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불완전한 CHASER, 해결되지 않은 숙취(宿醉)

조지 손더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리뷰 : 첫 번째

by Juncus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어찌 보면 이는 매우 진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할 필요성에 어떤 당위는 없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이때의 ‘필요성’이란, ‘necessity’가 아닌 ‘need’가 된 지 오래인 것 같다.

이제는 AI조차도 웬만한 기성 작가들보다 그럴듯하게 소설을 써 내려가는 시대가 되었다. 즉, 인간보다 훨씬 그럴듯하게 모방을 할 줄 아는 기계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 어떤 비(非) 윤리가 있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되고 있다. 왜냐하면 소설이 감동적인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인간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설의 생명력은 바로 그 실존적 맥락에 있다. 하지만 AI는 인간을 모방한 기계일 뿐, 그것이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와 같은 레플리컨트가 아닌 이상 ‘실존을 산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 말인 즉, 삶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한 순간도 경험해 볼 수 없는 어떤 고도의 인간-모방체가 수많은 데이터들을 천재적으로 모방하여 써 내려간 것이 그 어떤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이 여겨진다면, 그것은 분명 이상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여기 어떤 소설이 한편 있다고 해보자. 사람들이 그것을 한번 읽어본다. 그런데 생각보다 꽤 재미가 있고, 묘사된 인물들도 매우 매력적이며, 무엇보다도 매우 감동적이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그 작품에 빠져들고, 작가가 누군지 궁금해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것이 AI가 몇 시간밖에 안 들이고 쓴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은 기만을 당했다는 당혹감에 빠지고, 몇몇은 사기라고 분개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게 정말 ‘사기’일까. 강매가 없는 한, 그리고 이것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읽었다면, 그것은 사기로 보기 힘들다. 오히려 이 상황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사람들 스스로가 자기를 기만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소설, 정확히 말하자면 플롯이 있는 픽션의 마법과 같은 힘을 새삼 재확인하게 된다.

헤겔이 예술의 종말을 예견한 이후로, 토인비를 비롯, 벤야민, 보들리야르 등 많은 역사학자나 철학자들 역시 각자 자신들만의 그리고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이에 대한 나름의 해석학적 관점들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개진한 의견들은 대체적으로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는데, 이는 헤겔이 예견한 것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의미에서의 종말이었다. 헤겔은 인간의 의식과 세계의 정신이 완전히 일치되어서, 마치 지상의 세계가 끝나고 이데아의 세계로 돌입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종말을 논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문학을 비롯한 일련의 예술과 종교, 철학 등은 이 완전한 통일, 즉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의식이 완성된 정신으로서 현상화해 가는 모자이크처럼 점철된 일련의 과정, 다시 말해 점차 완성된 형태로 변모하는 자신을 세계 속에 드러내어가는 ‘필연적인(necessary)’과정인 것이다.

하지만 벤야민이나 보들리야르와 같이, 아직까지는 지금의 사람들과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했었다고 말할 수 있는, 동시대의 저쪽 언저리에서 활동했던 비평가들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의 예술의 종말을 논했다. 그들이 말하는 요(要)는 다음과 같다. 이 종말은 통일이 아니며 해체이며, 그것이 현상화되어 가는 자기 기제의 논리는 ‘필연성(necessity)’가 아니라 ‘필요(need)’라고 말이다. 사실, 적어도 지난 한, 두 세대 동안 우리는 이미 이에 관해 대학 교양 수업을 통해 진부할 정도로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이 진부함을 또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매일 같이 경험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들 자신은 이 해체적 기제가 돌아가게 하는 볼트와 너트 중 하나이며, 자율(autonomy)이 아닌, 자동화(automatic)된 알고리즘 집합의 무수히 많은 원소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점차 깨닫게 된다. 헤겔의 저 과대망상적인 예견은 질료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그러나 형상적으로는 상당히 같은 의미에서 매우 강한 정도로 설득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는 글자조차도 읽는 것이 아닌 보는 것이 되어버린 시대이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창업하며, 무엇보다 관심을 두었던 것은 다름 아닌 글자의 ‘폰트’, 즉 디자인이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결국 그가 만든 스마트폰은 일순간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즉,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픽션을 위한 장기판이 깔린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과거 예상되었던 것 이상이다. 픽션의 힘이 이만큼 강력한 때는 과거 역사상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것은 계급화의 강력한 기제가 되었다. 요즘의 세대들은 병적으로 계급 나누기를 좋아하지만, 그 구분의 척도는 그들이 실제로 경험해보지 않았음에도, 실제보다 더 실제적으로 경험을 해 본 이미지들이다.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용어가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hyper-real’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여기서 또다시 진부한 말들을 어쩔 수 없이 꺼내야겠다.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이라는 자기 복제 표상과 그 기제에 대해서 말이다. 이 말들의 논리는 이제 그저 클리셰 정도로만 들린다. 하지만 살짝 비껴서 두고 보면, 이것이 아무 감흥 없는 관용(慣用), 즉 습관적 화용으로만 느껴지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이 말들의 진실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자기 복제의 극(極)은 그것이 더 이상 의식되지 않을 때이며, 더 나아가 그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유비적인 예로, 여기 사진 한 장과 극사실주의 회화 작품이 있다고 해보자. 이것들 속에 각각 찍히고, 그려진 대상은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차이점은 전자가 real을 표상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hyper-real을 표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질적 특징을 가진 것들이 어느 순간 전혀 구분되지 않고, 동일한 것으로 느껴진다면, 우리는 과연 이 둘 중 어느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 구분 자체의 필요성(necessity)을 느끼지 못하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는 이와 같은 자기 복제의 극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실례의 양상이 파국적이라는 건,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사람들은 실제의 삶을 부정하고, 인스타 속에 편집적으로 자기 복제된 삶을 긍정하고 싶어 한다. 우리가 괴로운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양자 사이의 괴리이다. 어느덧 우리들에게 이 두 세계 사이의 일치는 당위가 되어버렸다. 그게 왜 당위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그것이 필요(need) 하니까.’ 그렇기에 현재는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만, 행복지수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낮다. 인간은 언제나 까닭을 묻는 동물이기에, 우리는 이러한 불행의 까닭을 묻는다. 여러 대답들이 있겠지만, 그 까닭 중 하나가 바로,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픽션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의 소셜 미디어도 본질은 픽션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표현 양식(mode)들의 특징은 그것이 파편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며, 이로 인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단적으로, ‘이제 모든 건 숏폼이 대세!’라는 말을 요즘 우리는 수도 없이 듣는다. 서사와 플롯은 해체되었고, 다름 아닌 우리의 필요(need)에 의해, 이제 이 해체는 더 이상 전도가 아닌 규범이 되었다. 벤야민의 예견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숏폼 양식으로 표상되는 이런 해체로 인해, 이제는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즉, 작가라는 직업이 성역(聖域)은 아니라는 말이다. 문제는 이런 현상을 추동하는 우리의 태도 속에 잠재되어 있는 데스트루도(destrudo)적인 경향성, 즉 자기 파괴 충동이다. 우리는 현실보다는 그 현실을 매우 리얼하게, 즉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이 그것을 모방한 가상 속에 숨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런 가상이 우리의 필요(need)에 따라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파편적으로 나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퍼즐 조각들만 선별해서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게 바로 우리가 숨고 싶은 가상이기 때문이다. 이 가상의 세계는 적어도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 개인에게 있어서는 윤리적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즉, 그 순간 ‘필요(need)’하기 때문이며, 그 개인에게 있어서 이 ‘필요(need)’를 충족시키는 건, 그 순간, 그 어떤 것보다 필요한(necessary)한 당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필요(need)의 당위가 역설적으로 현실 속 우리 자신을 불필요한 존재로 부정하게 만든다.

