 했고, 초대장을 받은 사람만 면접에 참여할 수 있었다. 즉 서류심사였다. 나이에 제법 관대한 중동 항공사지만 조금은 불안감을 지닌 채 이력서를 제출했다. 며칠 후 회신 메일이 초대장과 함께 왔다. 서류는 통과였다. 이제는 1차 면접을 준비할 차례였다. 그리고 면접날이 다가왔다.

면접은 서울 중구에 있는 호텔에서 진행됐다. 면접장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동안 해외에서 본 오픈 면접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 나는 해당 시간에 맞춰 호텔에 도착했지만, 예상보다 대기 시간이 길어져 늦은 밤에 면접을 봤다. 면접 진행 방식은 면접실로 걸어 들어가 면접관에게 이력서를 건넨 후 조금의 스몰토크를 나눈 뒤 질문지를 뽑아 이야기하는 절차였다. 나는 “승무원이 된다면 어디에 가고 싶은가요?”라는 질문을 뽑았다. 나는 이탈리아에 가고 싶다고 말한 뒤 이유를 차근차근 말했다.

호주에 몇 년간 지내면서 친해진 이탈리아 친구가 있고, 그 친구와 공유하는 추억이 많다. 그리고 최근에 그 친구가 결혼을 한다며 나를 결혼식에 초대했다. 승무원으로서 이탈리아에 방문해 그 친구와 그 친구의 아내 될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직접 전해주고 싶다고 대답했다. 면접관은 내 대답에 흥미를 느끼는 듯 연신 미소와 기분 좋은 리액션으로 화답해 주었다. 그리고 ‘인비’를 받았다. 1차 관문 통과였다.

이후 1~2 시간 뒤 기내 문 읽기 테스트가 진행됐다. 5명씩 들어가 주어진 기내 문을 차례로 읽었다. 면접관은 바쁘게 무언가를 적는 듯했다.

면접이 다 끝났고, 최종 면접 진출 여부는 이메일로 공지될 예정이었다. 면접이 끝나고 나니 막차를 타야 될 시간이었다. 봄 비가 하루 종일 약하게 내리는 날이었다. 습기를 머금은 기분 좋은 밤공기가 내 주변을 맴돌았다. 느낌이 좋았다. 최종 면접까지는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작년 봄에 시작한 도전이 1년에 다다를 무렵쯤 합격한다면 얼마나 달콤할지를 상상했다. 그와 반대로 혹시나 탈락한다면 이제는 미련 없이 마음을 비우자는 다짐을 되뇌었다. 그렇게 스스로 정한 1년의 유예 끝에 내가 서있음을 느끼며 늦은 시간의 이슬비 사이를 걸었다.

승무원이 된 몇몇 사람들의 합격 수기를 읽어보면 3 ~ 4년 도전 끝에 합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해외 오픈 면접을 30회 이상 나간 끝에 붙은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될 때까지 도전했다는 점이었다. 나 또한 될 때까지 도전하고 싶었지만 나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절함이 집착이 되기 전에, 꿈이 아닌 낭만에 취한 바보가 되기 전에, 어영부영 30대 중후반이 되기 전에. 게대가 현실을 선택하는 일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상황에 맞추어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것 또한 나를 아끼고 내 삶에 충실함을 의미하기에. 최종 면접에 진출해 최종 합격까지 한다면 좋겠지만 설사 떨어지더라도 그동안의 노고에 이제는 나 자신을 토닥일 마음의 준비가 된 듯했다.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망상에 젖어 현실을 내팽개쳤다고 비난해도 상관없었다. 결과를 비웃으며 시간 낭비했다는 질타를 던져도 개의치 않을 것 같았다. 내 도전의 결과와 상관없이 그 과정 자체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최종 면접 진출 여부를 알려주는 메일이 생각보다 일찍 왔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탈락하고 나니 아쉬움이 밀려왔다. 내심 최종 면접까지는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미 숱하게 겪어본 탈락이고, 더 이상 승무원 도전은 없을 것으로 마음먹었기에 큰 흔들림은 없었다.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고, 그 덕에 에티하드 탈락 메일을 받은 이후에도 하루하루 충실할 수 있었다. 평소처럼 운동을 하고, 학원에 출근해 아이들을 가르치며 평범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괜찮게 지냈다. 평균대 위에서 균형 잡는 일은 힘들지 않았다.

