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적 사항들
이번에 리뷰해 드릴 책은 지난주에 예고해 드렸듯이, 문학 고전 분야의 책 중 한 권입니다. 익히 잘 알려진 작품으로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입니다. 이 책을 이미 읽어보신 분들도 많을 것이고, 아직 읽어보시지는 못했더라도, 아마 대부분 한 번쯤이라도 이 소설의 제목 정도는 들어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헤르만 헤세는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작가입니다. 대표작으로는 『데미안』 이외에도 『싯다르타』, 『수레바퀴 아래서』, 『유리알 유희』 등이 있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 외, 여러 단편들도 많은데 이 중에는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도 종종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도 학교 교과서에서 이 이름을 보았던 기억이 분명히 납니다. 단편들 중에는 독일인 특유의 절제된 서정성이 농후하게 표현된, 낭만적이고 회고적인 작품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여운은 상당히 오래도록 각인이 되는 듯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그 옛날, 교과서에서 읽었던 작품이 주던 느낌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에요.
그는 독일 뮌헨에서 태어나, 두 번의 세계대전을 몸소 체험하고 목도한 작가이기도 하지요. 당시 이 양차대전은 문학, 예술, 철학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에게 지독한 충격을 주었던 듯합니다. 그 결과, 인문학 제반 분야에서는 ‘실존주의’라는 통섭적인 스탠스가 진지하게 등장했고, 그 영향력은 상당했습니다. 알베르 까뮈, 장 폴 사르트르, 하이데거, 아도르노, 루카치, 벤야민, 하위징아, 브로흐 등등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나 문학가, 역사학자들 중에는 이 시기와 맞물려서 활동했던 인물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루카치의 표현대로 이 시기가 매우 ‘문제적인’ 시기였던 것이지요. 이런 시대를 사는 예민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은 지독한 권태감과 혐오, 무력감 속에서도 아주 강한 반성적 욕구를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황은 부조리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을수록, 인간의 창의성이나 사고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는 아이러니한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데미안』 은 헤세가 1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 쓴 작품입니다. 20세기 초에 벌어진 이 맹목적인 전쟁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계몽주의적인 믿음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들게 했겠지요.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주제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두 세계의 구분에 대한 회의(懷疑)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면, 싱클레어와 데미안, 이 두 주인공이 함께 전쟁에 나가고, (다소 열린 결말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끝이 납니다.
또한 주인공들이 어린 소년이었을 때부터 청년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어서 그런지 흔히 ‘성장소설’ 정도로 여겨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만 한정 짓기에는 담고 있는 내용의 깊이가 상당하지요. 하지만 제 경험상, 이 작품은 분명 ‘성장소설’이 맞습니다. 저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컸고, 돌이켜보면 그 영향력은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제가 어렸을 적 집 책장에 꽂혀 있던 이 낡은 표지의 소설을 그때 굳이 꺼내 읽지 않았더라면, 제 인생의 행로는 지금과는 좀 많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만일 ‘성장소설’이라는 말이 ‘인생의 한 시기에 교육을 목적으로 읽는 소설’이라는 의미로만 한정된다면, 이 작품의 의미는 ‘성장소설’이라는 말로 정의 내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인생의 모든 시기’에 의미 있게 읽히는 소설이지요. 싱클레어가 언제든 진지한 의지만 있다면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데미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듯이 말이에요. 그것은 자기 회복, 긍정, 세계와의 화해 등의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만약 ‘성장’이라는 말의 의미에 이런 경험들이 포함되어 있다면, 이 소설은 분명 ‘성장소설’이 맞습니다. 단, 인생 전반에 걸친 성장을 위한 소설인 것이지요.
