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계와 écriture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 예비적 사항들을 설명드리면서, 이번 주는 본격적으로 이 작품에 대한 시론(試論)을 시도해 보겠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론의 주제는 이 책의 주된 테마이기도 한 ‘두 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도 말씀드렸었어요.
그렇다면,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일단 분명합니다. 소설 『데미안』에서 말하는 ‘두 세계’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과연 무엇인지가 바로 그것이지요. 이 ‘두 세계’에 대한 인식은 주인공인 싱클레어의 방황과 성장의 근본 이유이자,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살고 있는 세계, 즉 철학적으로 말해서 ‘실존’이기도 합니다.
‘실존(實存, existence)’라는 단어는 흔히 쓰이는 말이지만,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쓰는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매우 쉽게 쓰이는 말이지만, 사실 이 말은 그 뜻을 알고자 하면 매우 어렵고 모호한 말들 중 하나이지요. 그래서 국어사전을 한번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설명이 되어 있더군요.
① 실제로 존재함. 또는 그런 존재.
② (철학 용어) 사물이 인식이나 의식에 독립해서 존재하는 일
③ (철학 용어) 가능적 존재로서의 본질에 대해 현실적 존재
이 중 ②번은 인식론적인 맥락에서의 설명으로, ‘실존’이라는 표현보다는 ‘실재(實在)’라는 표현이 더 많이 사용됩니다. 대학에서 철학 개론이나 철학 교양 수업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 분이라면, “Ding an sich”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영어로 직역하면 “Thing in itself” 가 되지요. 즉, (인간의 인식이라는 필터링을 통한 것이 아닌) 사물이 그것의 본질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칸트의 용어로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 주관의 너머에 있는 “물자체(物自體)”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오감을 통해 경험한 것을 ‘사실’이라고 여기고, 이 사실이 곧 ‘본질’ 일 것이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사태나 사물에 대해 일관적으로 똑같이 이야기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지요. 예를 들어, 색감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에게는 푸른색으로 보이는 것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노란빛이 도는 초록색으로도 보이고 하는 일 종종 있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다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한편, ③번이야말로 철학에서 ‘실존’이라는 말로써 표현하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이 경우에 ‘실존’은 존재론적인 용어로서 다른 표현으로는 ‘현존(現存)’이라고도 하지요. 이 ‘현존’이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말에는 ‘시간’이라는 한정된 조건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즉, 시간 속에 존재하는 양태를 곧 ‘실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지요. 이 책의 제목이 왜 이러한지는 이 설명을 보면 좀 와닿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시간’이라는 개념이 중요할까요? 위의 사전 상의 정의를 다시 한번 봐 볼까요?
③ (철학 용어) 가능적 존재로서의 본질에 대해 현실적 존재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본질(本質, substance)’입니다. ‘substance’라는 말을 좀 분석해 볼까요? 이 말은 ‘sub-’이라는 접두사와 ‘stance’라는 어근으로 구성된 합성어입니다.
‘sub-’의 의미는 ‘밑에, 기저에’라는 의미이지요. ‘잠수함’을 영어로 ‘submarine’이라고 하지요. 즉 ‘바다 밑에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stance’는 ‘stand’의 명사형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즉, ‘서 있음. 지탱하고 있음.’ 정도의 의미이지요.
그러므로 ‘substance’라는 말의 의미는, ‘기저(基底)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변화무쌍한 현상들 이면에 불변하고 보편적으로 항구히 유지되는 특질, 그것이 바로 ‘서브스턴스’, 즉 ‘본질’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변화로부터 초월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시간으로부터 초월하고 인간의 인식 주관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바로 이러할까요? 그렇지 않지요.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고 성장하다, 점차 늙어서 죽습니다. 시간과 그 추이 따른 변화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습니다. 즉, 인간은 ‘시간’ 속에서 삽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실존’의 근본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시간 속에 사는 것, 실존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를 지칭하는 많은 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 ‘생(生)’, ‘시대’, 그리고 ‘세계’ 등등 말이지요. 본질의 세계, 즉 물자체의 세계 혹은 플라톤이 말하는 실체의 세계 즉, 이데아와 같은 곳은 시간을 초월한 곳이기에 변화무쌍할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세계와 모순된 성질의 것이니까요. 하지만 인간이 사는 세계, 즉 시간 속의 세계는 다르지요. 늘 변화무쌍합니다. 개인들의 삶도 변화를 피할 수 없고, 세상도 늘 변합니다. 단지 그것이 느리냐, 빠르냐 하는 속도의 문제일 뿐입니다. 이러한 실존의 구체적인 모습,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아마도 ‘실제(實際, reality)’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실제’라는 것을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철학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state of affairs(things)’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현재 경험되는) 사태들(affairs, things)의 상황’ 정도의 의미입니다. 이 말에 담긴 뉘앙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브스턴스’ 즉 ‘본질’과는 매우 다른 느낌이지요. 즉 매우 잠정적인 느낌입니다.
