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정의란 무엇인가』리뷰 시리즈 (7)

the last,『정의란 무엇인가』 chapter 8-10 요약 설명

by Juncus

1. 『정의란 무엇인가』 chapter 8-10 요약 설명

이번 회 차는 『정의란 무엇인가』 리뷰 시리즈의 마지막으로서 지난주에 미리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에 관한 설명입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방식을 상기해 보시면, 각 회 차에서 다룰 『정의란 무엇인가』의 내용을 요약하고 설명해 드리기 전, 예비적인 단계로서 이 책에서 샌델이 다루고 있는 철학자들에 대한 소개가 짧거나 다소 길게 선행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한 이유는, 혹시라도 이 철학자들에 대해 완전히 생소하게 느끼실 분이 많을 것 같아 그렇게 한 것이지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모르는 분은 거의 없을 듯합니다. 적어도 그 이름만큼은 지구상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이 철학자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도 하고, 이 글의 목적 상 그게 반드시 필요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몇 가지 사항만 짤막하게 소개한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미 알고 계시는 분들도 많이 있으시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지요. 또한 그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유명한 인물,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정교사였기도 합니다. 마케도니아라고 하면,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였던 아티카에서 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으로써 당시로서는 문화적 후진국 정도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 야만적인 소국에서 태어난 호전적인 왕자가 원정을 떠나 결국은 제국을 건설했고, 그 결과 그리스의 문화는 유럽 전역과 이집트, 소아시아 너머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나름 많이 받은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문화를 매우 숭상했거든요. 그 결과 이것이 그가 정복한 지역의 문화와 접목해서 생긴 하이브리드 문명, 그것이 바로 헬레니즘(‘Hellas’, 즉 ‘헬라스’는 고대에 그리스를 가리키는 이름이었습니다) 문명입니다.


또한 철학사적 맥락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일종의 분기점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서양철학은 크게 관념론과 경험론으로 나뉩니다. 전자가 흔히 ‘대륙철학’, 즉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철학이라면, 후자는 영국 나아가 미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스탠스입니다. 이 양자 모두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에서 기인한 것은 맞지만, 시기적으로 좀 더 먼저 철학적으로 형식화된 것은 관념론입니다. 바로 플라톤에 의해서이지요. 그리고 그의 직계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을 반성적으로 좀 더 발전시켜서 경험론적인 사고의 틀로까지 확장을 시키게 됩니다. 바로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를 질적 공리주의까지 확장시킨 존 스튜어트 밀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알렉산드로스의 원정과 함께 물리적으로도 멀리 퍼져 나갔고,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영향력은 여전히 매우 유효합니다. 그 비근한 예로 바로 마이클 샌델을 들 수 있지요. 샌델이 옳다고 여기는 ‘정의’의 관념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나온 것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윤리학 등의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학, 시학, 자연과학 등등 다방면에 걸쳐 선구적인 연구 결과를 많이 남긴 철학자로도 유명합니다. 흔히 이런 다재다능한 천재를 르네상스 맨이라고 하고, 그 대표적인 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이지요. 하지만 다 빈치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런 천재들이 분명 있었겠지만요.


그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소개는 이 정도로만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정의란 무엇인가』 8장에서 10장에 이르는 내용을 요약·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제시해 드릴 것은 하나의 실제 사례입니다. 매우 쟁점적인 사례이지요. 이와 비슷한 경우는 한국에서도 종종 일어나고는 합니다. 샌델은 이 실제의 사례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1) 쟁점 사례: 뇌성마비 환자 켈리는 학교 응원단원이 될 수 있는가?

이 사례와 관련된 논쟁과 관련해서 샌델은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① 공정성 질문


뇌성마비 환자가 응원단원으로서 자격을 갖추려면 반드시 체조를 할 줄 알아야 할까? 아니면 장애를 감안할 때 그런 요구는 부당한 것일까?


➪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그리고 흔히 가장 우선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차별 금지 원칙’ 일 것입니다.


이 원칙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본인의 잘못으로 인하지 않은 육체적인 한계가 있을지라도 체조 이외에 다른 응원단원으로서의 역할들을 잘 수행할 수 있다면, 켈리를 응원단원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겁니다.


➪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다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충분히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응원단원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그리고 이로써 다시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즉, 이 물음에 대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입장들의 차이에 따라, ‘배제를 해야 한다. vs 배제를 해서는 안 된다.’의 논쟁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a. 켈리를 배제시키는 것을 찬성하는 입장:


체조는 응원단원의 역할을 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b. 켈리를 배제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


찬성하는 입장의 주장은 응원단의 목적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응원단의 진짜 목적은 관중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므로, 켈리가 휠체어 위에서라도 관중에게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면, 그녀는 응원단의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② 분노에 관한 질문


샌델이 보기에는, 켈리의 배제를 강력히 주장하는 응원단장의 아버지가 분노한 이유는, 켈리가 응원단원이 되는 영예를 누릴 자격이 없는데도 그런 영예를 누리고 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딸이 가진 뛰어난 능력을 보며 느끼던 자부심이 조롱받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기존에는 그 목적과 그에 수여되는 영예가 정해져 있다고 여겨졌던 사회적 행위가 이제 켈리의 케이스로 인해 그 목적과 영예를 새롭게 정의 내려야 했고, 이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왜 큰 영예인지는, 미국의 틴에이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잘 아실 겁니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의 <키싱부스 시리즈>와 같은 것을 보면, 주인공이 다니는 학교의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망의 대상, 소위 최고의 ‘인싸’이자, 대외적으로는 학교의 얼굴 격으로 활동하는 여학생들은 주로 치어리더들, 즉 응원단원들입니다. 학교 커리큘럼 외에 대외활동 역시 매우 중시 여기는 미국의 문화적 특성상, 분명 우등생 그룹에 속하는 인물들이겠지요.