며칠 뒤 친구와 술 한잔 후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날도 가벼운 이불처럼 비가 조금씩 내려앉는 날이었다. 선선한 봄비의 기운이 마치 에티하드 면접 당일 날 내렸던 비와 닮아있었다. 그날의 나는 어땠을지 궁금해 핸드폰 속 사진 몇 장을 들여 보았다. 에티하드 항공사의 면접 당일 입었던 의상과 면접장 그리고 화장과 헤어를 체크하기 위해 찍었던 셀카 등. 그날의 내 도전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었다. 그 이전 사진을 살펴보니 비엣젯 항공사 면접이 있었다. 중간중간 스터디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예상 면접 질문에 답변하는 모습을 녹화한 동영상도 틈틈이 있었다. 조금씩 더 과거의 사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럴수록 지난 1년의 승무원 도전기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살펴볼수록 분함, 안타까움, 유감, 아쉬움의 감정이 누적됐다. 여러 종류의 패배감이 내 안에서 충분히 섞이고 누적됐을 때쯤 이제는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취기가 더해져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솟아오르는 감정이 밖으로 터져 나오기 전까지 괜찮은 줄 알았다. 내 입에서 “I want to be cabin crew, I want to be cabin crew, I want to be cabin crew”라는 말이 반복되기 전까지 승무원 도전이 짝사랑으로 끝났음을 담담히 받아들인 줄 알았다. 내 일상에 탈락 혹은 실패로 인한 좌절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저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좌우에 늘려간 추는 더 이상 추가 놓일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저울은 무너져 있었다. 평균대 위에서 잘 걸어가고 있다 생각했지만 한순간에 떨어졌다.

집 앞 공원에서 혼자 울며 그간 준비해 온 면접 질문을 답했다.


“제가 이 항공사에 입사하고 싶은 이유는…”

“제가 승무원이 되고 싶은 이유는…”

“제 장/단점은…”

“제가 승무원이 된다면…”


내 삶에 실패로 인한 감정이 침투할 틈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틈을 막고 있었다.



#구멍 난 배


승무원 도전을 멈추기로 했으니 더 이상 스터디도 나가지 않는 것이 맞았지만 내 삶에서 조금씩 지워 나가야 될 것 같았다. 한 순간에 컴퓨터 버튼 누르듯 삭제할 수는 없었다. 몇 번의 승무원 스터디에 참여했지만 점차 횟수를 줄여 나갔다. 그렇게 미련을 조금씩 덜어내고, 나의 일상에 더 충실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내 노력과 별개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내 하루의 틈새에서 피어올랐다. 버스를 기다릴 때, 음식을 기다릴 때, 화장실 줄을 설 때, 퇴근길에서, 샤워하는 도중,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친구들을 만나고 집으로 가는 길 등. 승무원 탈락이라는 결과는 내게 사고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았다. 멍하니 있을 자유가 박탈됐다. 하루의 마디마디에서 끊임없이 날 괴롭혔다. ‘나는 실패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사고의 공백을 끊임없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 패배감으로부터 도망쳐 운동과 독서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운동할 때만큼은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 ‘결국 승무원이 되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때마다 더 운동에 집중했다. 바벨의 중량을 늘리고, 조금 더 빠르게 달리고, 조금 더 숨 가쁘게 나를 몰아쳤다. 그럴 때마다 올라오는 희열과 육체적 고통 덕분에 실패라는 감정 속에서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해방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땀과 함께 내 안의 패배감을 배출했다고 생각했지만 어김없이 멍하니 서있기를 반복했다.

