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과 아벨'에 관한 데미안의 사고실험
헤르만 헤세 『데미안』에 관한 시론적 리뷰를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까지 진행된 이야기는 ‘카인과 아벨’에 관한 두 서사 중 첫 번째 것, 즉 전통적인 에크리튀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에는 이 서사의 다른 하나, 즉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들려주는 ‘카인과 아벨’에 관한 사고실험에 관해 이야기해 보기로 했었지요. 그럼, 우선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부터 한번 살펴보도록 할까요?
우선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에 관한 자신의 해석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실지로 그 이야기는 아주 주의할 가치가 있는 거야. 그 이야기는 수업시간 중에 배우는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훨씬 주의할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해. 선생님은 그 이야기에 대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아. 그저 신이나 죄나 그밖에 흔한 일들만을 말했을 뿐이야.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
그리고는 잠시 싱클레어의 반응을 살핀 후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즉 이 카인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다른 해석도 할 수 있어. 우리들이 배우고 있는 많은 것들은 틀림없이 옳고 사실이지만, 또 어느 것들은 선생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볼 수도 있는 거야. 그러면 대개는 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지게 되지. 예를 들면, 저 카인과 그 이마의 표지만 해도 우리들이 듣고 있는 설명만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지금 제가 데미안의 이 말들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어떤 부분은 볼드처리를 또 어떤 부분은 볼드처리+밑줄 표시를 하고 있지요.
우선, 첫째, 볼드체로 처리한 부분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데미안이 보여주는 태도, 다시 말해, 교조화된 즉, 도그마를 가진 에크리튀르에 대해 그것을 그저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또 완전히 반대로, 맹목적으로 냉소를 보내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능동적으로 비판하고 반성해 보려는 태도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둘째, 볼드체+밑줄 처리한 부분은,
지난주에 강조해 드렸던 그 의문, ‘왜 야훼는 카인에게 표지를 주어 그가 저지른 끔찍한 살인의 죄에 sanction을 주었는가?’와 비슷한 맥락의 질문이 이 문장 속에 담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의문은 첫 번째 조건, 즉 제가 볼드체로만 처리한 부분에서 강조되는 태도가 전제되었을 때만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의문이지요. 이미 자리 잡은 강력한 에크리튀르를 맹목적으로 믿거나 혹은 반대로 그것에 맹목적으로 냉소를 보이는 태도는 결코 이런 의문을 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태도들에게 있어 이미 결론은 언제나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시 데미안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사내가 자기 형제와 다투다 때려죽여 버린다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그리고 그 후 그가 불안해져서 기가 죽은 채 숨어 버린다는 것도 또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그러나 (선생님이 하신 말처럼) 그가 비열하기 때문에 몸을 보호하게 됨과 동시에 다른 모든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훈장 같은 표지로 표상된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지?”
데미안의 이 의문 제기에 대해 싱클레어는 흥미를 느끼며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는 <창세기> 속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어본 분들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 어린 시절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었으니까요. ‘신은 왜 아무 죄 없이 착하기만 한 아벨을 시기해서 죽인 카인을, 그것도 자신의 친동생을 그렇게 잔혹하게 죽인 자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왜 그를 보호해 준 것이지?’ 하는 의문 말입니다.
그것을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카인이 ‘비열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인 즉, (이 부분은 조금 과격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시론일 뿐이라는 걸 감안해 주세요) 카인이 신과 새로운 커버넌트를 맺었다는 뜻일까요? 즉 <창세기> 속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는 그 부분이 생략되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카인은 자신이 죽인 아벨을 ‘희생양’ 즉 제물로 삼아, 신과 새로운 ‘거래’를 했다는 뜻일까요?
‘커버넌트 covenant’란, 약속 이행의 대가로서 일정한 보수가 따르는 거래를 의미합니다. 즉, 신을 위해 인간이 무언가를 하면, 신은 그 대가로 인간에게 무언가를 주지요. 단, 인간과 신은 존재론적으로 전혀 다른 질(質)에 속해 있습니다. 인간은 시간 속에 사는 유한한 존재, 즉 실존적 존재인 반면, 신은 시간을 초월한 무한한 존재, 즉 ‘실체 substance’입니다. 『신국론(神國論)』의 저자이자 중세 전반기 교부철학의 아버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란 신이 창조한 세계의 특성이고 천지창조 전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천재로 알려진 우주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어느 정도 동의를 했지요.
