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화가 난건, 엄마 때문이 아니야

[전치] 바람이 그랬어

친구의 뾰족한 말들이

가슴에 박힌 채 현관문을 거칠게 연다.


"강아지, 왔어?"


"..."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왜그래?"


엄마의 다정한 말에 안도감이 든다.



"내가 무슨 동물이야? 귀찮게 하지 마!"


그 따스함이 거슬려 뾰족한 말들을 내뱉는다.



쿵,

내뱉은 뾰족한 말들은 엄마의 가슴에 박힌다.


쿵,

엄마의 놀란 눈빛은 다시 나의 가슴을 찌른다.


쿵,

방문을 쾅 닫고 들어와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문밖에서 들리는 엄마의 한숨소리에 또 다시 아프다.



미안해 엄마, 엄마 때문이 아니야.


친구에게 느끼는 속상함도,

혼자가 됐다는 생각에 느끼는 외로움도,

당신께 풀어버린 이 화도


말할 용기가 없어서...


"바람이 그랬어!"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못되게 구는 이유



"강아지, 왔어?" /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왜그래?"

엄마는 늘 그렇듯 다정하게 맞아줍니다.

'강아지'라는 애칭과 표정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리는 세심함은 화자에 대한 엄마의 사랑을 보여주죠.


"그 따스함이 거슬려 뾰족한 말들을 내뱉는다."

여기서 전치가 시작됩니다.

친구에게 받은 '뾰족한 말들'을 이번엔 화자가 엄마에게 쏟아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따스함이 거슬려"라는 표현입니다. 왜 따뜻함이 거슬릴까요?



그날의 기억


예전에 친구에게 울먹이며 전화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엄마한테 왜 그렇게 짜증냈는지 모르겠어...

회사에서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았는데,

집에 와서 엄마가 밥 먹었냐고 물어보니까 갑자기 화가 확 나더라고."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본 일이죠?


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가족에게 푸는 것.

친구와의 갈등을 연인에게 터뜨리는 것.

학교에서 참았던 감정을 집에서 폭발시키는 것.


심리학에서는 이를 '전치(displacement)'라고 부릅니다.

본래의 대상이 아닌 다른 대상(약한)에게 감정을 표출하는 방어기제죠.




안전한 사람이라는 역설


우리는 왜 하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를 낼까요?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직장 상사에게 화를 내면 해고될 수 있습니다.

친구에게 감정을 터뜨리면 관계가 끝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은?

우리의 무의식은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예전에 내담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던 습니다.


"아이가 유치원에서는 모범생인데 집에만 오면 떼를 쓰는 것과 같은 원리예요. 집이 안전하다는 걸 아니까, 그동안 참았던 감정을 모두 쏟아내는 거죠."




쿵, 쿵, 쿵 - 상처의 도미노 효과


위의 시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을

'쿵'이라는 의성어를 통해 반복 했습니다.


"쿵, 내뱉은 뾰족한 말들은 엄마의 가슴에 박힌다."
"쿵, 엄마의 놀란 눈빛은 다시 나의 가슴을 찌른다."
"쿵, 방문을 쾅 닫고 들어와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이 세 번의 '쿵'은 감정이 전달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친구 > 나 > 엄마 > 다시 나.

상처는 이렇게 연쇄반응을 일으킵니다.


화풀이는 일시적으로 속을 시원하게 할지 모르지만,

곧 죄책감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결국 우리는 두 배로 아파하게 되죠.




현관문 앞에서 10초만 시간을 내어주세요.


그렇다면 이 악순환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요?



1. 현관문 앞에서 심호흡


집에 들어가기 전, 단 10초만 멈춰 서보세요.

오늘 있었던 일과 지금의 감정을 분리하는 시간입니다.



2. 감정의 주인 찾기


"내가 지금 짜증나는 진짜 이유는 뭐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대부분의 경우, 집에서 맞이해주는 가족 때문이 아닙니다.



3. 솔직한 고백의 힘


"오늘 회사에서 좀 힘든 일이 있었어. 그래서 예민해져 있으니 조금만 시간을 줘."

이 한 마디가 불필요한 갈등을 막을 수 있습니다.



4. 사과는 빠를수록 좋다


실수했다면 즉시 인정하세요.

"미안해, 네 잘못이 아닌데 화를 냈어."

관계는 사과로 더 단단해집니다.




전치는 나쁜 것만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전치가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전치는 생존을 위한 적응 메커니즘입니다.


부족장에게 직접 대들 수 없었던 원시인들은 다른 방법으로 감정을 해소해야 했고,

이는 집단 내 질서 유지에 도움이 되었죠.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감정을 즉각적으로,

원래 대상에게 표출한다면 우리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겁니다.

문제는 무의식적인 전치가 습관이 되었을 때입니다.




"바람이 그랬어!" - 우리 모두의 변명


시의 마지막 구절 기억나시나요?


"하지만 말할 용기가 없어서. '바람이 그랬어!' 말해 본다."


진실을 말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바람' 같은 핑계를 찾습니다.


야근 때문에,

날씨 때문에,

교통체증 때문에...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감정의 진짜 원인을 직면하는 용기입니다.




오늘 저녁, 집에 들어갈 때


심리학자 칼 융은 말했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것이다."


우리의 전치 행동도 일종의 그림자입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의 작용이죠.


중요한 것은 이를 인식하고,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집에 가져갈 겁니다.

학교에서 참았던 눈물을 엄마 앞에서 터뜨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니까요.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화를 낼 수 있는 그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을.


그리고 혹시 오늘도

엄마에게,

아빠에게,

연인에게


엉뚱한 화를 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미안해, 사실은 네가 아니라 다른 일 때문에 기분이 안좋았어."


이 한 마디로 시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사랑하는 첫걸음입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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