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데미안』리뷰 다섯 번째

the last

by Juncus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대한 시론적 리뷰 시리즈 중 다섯 번째 글 이제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대로 이 시리즈는 이번 회 차를 마지막으로 끝내도록 할게요.


지난주에는 『데미안』에서 나오는 글귀를 직접 인용하며, 그것을 분석해 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었지요. 그 까닭은 바로 그 회 차의 주제가 ‘소설 『데미안』 속에 나오는 ’ 카인과 아벨‘에 관한 데미안의 사고실험’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지지난주, 그러니까 이 시리즈의 세 번째 글은 『구약』 속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를 분석해 보면서, ‘왜 야훼는 카인에게 표지를 주어 그가 저지른 끔찍한 살인의 죄에 sanction을 주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었습니다.


그럼, 이번 회 차에서는 이 세 번째 글에서 얻게 된 의문과 네 번째 글에서 분석한 ‘카인과 아벨’에 관한 데미안의 사고실험을 종합해서 뭔가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방향으로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강조하지만, 이 글은 ‘시론(試論)’, 즉 시험적인 논의이므로 이 결론 역시 하나의 시험적인 의견일 뿐이라는 걸 감안해 주시길 바랍니다.


먼저, ‘왜 야훼는 카인에게 표지를 주어 그가 저지른 끔찍한 살인의 죄에 sanction을 주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한 생각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시 닿게 되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난 세 번째 리뷰 때 잠시 언급을 했던 대로, ‘왜 신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을 금지시켰는가?’라는 의문입니다.


에덴에 선악과가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됩니다. 왜냐하면 에덴은 ‘결핍이 없는 곳’이니까요. ‘결핍이 없다’는 말의 뜻은 ‘좋고 옳은 것’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것이 다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에덴에 사탄을 상징하는 뱀 역시 있을 수 있던 것이겠지요. 그럼 이 지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선과 악, 옳고 그름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학적 지평 내에 들어왔을 때 문제가 된다는 뜻 아닐까요? 예를 들어, ‘자연’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보며 경이로워하고 행복해합니다. 지구상에 이런 것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지요. 이 경우 자연은 분명 ‘선’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재해가 될 때 그것은 ‘악’이 됩니다. 특히 그것이 인간의 인위적인 행위에 의한 결과이면 더욱 그렇지요. 즉, 선과 악이라는 건 일단은 하나의 가능태로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실존적인 배경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능태가 현실태가 되는 것에는 무엇이 작용할까요? 이에는 여러 가지 있겠지요. 하지만 소설 『데미안』에 관한 이 시론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인간의 의지입니다.

이에 대한 알레고리들은 많습니다. 당장 생각나는 것으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가 있네요. 사람들이 가진 성향 중 하나는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충동이지요. 좋게 말하면 호기심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는 무책임한 행동일 수도 있고, 모험심일 수도 있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요(要)는 판도라가 호기심이든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그 상자를 열었고, 그로 인해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온갖 불행과 악이 퍼지기 시작했지요. 마치 아담이 선악과의 맛을 봄으로써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 따 만든 최초의 인간이므로) 결핍이 없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에서 ‘결핍이 있는 현존, 즉 실존적 존재’로 전락한 것처럼 말이지요. 이러한 전락은 그가 에덴에서 쫓겨나는 것을 통해 상징됩니다.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중 에덴에서의 추방, 시스티나 성당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중 에덴에서의 추방(정중앙), 이브의 탄생(가운데 맨 하단), 시스티나 성당 천장벽화


그런데 ‘호기심’이 과연 나쁜 것일까요? 호기심, 즉 뭔가를 알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면, 인간은 문명이라는 것을 이룰 수 없었을 겁니다. 문명이 없었다면, 《성경》과 같은 의미심장한 서사도 절대 존재할 수 없을 것이고요. 문제는 이 ‘호기심’ 자체가 아니라, 이 알고자 하는 욕구를 어떻게 인식하고 사용하는지와 관련된 인간의 의지, 흔히 말하는 ‘자유의지’ 일 겁니다.


칸트의 윤리철학에서 자율성, 즉 오토노미 autonomy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게 중요할 수 있는 조건은 그것이 보편 법칙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편 법칙에 부합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그 보편 법칙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것’이지요.


다시 선악과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인간이 과연 ‘선과 악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담이 호기심에 그것을 먹는 순간, 그는 선과 악이라는 구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대한 메타포로서 당시 발가벗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던 그와 하와가 이 과실의 맛을 본 이후,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하고, 자신들의 음부를 가리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오지요. 그리고 이제 문제는 선과 악의 구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인간이 과연 그것을 제대로 구분할 능력과 의지가 있느냐로 확장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에게 잘 해주면 선한 것, 그렇지 않으면 악한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도 나한테는 잘 해." 라는 식으로 범죄자라도 옹호하는 경우도 많지요. 인간의 이런 자기본위적인 성향 때문에 사람들은 친절함을 잘 가장하면, 생각보다 쉽게 속아넘어갑니다. 이게 바로 세상에 늘 사기꾼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까닭 중 하나일 겁니다.