그러므로 아무리 쌍방의 의무와 권리에 관한 약속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평등한 약속은 아닙니다. 그 예가 바로 야훼와 아브라함 사이의 커버넌트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정일치 시기의 부족장으로서 매우 신실한 사람이었지요. 그렇기에 성심을 다해 야훼에게 제물을 바칩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즉 약속 이행에 있어 어떤 잘못도 없었던 그에게 어느 날 야훼는 아브라함이 가장 아끼는 존재인, 유일한 자식이자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결국 이에 따르기로 하지요. 바로 이 지점에서 신과 인간 사이의 약속이 결코 평등한 게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기존의 해석대로 단지 카인이 ‘비열해서’ 몸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면, 카인이 신과 ‘대등한 입장’에서 새로운 커버넌트를 맺을 수 있었다는 말처럼 들릴 여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카인의 표지’를 두려워한 까닭은 그가 단지 친족살해를 한 죄인이어서가 아니라(《성경》을 보면, 근친상간 등 이보다 더한 짓을 한 죄인도 많습니다), 그 표지가 그가 신과 어떤 ‘대등한’ 계약을 맺은 존재라는 것을 표상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인 걸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 데미안이 하는 이야기를 계속 살펴보도록 할까요?
데미안이 제기한 위와 같은 의문에 흥미를 느낀 싱클레어는 “그럼 그 이야기를 달리 어떻게 설명하는 좋겠니?” 하고 물어봅니다. 그리고 이에 데미안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이어가지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맨 처음 문제가 일어나는 지점은 바로 그 이마에 붙어 있는 표지야. 알겠니? 실제로 남을 불안하게 하는 이마를 가진 인간이 있었던 거야. 사람들은 그와 감히 접촉하려고 하지를 않았지. 그는 그의 자손들과 함께 세상 사람들에게 겸허한 생각을 일으키게 했어. 그렇지만, 아니 확실히 그 이마에는 우편물에 찍히듯이 그런 소인(消印) 같은 건 있지 않았을 거야. 세상에는 그런 뚜렷한 징후 같은 건 쉽게 드러나지 않아. 오히려 확실히 나타나지 않는 어떤 불미스러운 것, 즉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많은 재기와 담력이 시선 속에 나타났을 거야. 그 사내는 힘을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그렇게 그는 표지를 지니게 된 거야. 사람들은 그 표지를 마음대로 설명하고 있어. 대체로 사람이라는 것은 항상 자기에게 적당하게 그리고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정당하게 해주는 것을 원하고 있어.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자기본위적인 경향성이 통하지 않는) 카인의 후예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표지를 가지고 있다고 단언을 하게 된 것이지. 이러한 이유로 표지는 그것이 표상하는 본래의 의미로는 설명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설명되었어. 하지만 실지로 그들은 불미스러웠을 거야. 담대성과 어떤 특성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여하튼 (사람들이 보기에) 기미가 아주 좋은 것은 아니야.
위에 인용한 데미안의 말에서 제가 볼드체로 처리한 부분은 두 군데입니다.
먼저, 맨 윗줄에서부터 첫 번째 처리 부분의 내용을 읽을 때마다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습은 바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입니다. ‘다비드’는 《구약》의 ‘다윗’이지요. ‘다윗과 골리앗’의 그 소년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성지를 최초로 만든 인물이자, 이스라엘 왕국의 두 번째 왕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석상을 자세히 보면,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가 그 표정입니다. 흔히 완벽한 몸매를 가진 남자를 두고 다비드 같은 몸을 가졌다고 하는데, 실제로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가서 보면, 아직은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소년의 몸을 가진 청년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그 조각 같은 몸보다는 얼굴이 더 인상적인데, 그 이유는 그 눈 때문입니다.
대리석 상에 눈빛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지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석상을 실제로 보면 눈빛이 느껴집니다. 거인 골리앗을 향해 강한 의지와 용기가 느껴지는 핏줄들이 곤두선 한 손에는 돌을 들고(우연이겠지만. 카인의 경우와 비슷하네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골리앗을 노려보는 그 눈을 보면 정말 눈빛이 살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다비드상>을 이야기할 때 그 눈빛보다는 그 황금비율의 몸만을 주로 이야기하지요. 위에 인용한 데미안의 말대로, 확실히 어떤 비범한 징후 같은 건 사람들 눈에 바로 보이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볼드체 처리 부분은 한 에크리튀르가 헤게모니를 잡고 교조화되어 가는 과정의 기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흔히 이런 말이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설득보다는 공감’을 원한다는 말이 있지요. 공감은 분명 매우 중요하지만, 설득 역시 매우 중요하지요. 즉, 이 양자 사이의 중용이 관계에서는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으로 효과가 있는 건 ‘설득’보다는 ‘공감’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에게 공감을 해주면서, 적당히 정당하게 대우해 주면 그것에 편안함을 느끼고 만족하는 경향이 있지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정당함’이란 ‘설득’의 대상이지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생각보다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야훼는 왜 카인에게 표지를 주어 그가 저지를 끔찍한 살인의 죄에 sanction을 주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해 온 이유 중 하나 같습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의문을 능동적으로 제기하는 것보다는 어떤 권위가 말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에 더 큰 보상이나 만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적당한 타협의 기저에는 제대로 알고자 하는 욕구에 대한 무관심이 놓여 있지요.
