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계획은 그럴싸했다. 한 대 처맞기 전까지5

#시즌 2

by Ted 강상원

#시즌 2


갈증을 달래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슈퍼에서 콜라 한 병을 샀다. 콜라를 사서 나온 후 인근 보도블록에 걸터앉았다. 걸을 힘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탄산이 따갑게 목을 때리는 감촉을 즐기며 내 손에 쥐어진 50불짜리 지폐 두 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선장이 떠난 방향을 바라봤다. 그렇게 고생하고 겨우 100불밖에 못 벌었다는 생각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의 노동과,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받았단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당장 내일부터 다시 일을 구해야 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 순간 콜라가 주는 달콤함과 내 손으로 번 돈이 주는 뿌듯함을 그저 느끼고 싶었다.


소금기 가득한 피부와 머리. 그리고 근육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듯한 하체가 당장 씻을 것을 요구했지만 나는 마트로 먼저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을 전부 사고 싶었다. 오랜만에 고기와 채소를 잔뜩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족했던 영양분을 섭취해야 했다. 하지만 막상 마트에 도착하니 오븐에 구운 노릇노릇한 통닭이 눈에 제일 띄었다.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통닭 위로 빤짝빤짝 빛나는 기름기가 그간 야윈 나를 유혹함과 동시에 위로했다. 영양 상태를 고려하면 나는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비타민 등이 적절하게 균형 잡힌 식사를 해야 했지만 냉큼 눈앞에 있는 통닭을 집었다. 영양소보다 당장 허기짐과 입맛을 달래줄 무언가가 더 간절했다. 그리고 닭은 고단백 음식이다. 오는 길에 맥주도 몇 병 샀다. 숙소에 도착해 뜨거운 물로 온몸을 녹이고 한 손에는 닭다리 다른 한 손에는 맥주를 쥔 상태로 그날 저녁을 장식했다. 문어는 생각나지 않았다.


때로는 한 끼의 식사가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역할 이상을 한다. 지난날의 외로움, 나약함 등을 몰아낸다. 든든함, 따뜻함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날 나의 식사가 그랬다. 배고픔만을 달래주는 식사가 아니었다. 지난 3개월 남짓한 배고픔과 서러움은 당장 눈앞에 있는 통닭과 맥주 앞에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 배가 부르고 나니 자연스레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게 됐다. 다시 또 일을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 일을 구하지 못하면 내일부터는 다시 식빵과 감자튀김만 먹으며 버텨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내가 이 세상에 쓰임새가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는 자괴감. 다시 또 부정적인 감정이 밀려오는 듯했지만, 그저 기우였다. 오히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 솟구쳤다.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오기가 내 안에 일었다. 수중에 주어진 돈을 계산해 보니 3~400불 남짓했다. 2주 치 방값을 빼고 나면 없는 돈이었다. 하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여윳돈이 있든 없든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열심히 구직활동을 하고, 좋은 인연을 만나 영어라는 언어로 소통을 하고, 세상의 일부로서 하루하루 살아가야 함은 똑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려울 필요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올라가 침대에 누웠다. 노트북을 열어 미드를 보며 잠자리에 들었다. 불과 1주일 전까지 이는 나만의 동굴로 숨어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동굴 밖으로 나가기 무서워 모니터 앞에 나를 매달아 놓았던 나날의 일과였다. 하지만 그날은 그저 내 일과를 마무리하는 일종의 여가 활동이었다. 오랜만에 드라마를 보며 웃었다. 기분 좋은 노곤함과 배부름. 그리고 오랜 기간 느끼고 싶었던 뿌듯함을 느끼며 정말 깊은 잠을 잤다. 근무시간 03:00~17:00. 뱃사공으로 보낸 14시간. 말로만 듣던 인도양 망망대해. 내 나름 바다와의 사투. 그렇게 얻은 돈 100불. 내 삶에 가장 뿌듯한 하루였다. 그날 나는 사자를 꿈꾸며 잠들었다.


다음날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구직 활동을 했다. 각종 구직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공고마다 이메일을 보냈다. 그중 호주 정부에서 관리하는 사이트가 있었다. 오로지 농장 일만 알선해 주는 사이트였다. 농장 리스트 중 포도 농장이 있었고, 그 농장으로부터 1시간 뒤 회신이 왔다. 당시 내가 머물던 곳에서 차로 4시간 거리였다( 호주에서 4시간 거리는 멀지 않은 편에 속한다). Gingin이라는 곳이었다. 남은 300불 남짓한 돈을 들고 그곳으로 향했다. Gingin에 도착 후 농장주와 만났다. 알고 보니 농장주가 아닌 에이전시 사장이었다. Spencer라는 이름의 런던 출신인. 그는 런던 고지의 토트넘이라는 축구팀의 펜이었고, 나는 이영표 선수를 언급하며 Ice Breaking을 했다.


알고 보니 Gingin지역에는 다양한 농장이 있고, 대부분의 농장이 이 에이전시를 통해 직원을 구했다. 사이트에 올라온 공지는 포도 농장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내용이었지만 내가 일할 농장은 닭 농장이었다. Spencer는 본인과 거래하는 농장이 여러 개다 보니 가끔 다른 농장의 구인공고가 올라간다고 했다. 나는 상관없었다. 포도 농장이든 닭 농장이든 어디서든 일할 준비가 돼 있었다. 에이전시에서 제공하는 숙소로 Spencer와 이동하면서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이고, 방세를 비롯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2주 치 방세를 지불하고, 주급 날까지 먹을 양식을 샀다. 식빵과 감자튀김이 아닌 정상적인 먹거리를 샀다. 계란, 흰쌀, 고기, 과일 등을 샀다. 수중에는 40센트만 남았다. 하지만 더는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이후 꾸준한 수입으로 내 생활은 안정을 찾아갔다. 다시 영어 공부를 하고,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감사한 인연이 된 외국인 친구를 사귀었다. 그곳에서 사귄 이탈리아 친구는 몇 년 뒤 나에게 결혼 소식을 알리며 이탈리아로 나를 초대했다. 그렇게 500원 남짓한 돈과 함께 내 호주 라이프 시즌 2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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