또한 설사 제대로 알고 구분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자유의지를 선한 것을 향해 두지 않고 악한 것을 향해 둘 수도 있지요.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자기본위적이니까요. 칸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알프스 이쪽과 저쪽의 법은 다르다.’ 또한 예를 들어, 살인은 기본적으로 매우 나쁜 짓이지만, 전쟁 시에는 내 편이 아닌 적을 죽이는 행위는 오히려 칭송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내 편을 지킨 것이 되니까요. 이런 식으로 인간은 매우 자기본위적입니다. 이는 생존과 관련된 본능이지요. 또한 생존이라는 것은 시간의 개념, 즉 실존적인 것이고요.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전통적인 기독교에서는 선악과를 따 먹는 행위 자체를 원죄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칼뱅과 같이 극단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은 이를 ‘total depravity’ 즉, 이처럼 자기본위적인 인간의 본성은 애초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부터 완전히 타락하여 개선의 여지가 없이 악한 것이기에 오직 신의 구원 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다고까지 말했었지요. 즉, 아무리 노력해 봤자 소용없고, 그저 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의외로 상당한 도그마를 가지고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했었습니다. 두려움만큼 사람을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문제를 사람들이 해결해 온(그리고 현재의 우리도 역시 그러한) 방식을 한번 곰곰이 반추해 보면, 뚜렷한 하나의 양태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그 반대로 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민족주의가 너무 심하면 세계시민주의, 가부장적 문화가 고질화 되면 그 반동으로서 페미니즘 등등. 칼뱅주의 역시 로마 가톨릭이라는 교조화된 에크리튀르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것이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런 반성적 태도들 역시 교조화되고, 그들만의 에크리튀르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 되는 방식으로 변질됩니다. 말하자면, ‘자유의지’가 니체식 표현대로 ‘권력에의 의지’로 되어가는 것이지요.


‘권력에의 의지’와 ‘자유의지’ 중 무엇이 좀 더 집단적일까요? 물론 그것은 ‘권력에의 의지’ 일 겁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권력이란 집단을 이루지 않으면 좀체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있으면 그것을 도그마화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인간 개개인의 ‘자유의지’는 매우 불온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지요. 구체적인 예로, 전체주의 국가에는 반드시 있는 ‘정치범 수용소’ 같은 것을 떠올려 보면 되실 것 같습니다.


‘카인의 낙인’에 관한 데미안의 해석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강력한 믿음을 공유하는 어떤 폐쇄적인 집단이 있고, 그것에 의문을 달고, 설명과 설득을 요구하며 잘 따르지 않는 자율성을 가진 자가 있다고 쳐봅시다. 이 경우 이 집단에게 있어 이러한 자는 분명 ‘불온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자유의지가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고, 거인 골리앗을 노려보는 두려움 없는 다윗처럼 그들의 권력에의 의지를 위협할 때, 이 사람은 반드시 낙인을 찍어서라도 집단에서 배척을 시켜야 하는 존재가 되지요. 하지만 이 배척의 낙인은 동시에 그가 매우 두려운 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울 정도로 불온한 자가 아니라면 그런 배척의 낙인을 굳이 이마 위에 찍지 않을 터이니까요.


저번 시간에 데미안이 한 이 말, “아주 옛날 옛적의 이야기는 대개가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정확하게 기록되고 설명된다고 말할 수는 없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서사의 본질적 특징에 대해 말씀드렸었습니다. 즉, 서사란 ‘이후의 기록’이지요. 이 말인 즉, 어떤 필요에 따라 편의적으로 적당히 꾸며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예를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공자’는 생전에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춘추시대 내내 전국을 유세하며 여러 왕들을 찾아갔지만, 별로 발탁이 되지 못했지요. 하지만 공자의 사상이 ‘유학’이라는 형태로 정식으로 인정받고 이후 동북아에서 매우 오랜 시간 동안 가장 강력한 정치·문화적 헤게모니를 독점한 에크리튀르가 되기 시작한 것은 이후 수백 년이 지난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부터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기 이후의 정치 논리에 가장 잘 부합하는 명분을 제시해 주는 사상이었으니까요. 즉, 그들의 권력에의 의지를 합리화하는 데 매우 유용했다는 뜻입니다.