이번 리뷰를 어떻게 진행할지를 한번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전형적인 독후감 식으로 할까, 아니면 평론 식으로 할까 등등 몇 가지를 고려해 본 끝에 작은 시론(試論) 식으로 해보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시론(試論)’이라는 말은 어떤 논의를 열린 태도로 한번 시도해 본다는 뜻이지요. 저는 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이런 논의의 대상이 될 만한 무수히 많은 주제들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어떤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던져주는 작품들 중 하나가 바로 『데미안』입니다. 그래서 이번 리뷰에서는 이 중 이 책의 내용 자체에 가장 충실한 것을 하나 골라, 책의 내용에 대한 해설을 해볼까 합니다. 왜냐하면 이게 이미 이 책을 읽은 분들에게도, 그리고 아직 안 읽어보신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아마도 이는 2주나 3주 정도에 걸쳐 진행될 듯합니다. 급한 게 아니니 천천히 즐기면서 해보겠습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도록 할게요. 우선은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앞으로 진행될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한 예비적 사항들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헤르만 헤세
1. 예비적 사항들
도플갱어 소설
이 작품은 제목은 『데미안』이지요. 그리고 이는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격의 중심인물인 ‘막스 데미안’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이 데미안 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짜 주인공은 ‘에밀 싱클레어’라는 어떤 예민한 지성과 감성을 가진 소년이지요.
먼저 소설의 화자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싱클레어’입니다. 만일 주인공이 싱클레어라면, 이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주인공이 데미안이라면, 이 소설은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됩니다.
소설에서 시점은 중요합니다. 데미안 모자(母子)가 싱클레어가 살고 있던 마을로 이사 온 이후, 싱클레어와 친해지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3인칭 관찰자 시점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이 친해지고, 싱클레어가 점차 성장하고, 방황하고, 이에 따라 서로 갈등하고, 잠시 멀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점차 이 이야기가 1인칭 주인공의 시점으로 쓰였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변화가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요? 단지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사이가 소울 메이트 수준으로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도플갱어 소설’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소설 『바라바』로 잘 알려진 스웨덴 작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가 처음 구사한 방식이라고 들었는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아무튼 이는 심리소설에서 인물을 구상화할 때 쓰이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즉, 분명 별개의 두 인물이 있지만, 소설의 플롯을 따라가다 보면, 그 인물들이 결국은 주제적으로 하나의 인물로서 통일되는 경우,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바로 『데미안』이 도플갱어 소설로도 볼 수 있다고 여깁니다.
제가 보기엔,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도플갱어 수준은 아닐지라도 서로 매우 닮은 존재들이라는 건 맞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로 알아보는 것이 바로 데미안이지요. 싱클레어보다 학년이 높은 데미안이 속한 반이 학교 사정으로 인해 보다 낮은 학년인 싱클레어의 반에서 함께 수업을 받게 된 이후, 데미안의 자리는 ‘이상하게도’ 점점 싱클레어 쪽으로 가까워져서 결국에는 바로 옆에 앉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싱클레어는 이것을 정말 신기하게 여기고, 이후 데미안에게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이에 데미안은 다음과 같이 답을 하지요.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었어. 나 자신도 처음에 앉았던 자리에서 떠나려고 생각했을 때는 어디로 가고 싶은지 똑똑히 알 수 없었어. 다만 훨씬 뒤로 가고 싶다는 기분 밖에는 들지 않았어. 실상은 너의 옆에 가고 싶다는 것이 내 의지였지만, 그것이 의식에 떠올라 있지 않았다는 말이야. 그때 동시에 네 자신의 의지가 내 의지를 끌어 준거야. 그리고 네 앞에 앉자 비로소 나의 소원은 간신히 절반만 이루어진 셈이 되었지. 즉, 내 소원은 오히려 네 옆에 앉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 거야.”
이 말인 즉, 데미안의 의지가 곧 싱클레어의 의지였고, 그것이 의식의 대상으로 표상이 되기 위해서는 단 한 사람의 의지만이 아닌, 두 사람의 의지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겁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
이와 같은 두 인물의 합일은 소설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찰나적인 것으로 잠깐 동안만 의식되었다가 이내 무의식 속으로 다시 잠기지요. 그리고 이런 의지의 승인과 거부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데미안이 아닌 싱클레어의 심리 속에서만 드러납니다. 싱클레어에게 있어 데미안은 동경의 대상이자 뭔가 어려운 존재, 불쾌한 참견자, 엄격한 감시자, 집요한 방관자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표상됩니다.
