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속 ‘카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
이번 시간부터 주로 다룰 내용은, 지난주에 미리 말씀드렸던 대로, 소설 『데미안』 속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이자 다소 위험할 수도 있는 서사, 즉,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들려주는 ‘카인과 아벨’에 관한 가설입니다.
주로 복음서와 예언서 위주인 《신약》과는 달리, 《구약》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야기, 즉 서사의 결정체 중 하나가 바로 이 《구약》이지요. 흔히 서양 문명의 기저를 이루는 헤게모니를 장악한 두 스탠스를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고 합니다. ‘헬레니즘’은 ‘헬라스(Hellas)’, 즉 그리스 문명에 기원을 두고 있고, ‘헤브라이즘’은 ‘헤브루(Hebrew)’ 즉 유대민족의 신앙과 전통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스탠스들은 그들만의 아주 강력한 서사를 가지고 있어요. 바로 《그리스 신화》와 《성경》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후 로마 제국이 거의 2천 년에 이르는 기간, 즉 연대기적으로 흔히 중세 이전 고대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유럽을 지배하면서, 《그리스 신화》는 《그리스·로마 신화》로 확장됩니다. 즉, 실용적이고 기존의 것을 응용하는 데 탁월했던 로마인들이 그들이 모방할 전범으로 삼을 문화로 선택한 것이 바로 ‘헬레니즘’이었던 것이지요. 이 말인 즉, 그 당시에는 헤브라이즘은 아직 주변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고, 당시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가장 익숙하여, 그들의 믿음 체계에 헤게모니를 잡고 있었던 것은 바로 ‘헬레니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후 유럽 전역으로 퍼진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 예수의 탄생과 죽음, 이후 기독교 복음의 전파, 이에 대한 로마의 가혹한 탄압과 기독교인들의 순교라는 고난이 오랫동안 이어졌고, 결국에는 313년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르지요, 그리고는 결국 천국의 열쇠를 쥐었다고 하는, 사도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 되어, 로마의(이 말은 곧 전 유럽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의 황제로서 유럽의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중세가 시작됩니다. 이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전은 곧 헤게모니의 이전, 즉 헬레니즘에서 헤브라이즘으로의 이전을 의미하기도 하겠지요. 아무튼 이런 순탄치 않은 과정들을 겪으면서, 헤브라이즘은 점차 그 영향력을 유럽 세계 전역에 끼쳐 결국에는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해 준 강력한 조건, 그것이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고, 그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에크리튀르, 즉 성공한 서사, 《성경》 덕분입니다.
사실 모든 민족은 나름의 서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북유럽 신화, 브리튼, 즉 잉글랜드의 드루이드 신화, 인도 브라만교의 경전 《베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 등등 신화가 없는 민족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보편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각인’이 되냐 하는 것인데, 이것에 성공한 신화, 즉 에크리튀르는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데미안』에서 두려움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공포에 떨고, 또 매우 격렬하게 반발하며 번민하는 싱클레어의 모습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소설이지만, 싱클레어가 보이는 태도는 매우 개연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이걸 읽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싱클레어의 태도가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소설’이라는 또 다른 서사의 양태, 즉 ‘작위’된 이야기인 이 작품이 ‘사실이 아님’에도 매우 진실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싱클레어를 그렇게나 번민케 하는 그 서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물론 ‘두 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강력한 에크리튀르로서의 기원을, 헤르만 헤세는 《구약》의 〈창세기 편〉에서부터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매우 연원(淵源)이 깊다는 것이지요. ‘연원이 깊다’라는 말은 선형(線形)적인 표현입니다. 즉, 직선적 이미지이지요. 왜냐하면 흔히 이 말을 들을 때면, 우리는 ‘거슬러 올라간다.’라는 의미로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곧 ‘시간’과 관련된 인식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실존적 존재인 인간은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인 즉, 어떤 매우 강력한 권위를 가진 서사가 연원이 깊으면 깊을수록 즉, 매우 오래된 것일수록 사람들의 의식은 그것에 귀속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경우 이런 서사는 마치 강력한 ‘자기장’과 같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은 거의 ‘자동적(automatic)’으로, 즉 무의식적이고 반사적으로 그것을 중심으로 돕니다.