항상 책을 들고 다녔다. 다독을 위해서도 마음의 양식을 얻고자 함도 아니었다. 그저 책에 빠져 드는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닥치는 대로 읽고, 또 읽었다. 밖에 들고 나온 책을 다 읽어버리면 다시 읽었다. 책이 펼치는 세상으로 도망치고 나면 현실에서의 실패는 그곳까지 따라오지 못했다. 책에 밑줄 치고, 필기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책에 더 집중해야 했다. 실패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었다. 아니 실패라는 감정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내 삶에 승무원이라는 언어가 마치 존재했던 적도 없었다는 듯이.

처음에는 운동과 독서가 효과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는 병을 낫게 해주는 치료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잠시 고통을 잊게 해주는 진통제에 불과했다. 그렇게 스스로 투여해 온 진통제에 내성이 생기기 시작할 때쯤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이 반복됐다. 어김없이 침대에 누우면 한숨과 함께 화가 밀려오곤 했다.

하루는 현제 내 상황, 승무원이 결국 되지 못했다는 사실, 미래의 불투명성 등. 이 모든 것이 내 안을 어지럽혀 도저히 잠이 들지 않는 날이었다. 마음속 분노와 미련을 식히기 위해 책을 집었지만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읽어 내면의 화를 가라앉혀야겠다는 생각에 필사를 시작했다. 필사는 제법 효과가 있었다. 정확히는 필사를 하며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추가로 써 봄이 유효했다. 실패를 향한 나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나에 대한 내 태도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늦은 새벽에 시작한 글쓰기는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지속됐다. 내면의 복잡함을 글로 마구 배출했다. 떠오르는 대로 두서없이 글로 적어보고 나면 조금은 내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차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한 글자 한 글자 적어내며 내면의 혼돈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아무 말 대잔치로 시작해 일기, 시, 책이나 영화에 대한 감상평 등 적고 싶은 대로 적었다.

글쓰기는 생각 이상으로 효과적이었다. 운동과 독서가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 해주는 진통제 역할이었다면 글쓰기는 실질적인 치료제 같았다. 내 감정이 조금씩 회복되는 듯했다. 당시 나는 구멍 뚫린 배 같았다. 구멍에서 솟아나는 물을 막기 급급한 것처럼 운동과 독서로 내 불안, 패배, 좌절 등의 감정이 솟아나지 못하게 누르기 급급했다. 이런 진통제 처방에 면역이 생겨 효과가 없거나 그 유효함이 짧을 때 면 글을 쓰는 것만이 나를 치료해 주었다. 어느덧 배는 조금씩 다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조금씩 회복을 거듭해 나가면서 나는 그간 승무원을 준비해온 흔적들을 지웠다. 항공사 자료, 면접 예상 답변을 적거 놓은 것, 기타 서류, 컴퓨터 파일 등을 조금씩 버리고 삭제해 갔다. 그런던 와중 우연히 한 영상을 보게 됐다. 승무원을 준비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영상이었다. 그 영상 속에서 나는 승무원이 된다면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었다.


“승무원이 된다면 최소 10년 이상은 반드시 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비행 일지를 기록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바탕으로 책을 쓰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더 많은 추억을 쌓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도움이 되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들어올 후배분들이 승무원 업무에 적응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책 또한 쓰고 싶습니다. 그렇게 제가 승무원으로서 겪어나갈 이야기가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로 진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것이 목표입니다.”


면접용으로 만든 대답이었지만 답변의 밑바탕이 되는 이야기는 진심이었다. 나는 책을 쓰고 싶었다. 그 영상 속에서 나는 담담하면서도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내가 나에게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잖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시작의 이유를 돌고 돌아 되찾았다.