싱클레어에게 있어 왜 데미안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뭔가 껄끄러운 존재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싱클레어에게 가장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 바로 데미안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싱클레어가 평범한 소년이었다면, 이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데미안이 그에게 그런 물음을 던질 리도 없지만, 설사 던졌을지라도 싱클레어가 알아차렸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표현대로 ‘밝고 조화로운 세계’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년이었지만, 그의 타고난 예민한 지성과 감성은, 점차 성장해 감에 따라, 그로 하여금 이러한 자신의 환경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는 이 밝음 속에서 어떤 작위를 간파합니다. 그리고 그 작위의 폭력성도 간파를 하지요.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하지만 그 빛만 진짜고, 바람직한 것이며 그 빛과 함께 공존하는 그림자는 가짜이며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믿도록 상벌(賞罰)의 형태로 훈육을 받는다면,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많은 사람들은 그게 사실이라고 믿는 쪽을 택할 겁니다. 왜냐하면, 시바타 쇼의 소설 『청춘』에 나오는 구절처럼, “믿는다는 건, 그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타협에 쉽게 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전적으로 옳다는 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동기이지요. 싱클레어의 동기는 ‘밝은 세계’의 위선을 까발리고 그것에 침을 뱉고 파괴시킨 후, 새로운 도그마를 세우고자 하는 식의 반사회적 파괴 본능이 아닙니다. 그저 강한 빛으로 어둠을 가리는 것이 아닌, 빛이 있다면 반드시 그림자도 있다는 걸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은 것뿐입니다. 데미안과 만나기 전에는 싱클레어도 이러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자각하지 못합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듯이, 데미안이라는 거대한 새가 그 부리로 알의 껍질을 쪼아줌으로써 그 알 속 세계에 잠들어 있던 싱클레어는 그 세계 밖으로 나가기 위해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완전한 합일은 두 명의 매개체를 통해 구체화됩니다. 그리고 이는 싱클레어가 두 세계 사이에서의 오랜 번민을 변증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가집니다. 그 두 매개체는 여인들입니다. 한 명은 베아트리체이고 다른 한 명은 에바 부인이지요.
어느 날 싱클레어는 우연히 공원에서 어떤 이상적인 외모의 소녀를 발견합니다. 그 소녀를 본 순간, 그는 깊은 고양감을 느꼈음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를 보며,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단테의 베아트리체였거든요. 단테의 베아트리체는 연옥과 지옥을 거쳐 온 단테에게 마지막 종착지이자 영원한 구원의 안식처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존재이자, 그의 첫사랑이기도 하지요. 이는 곧 성(聖)과 성(性)의 변증적 종합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싱클레어를 괴롭게 했던 두 세계 사이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니체의 표현대로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닌, 두 세계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이 우연히 마주친 한 소녀의 모습을 통해 발견한 그는, 그날 이후 자신의 머릿속에 각인된 그녀의 얼굴을 끊임없이 스케치합니다. 그리고 점차 그 얼굴은 이미 그가 잘 알고 있는 얼굴, 즉 데미안의 얼굴로 변하더니, 이윽고 싱클레어 자신의 얼굴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운명과 마음은 한 개의 개념에 대한 다른 내용들이다.”
노발리스는 ‘철학이란 본디 향수(鄕愁)이자, 어디서든 집에 있고자 하는 충동’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데미안의 모친인 에바 부인을 처음 만났을 때 싱클레어가 느꼈던 감정이 딱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그동안 경험했던 그 고통스러운 번민과 탕아적 방황은 에바 부인을 만남으로써 의미 있는 것으로서 결실이 맺어집니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오랜 고향 같은 느낌을 주었고, 그 모든 고통의 경험들은 이 고향에 다시 돌아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여정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이는 어린 시절처럼 다시 ‘밝은 세계’ 속의 어머니 품속으로 숨어 들어감으로써 유야무야 되는 유아적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를 온전히 회복하고, 세계와 대면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싱클레어의 영혼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최대한 간결하게 쓰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글이 길어진 것 같네요.^^; 이번 회 차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회 차부터는 본격적인 시론(試論)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시론의 주제는 아마 대부분 예측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맞습니다. 이 책의 주제이자, 싱클레어를 번민케 한 그 주제, 두 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흥미가 있으신 분들은 시간이 되시면, 『데미안』을 한 번 다시 훑어보신 후, 이번 리뷰들을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서로의 해석학적 지평을 비교해 보고, 그것이 완전한 평행선에 놓여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맞닿을 수 있는 것인지를 확인해 보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드리는 게 제가 이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이유이니까요. 그럼, 다음 시간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