데미안이 ‘카인과 아벨’의 서사에 대해 문제를 삼고 있는 부분도 바로 이 점이지요. ‘과연 그것이 온전히 그대로 기록된 사실일까? 오히려 어떤 집단의 편의를 위해 부분적으로라도 편향적으로 작위 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이건 분명히 인간이 구전으로 듣고 기록한 이야기이다. 최초의 인간의 아들들이 살던 시기에 문자가 있었을 리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이것을 완전한 사실로 믿고 있는 것일까? 그래야만 하니까 그러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왜 그래야만 하는가?’


이런 식의 의문들이 데미안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데미안과 같은 소년은 매우 ‘자율적인 성향과 의지를 타고난 인물’이니까요.


이제 ‘왜 야훼는 카인에게 표지를 주어 그가 저지른 끔찍한 살인의 죄에 sanction을 주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리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데미안이 저런 천성을 가진 인물이라면, 그는 분명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 자신을 아벨에 투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벨은 신의 의지에 대해 어떤 의문도 좀체 품지 않는 매우 신실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데미안은 이 아벨을 시시하고 재미없는 수동적인 인간으로 여겼을까요? 제가 보기에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데미안이 해석하고 있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그가 ‘겁쟁이들’이라고 표현하며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아벨이 아니라, 이후에 이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들인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벨은 뭐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막내 ‘알로샤’나, 같은 작가의 또 다른 소설인 『백치』의 주인공인 ‘미쉬낀’과 같은 인물처럼 여겨집니다. 이는 물론 제 감상입니다. 아무튼 두 인물 모두 매우 투명한 유리알 같은 영혼을 가진 존재들이지요. 그들은 의심을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의심을 할 게 없어서 안 하는 것뿐이지요. 어쩌면 칸트가 말한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법칙에 부합하게 하라.’라는 정언을 그냥 타고난 성향으로서 가지고 있는 인물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카인은 이렇게 완성된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분명 불완전하지요. 하지만 분명 완전해질 수 있는 어떤 능력은 가지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율성에 대한 강한 의지’이지요. 그런 면에서는 분명 아벨과는 다른 맥락에서 비범한 존재입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둘째 이반 카라마조프가 막내 알로샤와는 다른 맥락에서 비범한 존재이듯이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카인과 아벨’에서 야훼가 왜 아벨에게 표지를 주어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해 sanction을 주었는지가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좀 비루하긴 하지만 그래도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아벨은 에덴에서 추방되기 이전의 아담을, 그리고 카인은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추방되는 아담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담의 에덴 추방도 일종의 sanction이지요. 야훼가 추방이라는 벌을 줌과 동시에 그것을 ‘원죄’라는 형태로 그 처벌을 유예해 주고, 다시 회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 주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가능성은 바로 온전히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이 되게 됩니다. 이미 선과 악의 구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이상, 이제 그것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본위적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보편 법칙에 부합하도록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과 이를 부단히 반성하고자 하는 의지 말입니다.


『데미안』에서 데미안은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합니다.


“우리는 전체의 세계를 받들어야만 할 것이다. 악마까지도 겸한 신을 갖고 또 신에 봉사하는 동시에 악마에게도 봉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숭배하고 신성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전 세계를 인공적으로 구분하고, 이에 따라 ‘공인’된 절반만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신에게 봉사하는 동시에 악마에게도 봉사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옳은 것이라고 생각해.”

‘인공적으로 공인’된 절반이 신이라면, 그 반대 절반은 악마이겠지요. 이런 이분법은 인간이 보이는 전형적인 자기본위적인 도그마입니다. 이 도그마 속에서는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지요. 그것에는 자유의지처럼 작위된 집단의 의지만 있을 뿐입니다.


카인의 표지를 가진 자들은 근본적으로 반항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수동적이지 않지요. 하지만 그들의 이 자율성이 궁극적으로 보편 법칙에 부합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들의 이마에 찍힌 죄인의 낙인은 매우 특별한 용기의 표지가 됩니다. 그리고 데미안과 싱클레어. 이 서로 닮은 두 청년이 바로 그런 인물들이 아닐까요? ‘카인’이라는, 두 세계 사이에서 번민하는 불안하고 불안전한 존재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기존의 질서에 수동적으로 가리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세계 속에 투영하고, 반성하며, 점차 완성해 나아가고자 하는 그 의지를 떠올려 보세요. 바로 이 점이 언제고 다시 데미안을 떠올리고, 몇 번이고 또다시 이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인 것 같습니다.


이것으로, 지난 5주 동안 이어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대한 리뷰 시리즈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다시 철학서를 리뷰해 볼까 생각 중이지만, 그전에 에드가 앨런 포우의 작품들처럼 매우 짤막한 단편 하나를 1회분 분량으로 소소히 리뷰해 볼까도 고려 중입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뵙도록 할게요.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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