지난번, 『정의란 무엇인가』의 리뷰에서 칸트 철학에 관해 간단하게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자율성(autonomy)’과 선의지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렸던 게 기억나실지 모르겠네요. ‘자동성(automaticity)’과 ‘자율성(autonomy)’은 비슷하게 들리거나 보일지는 몰라도,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거의 반의어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지요. 이 두 태도의 차이를 가르는 것은 바로 ‘의지’의 개입입니다. ‘자동성(automaticity)’은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태도로서 무의식적이고 반사적인 행위, 즉 수동성을 의미합니다. 반면, ‘자율성(autonomy)’ 의지가 개입된 태도로서 매우 의식적이고 반성적인 행위, 즉 능동성을 의미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좋은 서사의 필수조건 중 하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능동적으로 그것을 해석할 여지가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평론가의 입장에서 제가 어떤 작품을 읽어내기로 선택할 때 그 판단의 기준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는 저 이외에도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고전이란, 즉 훌륭한 에크리튀르란, 그 서사의 해석학적 지평이 넓고 깊어야 합니다. 즉, 실존적 존재인 인간이 어느 시간 속에서 그것을 읽든지 간에, 그 서사가 그 각각의 시간 속에서 의미 있는 춤을 출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의 〈창세기 편〉의 ‘카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 역시 이런 서사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데미안』 속에서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카인의 낙인을 가진 자’로 분명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세계 사이의 번민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자 노력하는 싱클레어의 모습이 이 소설의 주제 중 하나라면, 그들이 표명하는 이런 자의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이는 제 추측입니다만, 만일 《구약》의 ‘카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데미안』이라는 작품에 대한 모티프도 헤르만 헤세의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말인 즉, 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그 해석학적 지평이 매우 넓은 좋은 서사라는 뜻이겠지요.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카인과 아벨’에 관한 두 개의 해석, 즉 전통적인 해석과 데미안이 들려주는 해석, 이 두 가지에 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할까요? 우선 순서에 맞게 전통적인 해석부터 정리해 보도록 할게요.
‘카인’과 ‘아벨’은 친형제라는 건 대개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두 형제가 아담과 하와, 즉 이브의 자식들이라는 건 생각 외로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아담은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야훼, 즉 신(神)과 검지손가락을 서로 맞닿으려고 하는, 바로 그 사내이지요. 즉, 야훼가 스스로의 모습을 그대로 본 따서 창조했다는 최초의 인간입니다.
이 최초의 인간은 ‘에덴’이라는 장소에서 신에 의해 창조됩니다.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 ‘극락’ 정도의 뜻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후 그 의미론적인 외연이 더욱 넓혀져서, ‘낙원,’ ‘파라다이스’ 등의 의미로 확장이 되고, ‘완전한 곳’ ‘결핍이 없는 곳’ 등의 의미까지 가지게 되지요.
결핍이 없는 동산인 만큼, 에덴 속에는 식용으로 삼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수목이 심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논리적으로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이 나무들 중에는 <선악과가 달린 나무>, 즉 <선과 악을 구별하는 과실이 달린 나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어떤 ‘역설’의 단초가 발견됩니다.
신과 아담은 서로 어떤 약속을 합니다. 이 ‘약속(covenant, 커버넌트)’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과 ‘신약’은 영어로 각각 ‘the Old Testament’, ‘the New Testament’라고 하지요. 여기서 ‘testament’라는 말 역시 본래는 ‘인간과 신 사이에 맺은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약속이란, 쌍방의 합의이지요. 그리고 그 약속을 잘 이행하면 어떤 보수가 따르지만, 그것을 어기게 되면 처벌이 따릅니다.
신과 아담이 맺은 커버넌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신이 창조한 에덴동산을 잘 경작하고 보수할 것.
둘째. 다른 유실수의 과실은 먹어도 상관이 없으나 선악과의 과실은 절대 따먹지 말 것.