신이 카인에게 저와 같은 sanction을 준 까닭을 알고자 하는 것은 분명 ‘설득’의 문제입니다. 이는 곧 ‘앎’의 문제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전통적인 에크리튀르는 이 문제를 ‘믿음’의 문제로 대체해 버렸고, 이후 이는 절대적인 권위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이 믿음에 의문을 달면 안 되는 것이 되어버렸지요. 마치 신성모독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우선 그러한 에크리튀르의 힘을 독점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게 그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일 겁니다. 한편, 그 외 사람들은 그저 ‘그렇게 믿는 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무관심한 것’이지요. 알고자 하는 건 자율적이고 의지적인 행위입니다.
한편, 그렇다면 데미안은 카인이 전혀 악한 사람이 아닌데, 그저 인지상정(人之常情)의 수준에서 상해치사 정도로 자신의 동생을 우발적으로 죽이게 되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싱클레어가 되묻자 데미안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겠지. 무엇보다 아주 옛날 옛적의 이야기는 대개가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정확하게 기록되고 설명된다고 말할 수는 없어. 즉, 내가 생각하기에, 카인이라는 인간이 대단한 놈이었던 것은 확실해,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 그에게 붙여 놓은 거야. 이 이야기는 단순한 소문으로 사람들이 함부로 지껄인 것에 불과해. 그러나 카인과 그의 후예들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점에서는 정말인 거야.”
이 말에 놀린 싱클레어는 “그런 너는 카인이 사실은 살인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라고 되묻지요. 이에 대한 데미안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그건 사실이야.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때려죽인 거야. 하지만 정말 그의 친형제였는지는 의심스러워. 아무튼 그건 역시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야. 결국 인간은 모두 형제이니까. 그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때려죽인 것이고, 그것이 모름지기 영웅적인 행위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여하 튼 지 간에 약한 사람들은 전전긍긍하며 불안에 떨고 호소했겠지. 그래서 그들에게 왜 그때 그를 깨끗하게 죽여 버리지 않았는가 하고 물으면, 자신들이 겁쟁이라는 건 결코 인정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겠지.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놈에게는 신도 표적을 붙여 주셨으니까!’라고 말이야! 그리고 이런 식으로 허위 증언이 작위 된 거야!”
위의 두 인용구 각각에 한 부분씩 제가 볼드 처리한 부분이 보이실 겁니다.
우선 첫 번째 인용문의 저 부분을 볼드체로 표시한 이유는 에크리튀르라는 건, 즉 서사라는 건 본질적으로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난 나의 부고(訃告)가 되었다.” 그리고 밀란 쿤데라는 ‘무상(無常)의 완화적 상황’이라는 주제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썼지요. 시간 속에서 기록된 것, 즉 서사는 반드시 어떤 작위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얼마나 능동적으로 읽어내느냐 인 것이지요.
두 번째 인용문의 볼드체는 다음과 같이 설명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이 말인 즉, 일이 벌어지고 난 후 헤게모니를 잡은 자들이 만들어낸 서사라는 뜻입니다. 이런 경우 이 서사의 논리를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는 프레임이 있지요. 바로 이분법적 프레임입니다. ‘동료 vs 적/약자 vs 강자/선 vs 악’ 등등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보기에 데미안이 들려주는 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가장 촌철살인(寸鐵殺人)적인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들에게 왜 그때 그를 깨끗하게 죽여 버리지 않았는가 하고 물으면, 자신들이 겁쟁이라는 건 결코 인정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겠지.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놈에게는 신도 표지를 붙여 주셨으니까!’라고 말이야! 그리고 이런 식으로 허위 증언이 작위 된 거야!”
이 부분에는 카인에 관한 데미안의 사고실험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인간의 나약함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위선의 모습이 매우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신이 두려워서 그 권위에 의문을 제기할 엄두조차 못 내면서도 자신의 나약함을 변명하기 위해서는 언제든 신을 그 변명의 도구로 내세울 수 있다는 게 정말 와닿습니다. 그리고 이게 매우 진실하게 와닿는다는 게 참 씁쓸합니다.
아무튼 이번 회 차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데미안』에 대한 리뷰는 다음 주에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