이러한 사례는 언제나 그리고 여전히 매우 쟁점적인 것이지요. 그렇기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찬반의 두 입장 중 어느 쪽이 더 옳다는 것보다는, 사회적 행위에는 도구적 목적(이 사례의 경우는 팀 응원이 이에 속합니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한 우수성이나 미덕을 칭송하는 영예와 모범을 제시하는 목적있다는 것이라고 샌델은 강조합니다.

2) 정의와 텔로스(telos, 목적), 그리고 영예의 관계

정의, 텔로스, 즉 목적 그리고 영예, 이 세 가지 키워드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핵심 개념들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샌델이 정리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정의는 목적론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적 행위에 있어 이에 수반되는 권리 관계를 정의(定義) 내리려면, 우선 해당 사회적 행위의 텔로스, 즉 목적을 이해해야 한다.


➪이에 따른다면, 켈리의 사례에서는 학교 응원단이라는 사회적 행위의 목적을 먼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에 따른다면, 켈리의 배제를 반대하는 입장이 주장하는 내용이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적시하고 있으니까요. 즉 ‘응원단의 목적은 관중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써 체조에 능숙한 것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체조를 잘하는 것을 보여주고, 또 그것을 보는 것이 응원단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② 정의는 영예를 안겨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적 행위의 목적을 추론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적어도 그 해당 행위가 어떤 미덕에 영예나 포상을 안겨줄 것인가를 추론하거나 주장하는 것과 같다.


➪ 하지만 이에 따르면, ‘체조를 잘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응원단의 목적은 아니며, 굳이 체조가 아니어도 다른 방식을 통해 관중에게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면, 응원단의 목적을 잘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라는, 켈리의 배제를 반대하는 입장의 주장은 여전히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합의되고 공유된 가치관에 따르면, 체조에 능숙한 치어리더는 분명 매우 칭송받을 만한 미덕을 가진 학생으로 그 사회에서 인정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행위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에는 그 해당 행위가 어떤 미덕에 영예나 포상을 안겨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3) 정의와 좋은 삶

샌델 자신이 직접 밝히기를, 지금까지 설명한 정의에 관한 세 입장들, 즉 복지, 자유, 미덕에 각각 방점을 두는 입장들 중, 그는 ‘미덕’에 방점을 두는 입장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샌델이 생각하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샌델이 들고 있는 것은,


① (‘복지’에 방점을 두는) 공리주의적 접근 방식에는 두 가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 그것은 칸트가 지적한 것과 같이 정의와 권리를 계산의 문제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또한 둘째로, 인간 사회에 있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선(善)들 사이의 질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② (‘자유’에 방점을 두는) 자유주의적 접근 방식은 위에서 제시한 공리주의적 방식의 두 문제점들 중 첫 번째 것, 즉 정의와 권리를 계산의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어느 정도 해결하지만, 두 번째 것은 여전히 충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샌델은 주장합니다. 즉, 자유에 정의의 기초를 두는 입장에서는 사람들 각자의 기호(嗜好)를 너무 있는 그대로 인정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한, 사적인 차원의 기호가 있다면, 공적인 차원의 기호도 분명히 있는 법이지요. 이런 게 흔히 문화, 관습이라는 불리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의 문제는, 샌델이 보기에, 이처럼 우리가 공적인 차원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취향이나 욕구에 의문을 가지거나 시험해 보라고 딱히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런 문제에 다소 무관심하다는 것이지요.


이와 관련된 실제의 사례로서, 샌델은 2001년 독일의 로텐부르크에서 있었던 엽기적인 사건을 하나 듭니다. 이 사건은 워낙에 유명한 사건이라 이미 알고 계시는 분들도 많을 듯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살인자와 피살자 사이의 상호 합의 하에서 이루어진 식인(食人) 행위의 사례’입니다. 그로테스크하지요? 하지만 분명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식인 욕구가 있는 어떤 남자가 인터넷 배너창에 광고를 하나 냅니다. 식인의 대상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식인의 욕구가 있는 사람과 식인을 당하고 싶은 사람이 만나서 서로 상호 합의 하에 실제로 일을 벌입니다. 즉, 사람끼리 서로 먹고 먹힌 것이지요. 21세기의 평화로운 독일의 동화 같은 도시 한복판에서 말입니다.


지난번에 소개해 드렸던 상업적 대리출산의 사례의 경우와 같이, 자유주의자들(특히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이게 서로 상호 합의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자기 소유 개념에 따라 자신의 죽음 역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여기고, 엽기적이고 불쾌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즉, 그들의 자율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게 과연 도덕적인 것일까요? 샌델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맹점들인 것입니다. 굳이 저런 극단적인 사례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와 비슷한 논쟁들이 한국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누군가 동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문제는 이 논쟁들이 사회의 통합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샌델은 바로 이런 문제를 극복할 대안으로써 미덕에 대한 정당한 대우와 이를 바탕으로 한 공동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 이것으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리뷰 시리즈가 드디어 다 끝났습니다. 최대한 쉽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는데, 이게 잘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이렇게 근 6-7주간 철학 서적에 대해 리뷰를 해드렸습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문학 분야의 책을 하나 골라 설명해 드릴까 합니다. 아마도 고전 중 하나가 될 것 같아요. 너무 어렵지는 않고, 여러분들이 흥미를 느끼실 만한 책을 골라 오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다음 시간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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