이러한 잠정성, 일시성 등이 실존의 내용입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불안을 야기하지요. 실존주의 소설가의 상징과도 같은 F. 카프카의 작품들이 그렇게 불안으로 점철된 것도 아마도 분명 이에 대한 매우 예민한 인식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따라오신 분들은 아마도 공통적으로 느끼실 것 같습니다. ‘실존’이라는 말은 매우 인간학적인 용어이며, 인간이 스스로의 불완전성에 대해 온전히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헤르만 헤세가 직접 그린 수채화, <몬타뇰라 타치노의 풍경>, 1933년 (사진 출처 : 호반 아트리움)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데미안』에서의 두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할까요? 데미안과 만나기 전, 싱클레어는 “조화의 세계”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세계가 진짜 있고, 자신은 그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믿음은 습관적인 학습의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 반성의 결과 얻게 된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데미안의 등장은 싱클레어에게 익숙했던 이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싱클레어는 프란시스 크로머라는 매우 질이 나쁜 아이에게 괴롭힘과 협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조화롭고 밝은 세계만 알고 살아왔던 어린 그에게 인생 최초의 시련이었지요. 하지만 이 고통 속에서 그를 구원해 준 것은 그가 원래 속해 있던 세계, 즉 “조화의 세계” 속 누군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 이 세계는 그에게 크로머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상대였지요. 그는 호기심에, 즉 분명 자발적으로, 그런 아이랑 어울리게 된 자신이 조화롭지 못한 행동을 해버렸다는 것을 알았고, 무엇보다 “다른 세계” 혹은 “어두운 세계”에 스스로 발을 들여 버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처벌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가 속해있던 세계의 룰을 어긴 것이었으니까요.
예민한 천성을 가진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괴로워합니다. 그가 겪는 이 고통의 구체적인 내용은 두려움과 죄의식이었지요. 바로 이때 그를 구원해 준 사람이 바로 데미안입니다. 그는 너무도 간단하게 크로머를 제압하지요. 폭력을 쓴 것은 아닙니다. 또한 싱클레어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어떤 ‘처벌’을 한 것도 아니에요. 단지 크로머 자신이 얼마나 허울 좋은 겁쟁이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말만 했을 뿐입니다. 동시에 싱클레어에게도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크로머를 그다지도 두려워했던 이유는 그 아이가 정말 대단한 악당이어서가 아니라, 그 아이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생각을 사실로 믿어버리게 만든, 싱클레어 자신의 두려움과 그런 아이와 한때나마 즐겁게 어울렸다는 죄의식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크로머에게 협박을 당한 싱클레어를 발견한 데미안은 크로머에 대해 싱클레어가 느끼는 두려움을 이야기하며 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기왕 여기까지 이야기를 했으니, 한 마디만 더 하겠어. 너는 그 자식한테서 벗어나야만 해! 별다른 방법이 없을 때는 그 자식을 때려죽여 버려야만 해! 만약 네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신바람이 나서 경탄을 금치 못할 거야. 나 또한 너를 도와줄 것이고!”