에덴동산을 잘 경작한다는 것은 그 속에서 자라는 모든 동식물을 잘 돌본다는 뜻일 겁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선악과가 달린 과실수 역시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담이 가꾼 동산의 모든 과실은 먹을 수 있으나, 이 선악과만큼은 그것을 따 먹는 것이 금지됩니다. 그러면 아담처럼 완전한 인간(신이 자신을 모방해서 만든 최초의 인간이니 완전함에 매우 가까웠을 겁니다)이라면, 능동적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왜 모두 똑같이 소중하게 가꿔야 하면서도, 왜 저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만큼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을 것이고, 이런 호기심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이때 아담의 이 의문을 더욱 추동하는 개체가 등장하지요. 바로 ‘뱀’입니다. 이 뱀 역시 논리적으로는 에덴동산에 있는 게 맞습니다. 왜냐하면 에덴은 ‘결핍이 없는 곳’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바로 이 뱀의 부추김 때문에, 신과 맺은 약속, 즉 커버넌트를 위반했고, 그 결과, 그 처벌로서 아담은 완전한 존재에서 결핍이 있는 존재가 되어 에덴에서 아내인 이브와 함께 추방당합니다. 즉, ‘결핍이 없다’는 그 전제 조건에서 ‘결핍이 있다’는 것이 귀결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모순이고 역설이지요. 그리고 바로 이런 아이러니가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만이 가진 한계이자 가능성, 즉 ‘실존과 본질’ 사이의 내용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원죄’라고 표현합니다. 즉, 인류가 최초로 저지른 죄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구체적인 내용은 바로 신과 맺은 최초의 약속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저버리게 된 이유는 바로 아담이 가진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앎’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합니다.
무언가를 아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진실을 알고자 하는 것’, 그것은 나쁜 것일까요? 좋은 것일까요? 혹은 필요한 것일까요? 아니면 필요보다는 어느 정도의 제제가 요구되는 것일까요?
이와 관련된 논쟁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모든 게 다 알려질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많은 지식이 공유되면 될수록 또 그만큼 사기와 속임수가 증가하고 사회는 아노미에 빠지고....... 이게 인간이 사는 세상의 모습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창세기>의 서사는 매우 실존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흥미롭고요.
또한 ‘앎’과 관련된 <창세기>의 이 에덴 서사는,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인식론과 매우 대조됩니다. 플라톤은 올바른 지식, 즉 에피스테메(episteme)를 가져야만, 인간이 속한 본래의 고향인 이데아로 회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데아’는 ‘에덴’과 같은 완전한 세계를 의미합니다. 아담은 선과 악을 알고자 해서 에덴에서 쫓겨났는데, 플라톤은 그 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뱀’에 대한 인식 차이도 드러납니다. <창세기>에서는 이를 ‘사탄’에 가까운 존재로 표현하고 있는 반면, <그리스 신화>에서 뱀은 ‘지혜’의 상징입니다.
이러한 대조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사이의 극명한 차이와 긴장을 잘 보여줍니다.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문화운동 당시, ‘복고’, ‘회귀’라는 표현이 쓰이고, 이를 ‘다시(re-)’, ‘태어남(naissance)’이라고 표현을 한 것도, 100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알고자 하는 욕구를 원죄적인 것으로 여기던 스탠스에서 잘 알아야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헬레니즘적 믿음으로 다시 변증적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앎’과 관련된 이런 긴장은 중세 말과 근대 초 유럽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신구(新舊) 종교 전쟁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뉴턴 등도 가입되어 있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 ‘프리메이슨’과 같은 비밀결사조직을 ‘영지주의자(Gnosticism)’ 즉,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 사상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스탠스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지요.