우선은 조금씩 더 자주 그리고 더 많이 글을 써보기로 했다. 책을 쓰고 싶은 마음이야 있었지만 고작 영상 하나로 ‘이제 나는 작가가 될 거야’라는 다짐은 우습게 느껴졌다. 책을 쓴다면 어떤 장르로 쓸 것이고, 주제는 무엇이며, 내용 구성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 아무것도 정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우선은 글을 써본 경험이 많이 부족했다. 이러한 연유로 우선은 책을 쓰기보다는 꾸준히 그리고 묵묵하게 글을 써보기로 했다. 우선은 글을 쓰면서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느껴보고 싶었다. 승무원이라는 목표가 좌절된 상황에서 조금씩 일어서는 과정 자체를 누리고 싶었다. 글쓰기를 통해 내 감정을 이해하고, 내가 실패한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승무원에 도전하며 겪은 실패의 서사와 감정을 고스란히 적어가며 나의 여정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글쓰기는 제법 즐거웠다.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나의 실패를 받아들이려 하지는 않았다. 그저 실패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패배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독서와 운동에 집착을 했고, 이것으로도 부족해 글로 내 감정을 배출했을 뿐이다. 다만 글로 적어낸 내 감정은 말처럼 금세 휘발되지 않았다. 종이 위에 온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연필 끝에서 쏟아진 내 감정을 그대로 응시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나 자신과 온전한 만남, 온전한 대화로 이루어지는 첫걸음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내 지난 승무원 도전기를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이전에도 면접에서 떨어지고 나면 나를 돌아보고는 했는데 이는 내면에 있는 자아와의 대화라기보다는 승무원이 되기 위해 나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는 과정이었다. 일종의 바둑 대국을 한 뒤 복기를 하는 과정과 비슷했다.

글쓰기는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제법 달랐다. 실패한 경험의 객관적 분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경험에서 얻은 내 생각과 감정을 바라보는 시각에 객관성을 더해주었다. 글쓰기는 내가 나의 실패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데 게 해 주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조금씩 직시하며 나는 비워내고, 내려놓아야 했다. 그렇게 내 패배감을 직시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괴롭지 않았다. 오히려 치유의 감정이 더 차 올랐다.



#타자화(他者化)


이후 책 출판 강연에 참석하고, 출판과 관련된 책이나 자료 등을 찾아보았다. 당장 책을 쓸 것은 아니었지만 출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미리 공부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내 글이 다른 이들에게는 어떻게 비칠지 궁금했다. 나처럼 혹시 책을 쓰고 싶은 사람 혹은 글쓰기 자체를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그렇게 글쓰기 모임에 참여했다.

글쓰기 모임은 공통된 주제로 자유형식의 글쓰기를 해 오는 프로그램이었다. 모임은 2주 간격으로 진행됐다. 글의 장르뿐만 아니라 글자 수 또한 제한이 없었다. 사실 글쓰기 모임이라기보다는 글을 매개로 자아와의 소통 혹은 타자와의 소통을 하는 모임에 가까웠다. 각자가 써온 글을 현장에서 읽어가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글쓰기 모임은 생각 이상으로 부끄러운 자리였다. 내 글을 누군가가 읽고, 그 자리에서 의견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그렇게 쑥스러운 자리일 줄 예상 못했다. 막상 내 글을 다른 사람들이 내 눈앞에서 읽고 있으니 일족의 수치스러움마저 느껴졌다. 그들의 눈동자가 움직이고,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조금씩 벌거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날 것 그대로 보임이 어색했다. 맞춤법이나 오탈자는 없을까라는 걱정이 들었다. 문장이 어색하거나 잘못 사용된 어휘는 없을지 불안했다. 학창 시절 넘치는 감수성을 두서없는 글로 적어낸 것으로 비치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다시 읽어보니 형편없는 글이었다. 약 5 ~ 10분여의 시간이 지나고 내 글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이 왔다. 나는 내 쑥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고백했다. 나는 나의 글에 내 날것 그대로의 생각과 감정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묻어있음에 놀랐다.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보임이 꾀나 부끄럽게 느껴진다고 얘기했다. 그간 모임에 오랫동안 참석해 온 한 분이 처음이라 어색해서 그런 것이라며 따뜻하게 답변해 주었다.

이후 내 글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됐다. 예상보다 반응이 좋았고, 칭찬을 많이 들었다. 애초에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들의 모임도 아니고, 책 출판 등의 목표로 하는 모임이 아니었으니 어떤 비판적인 의견이 오가는 자리가 아니었다. 다만 내가 몇 번을 읽어봐도 형편없어 보이는 문장을 누군가는 좋다고 이야기해주고, 칭찬을 해주고, 공감을 해준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됐다. 날 것 그대로를 드러냄에 부끄러움을 느낀 나머지 조금 움츠려 든 자아가 그대로 안겨지는 기분이었다. 글쓰기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모임을 회고했다. 회고가 거듭될수록 내 안이 따뜻함으로 물들어 갔다. 그 뭉근하게 퍼지는 기분이 좋음과 동시에 이유 알고 싶어 생각을 거듭 반복했다.