서두가 좀 길었다. 하지만 여유 있는 분량이 허락되는 자유로운 서평이니만큼, 이 정도는 글의 균형을 크게 헤치지는 않을 것이다. 말이 길어진 이유는 분명하다. 왜 이 책을 선택했는지를 충분히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 이 책을 살펴보았을 때,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바로 들 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만약 손더스가 풀어내고 있는 대상 작품들이 19세기 러시아 단편들이 아니었다면,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픽션의 전성기에 정작 소설은 그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적 진실을 반영하는 거울로서의 허구’라는 에이론(Eiron)적인 정체성, 즉 그 아이러니 정신의 날카로움은 사라지고, 자기도취적인 알라존(Alazon)적 파편의 가상들만 편집적으로 작위 되어 갈 뿐이다. 이제 우리는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는가?’ 따위의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그저 필요(need) 하기 때문에 쉽게 읽고, 쉽게 망각할 뿐이다. 마치 장편(掌篇) 「chaser」에서 ‘체이서’를 찾는 남자처럼 말이다. ‘chaser’라는 명사는 ‘강한 술을 즐기기 위해 그전에 먹는 약한 술, 또는 독한 술을 먹고 난 뒤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 먹는 약한 술’을 의미한다. 즉, 말 자체가 모순적인 의미를 담지한 아이러니한 단어이다. 이 소설 속 인물은 사랑에 중독되기 위해서 러브 포션으로서의 체이서를 찾는다. 그리고 얼마 뒤, 그 사랑에 흥미를 잃자, 그것을 없애버리는 약, 즉 연인을 독살하는 약으로서 또 체이서를 찾는다. 내가 보기에, 요즘의 소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chaser’로 전락을 한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전락에 대해 느끼는 페이소스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였다.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아직은 의미가 있던 시절, 그 대답에 대한 흥미로운 지평을 보여준 과거의 매우 유능한 작가들 – 체홉,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고골 – 의 작품을 다시 읽는 것은 요즘 특히 강하게 느끼게 되는 이 페이소스를 달래주는 좋은 chaser가 될 것 같았고, 실제로 그러했다. 그리고 대상으로 선별된 작품들이 흥미로우면 흥미로울수록, 손더스의 말대로 ‘작가’라면 ‘좋은 소설’ 쓰기 위해 이를 어떻게 읽어낼 줄 알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이 더욱더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 기대가 얼마나 충족이 되었는지를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략 ‘만족: 불만족(아쉬움) = 3:7’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내 머릿속에 씁쓸하게 떠올랐던 것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해야만 한다.”라는 박인환의 시 구절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비유하자면, 식전(食前) 술로서 chaser로는 효과적이었지만, 숙취 해소제로서의 chaser로서는 아쉬움이 컸다.

이 책을 읽은 이유를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해놓았으므로, 왜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 컸는지는 쉽게 짐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손더스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은, 재차 말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는가?’였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내 개인의 해석학적 지평에서 얻은 그 답변은 변죽을 울리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밝혀두지만, 이건 나의 사견일 뿐이다. 이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쓰인 모든 내용은 어디까지나 나의 의견일 뿐이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역시 손더스 개인의 의견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의견들이 얼마나 설득적인가, 호소력이 있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가치관과 경험에 따른 해석의 지평에 달려있다. 즉, 정답은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에게는 이 책이 매우 유용할 수도 있고, 또 매우 감동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