소설 『데미안』의 내용들도 이런 반영론적 시각에서 보면 그 해석학적 가능성이 더욱 깊고 넓어집니다. 즉, 왜 데미안은(곧, 헤르만 헤세는) ‘카인과 아벨’에 관해 저와 같은 발상을 내놓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의미 있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설 밖의 지평도 충분히 고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간 속에서 살면서 그 시간 속에서 서로 인과적으로 영향을 끊임없이 주고받는 실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창세기>에 나온 에덴 추방 이후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는 자식들을 낳고 삽니다. 아마도 분명 부족 사회를 이루고 살았을 겁니다. 그 자식들이 차례로, 카인, 아벨, 그리고 셋이지요. 이 중 아벨은 자신의 형으로부터 머리에 돌을 맞아 죽고, 카인은 이마에 표지를 단 채 자신의 부족에서 쫓겨나 야훼가 정해준 장소, 에덴의 동쪽 땅으로 가고, 그곳에서 그 후손들은 도시를 이루고 삽니다. 하지만 이 도시 역시 결국에는 타락을 하여, ‘노아의 방주’ 에피소드에서 홍수라는 방식으로 야훼의 최종 처벌을 받고 사라지게 되지요. 아벨은 이미 죽었고, 카인의 후손들은 저렇게 처벌받았다면, 노아는 대체 어디서 나온 인물일까요? 그는 아담과 하와의 셋째 아들인 셋의 후손입니다. 셋의 후손이 아브라함이고, 아브라함을 두고 흔히 지금의 인류의 조상이라고 하니까요.
이해를 돕기 위한 연대기적 설명은 이 정도로 된 것 같으니, 이제 ‘카인과 아벨’의 에피소드에 대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둘은 모두 야훼와 커버넌트를 맺고 있었습니다. 즉, 자신들이 경작한 곡물이나 기른 동물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지요. 그 대가로 야훼는 그들이 풍작을 이루고 가축을 잘 기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겠지요. 이중 카인은 쉽게 말해 농부였고, 아벨은 목동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야훼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 역시, 카인은 곡물이었고, 아벨은 양 같은 가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함께 야훼에게 이렇게 각각 자신들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을 제물로 바칠 때마다, 야훼는 어찌 된 까닭인지(여전히 그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창세기>에서도 그런 설명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벨의 것만 받고, 카인의 것은 받지를 않았습니다. 즉, ‘편애’가 있었던 것이지요.
《구약》에서 신이 특정 누군가를 편애하는 경우는 종종 나옵니다. 대표적인 게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요나’가 그 예이지요. 하지만 왜 그들만 특히 편애하는지에 관한 설명은 없습니다. 그저 그것은 신의 의지이고 뜻일 뿐입니다. 《구약》을 보면 인간은 신의 뜻에 관해 까닭을 묻지 않고, 즉, 더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그 어떤 경우보다 혹독한 처벌이 내려지지요. 바로 ‘욥’의 경우가 그 예입니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들으면, 마태가 ‘왜 나에게 이렇게 혹독하십니까?’라고 울부짖는 가사는 없습니다. 그저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가사만 반복될 뿐이지요.
하지만 카인은 이렇게 순종적이지 않았습니다. 신에게 왜 자신이 바친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는지 까닭을 묻고, 화를 내며, 원망을 하지요. 이에 야훼는 경고를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결국 자신의 동생의 머리를 돌로 쳐서 죽이게 됩니다. 인류 최초의 동족살해이지요. 분노한 야훼는 그가 바치는 어떠한 곡물도 받지 않고, 그를 광야에 떠돌게 만듭니다. 그러다가 또 어찌 된 까닭인지, 사람들의 비난과 시선을 두려워하던 카인의 이마에 표지를 새겨 주면서,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줍니다. 그리고는 집 없이 떠돌던 그에게 정착할 곳으로, 에덴의 동쪽 땅을 지정해 주고, 그곳에 가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창세기 편> 속에 기록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왜 야훼는 아벨만 편애했는가와 왜 야훼는 카인에게 표지를 주어 그가 저지른 끔찍한 살인의 죄에 sanction을 주었는가입니다.
‘sanction’이라는 단어는 매우 역설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에는 ‘처벌’, ‘제제’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허가’, ‘승인’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카인의 표지는 바로 이 ‘sanction’과 같습니다. 즉 죄인의 낙인임과 동시에 어떤 특권의 상징이지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는 다음 시간에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들려주는 이와 관련된 사고실험을 이야기해 봄으로써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