상당히 과격한 말이라는 건 누구나 공감하실 겁니다. 하지만 이 말이 말 그대로의 의미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데미안은 크로머를 폭력적으로 제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지요. 그저 스스로 꼬리를 말고 도망가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데미안이 여기서 화를 내고 있는 것은 크로머가 아닙니다. 그가 정말 화를 내고 있는 대상은 바로 싱클레어가 느끼고 있는 부조리한 불안과 두려움이지요. 그가 때려죽여서라도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2의, 제3의 크로머는 살면서 언제든 나타날 수 있고, 그럴 때마다 싱클레어의 영혼은 왜곡되어 갈 테니까요.
크로머와의 사건은 싱클레어가 “다른 세계”에 대해 자각을 하는 1차 계기입니다. 2차는 사춘기를 지나며 ‘탕아’로서의 생활을 보낼 때이지요. 이 두 차례의 과정을 통해 그는 자각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이런 세계를 향한 충동이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만일 데미안이 없었다면, 싱클레어는 아마도 분명 스스로를 기만하는 방식으로 이 혼란을 ‘봉합’했을 겁니다. 즉, ‘극복’이 아니라, 대충 타협을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는 두 세계 모두와의 타협이 될 겁니다. 즉, 적당히 눈 가리고 아웅 하면서, 남도 속이고, 자기 자신도 속이면서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세계 중 어느 쪽으로 인해 싱클레어의 고통이 시작되었던 것일까요? 전통적으로는 ‘다른 세계’ 즉 ‘어두운 탕아의 세계’ 때문이라고 배웁니다. 그리고 물론 이는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요. 하지만 온전히 이 세계에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이 세계’, ‘조화로운 밝은 세계’는 정말로 그렇게 조화롭고 밝기만 한 것일까요?
이것은 ‘앎’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을 했듯이, 이데아와 같은 실체의 세계가 아닌 실존의 세계 속에 사는 인간은 결코 완전한 앎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Ding an sich’ 즉 ‘물자체’를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인간의 인식의 한계 내에서는 ‘본질(substance)’은 제로(zero)로서 경험된다고 말하는 게 가장 정직한 스탠스일지도 모릅니다. 그게 바로 불교의 공(空) 사상이지요. 종종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을 불교적 스탠스와 연결 지어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헤세가 일관되게 가지고 있는 이런 문제의식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대개 이를 알고 있다고 쉽사리 믿어버리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믿음’ 일뿐이지요. 그런데 실제로 이런 믿음이 ‘사실’이 되기도 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인 것처럼 되어버리지요.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메커니즘 중 하나가 바로 헤게모니에 의한 도그마입니다. 이는 대개 ‘서사(敍事, narrative)’의 양태를 띱니다. 그리고 서사의 힘은 매우 강력하지요. 모든 감쪽같은 거짓말은 서사의 형태를 띱니다.
자크 데리다는 ‘에크리튀르(écriture, 문자)’라는 용어로 이를 지적했습니다. 즉, 서사의 본질은 작위임에도 그것이 문자 언어로써 기록이 되면 될수록(즉, 공시(共時)적이고 통시(通時)적으로 공유되고 전승, 전파될수록) 실체적인 것으로 믿어지기 시작하며, 이 믿음이 헤게모니를 얻고 도그마를 가지게 되면, 강력한 권위를 가진 사실이 되어버린다고 말입니다. 이 말인 즉, 인간이 속한 불완전하고 변화무쌍한 실존의 세계는 서사적 믿음을 통해 시간 초월적인 실체적인 세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서사적 믿음이라는 것의 본질은 ‘작위’입니다.
한편, 거꾸로 말하면, 이는 이미 에크리튀르로 인정된 서사 말고도, 다른 서사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소설 『데미안』의 경우, 그것은 바로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던지는 ‘카인’에 관한 사고실험입니다.
성경과 같은 경전은 성공한 에크리튀르의 전형입니다. 그리고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구약》의 〈창세기〉에 나오는 매우 오래되고, 유명한 서사입니다. 또한 소설 『데미안』을 잘 읽어내기 위해서 반드시 조심스럽게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이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해보도록 할게요.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부연하자면, 지금 제가 시론(試論)의 형태로 여러분들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 역시 일종의 서사일 것입니다. 즉, 온전한 진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사의 본질은 작위일지라도 좋은 서사는 늘 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로 소설 『데미안』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지요. 지금 제가 시도하고 있는 내러티브가 여러분들에게 진실한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