승무원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내 모든 것이 평가받아야 했다. 키, 외모, 외국어 능력, 학벌, 서 있는 자세, 말투, 발음, 억양, 표정, 미소, 헤어, 메이크업, 넥타이 색과 무늬, 구두 높이, 셔츠, 입술 색, 몸무게, 몸 선, 면도 상태, 손톱 길이, 면접을 준비하는 자세, 앞으로의 포부, 이 직업을 가지고 싶은 이유, 가족관계, 아르바이트 경험, 기타 과거의 에피소드 등. 승무원을 준비하는 동안 나를 구성하는 요소는 평가 항목이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유기적으로 활동하며 하나의 생명체를 움직이듯 나의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연결되어 나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은 ‘그래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 승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살아온 삶이, 나라는 존재가, 나의 이상이 끊임없이 평가받아야 했다.

면접은 비즈니스 거래이므로 응당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사 입장에서도 직원 한 명을 잘 못 뽑게 될 경우 입게 될 피해를 생각한다면 신중하게 평가, 고려, 판단해야 한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 했고, 그 결과 나는 높이 평가받지 못했을 뿐이다. 게다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끊임없는 객관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누군가 나의 부족한 점을 객관적으로 꼬집어 준다면 이는 성장, 성취, 성공의 발판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부끄러움 혹은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원하는 일을 이루는 방법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때로 피로를 느끼고, 상처를 입는다. 우리가 입은 상처를 보듬지 못하기도 한다. 상처 입은 자아를 돌보기보다는 개선시키고, 발전시켜야 할 평가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스스로를 사물화(事物化)하고, 타자화(他者化) 하는 과정이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 그 타자화 속에서 상처를 입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승무원의 모습에 맞추어 나를 타자화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승무원이 되기위한 나의 성장을 도모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자기연민이 부족해지는 이유가 될 수도 있었다.

그날 글쓰기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 자신을 타자화 함으로써 입은 상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그 피로와 상처가 포근히 안기는 느낌이었다. 내 글은 한없이 부족했지만 그날 만큼은 만족과 부족의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평가받는 하루가 아니었다. 나의 평가, 타인의 평가, 세상의 평가에서 해방됨을 느꼈다. 내 보잘것없는 글이 칭찬받는다는 것이 위안과 힘이 되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느낀 그 따뜻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글을 많이 그리고 잘 쓰고 싶어졌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이런 위로가 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졌다. 상실에 아파하고, 평가를 의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과 글로 힘이 되고 싶어졌다.

하루하루 집중하는 삶이 실패를 향한 집착으로부터 조금씩 나를 벗어나게 해주 었다. 깨끗하게 회복됐다는 느낌은 당시에 조금 덜 했지만 그럴수록 운동, 독서, 글쓰기에 충실했다. 운동과 독서는 더 이상 회피의 도구가 아니었다. 회복의 도구였다. 아물지 않은 딱지를 억지로 떼어 낸 것이 아닌 이제는 충분히 회복됨을 확인해 부분 부분 밴드를 떼는 샘이었다. 고통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방안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었다. 실패를 인정하고, 아픔을 받아들이고, 욕심을 내려놓고, 실패로부터 나를 치유하며 하루하루 집중하는 삶의 가치를 느껴 나갔다.

나는 이제 승무원을 떠나보낼 준비가 된 듯했다. 글쓰기 모임이 기다려졌다. 새로운 목표로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또 다른 모험을 찾았다.

하루는 출근하던 와중 예전에 같이 승무원을 준비했던 동생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동생은 얼른 이메일을 확인해 보라 했다.


Qatar Airways Cabin Crew Recruitment Event in Busan

카타르항공 승무원 채용,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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