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적 사항들
예비적 사항들
이번에 리뷰해 드릴 (책이라기보다는) 작품은 에드거 앨런 포 <The Raven>입니다. 흔히 한국에서는 <갈까마귀>로 잘못 번역되어 나와 있지요. 하지만 이 작품 내에서 묘사되고 있는 까마귀의 종류는 갈까마귀가 아니라 큰까마귀입니다. 갈까마귀는 하얀 목도리를 두른 것 같은 털도 나 있고 작고 귀엽습니다. 전혀 이 작품의 분위기와 맞지 않지요. 이에 반해 큰까마귀는 고색창연한 느낌이 나는 청록빛이 감도는 매우 새까만 털을 가진 커다란 새입니다. 그리고 이름 그대로 매우 큽니다. 예전에 이와 비슷한 까마귀를 여행 중 새벽녘에 본 적이 있는데, 박명(薄明), 즉 지평선 밑에 잠들어 있던 동이 희미하게 트기 시작하는 푸르스름한 배경 속에서 너무 크고 까만 그 새를 본 순간, 반사적으로 소름이 끼쳤던 기억이 납니다.
‘큰까마귀’의 영어명은 원래 ‘common raven’입니다. 그런데 왜 포는 이 이름에서 ‘common’이라는 단어를 굳이 생략을 했을까요? 그가 큰까마귀의 이름을 정확히 잘 모르고 있어서 그랬을까요? 물론 그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제가 보기에는 의도적인 것입니다. 그래야 ‘큰까마귀’라는 객관적 상관물로써 전달되는 작품의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니까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큰까마귀가 있지만, 이 작품 속 시적 화자, 말하자면 주인공에게 의미가 있는 큰까마귀는 바로 자정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방으로 날아 들어온 바로 그 큰까마귀입니다. 그러므로 ‘common’, 즉 ‘흔한, 공통의’라는 말은 빠져야 이 의미가 압축적으로 전달이 되지요. 그리고 여기에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정확히 한정하는 정관사 ‘the’, 즉 ‘바로 그’라는 말을 붙임으로써 이 의미는 더욱 강조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작품의 제목이 <The Raven>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에드거 앨런 포는 매우 불운한 천재로 알려져 있지요. 그의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비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아였고, 양부모는 부유했지만, 그들과의 사이는 매우 좋지 못했지요. 그래서 결국은 버림받았고, 평생을 가난과 연속되는 실패와 고독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다가 이른 나이에 죽었습니다. 타고난 반항적인 기질과 병적인 예민함은 그의 인생 전반에 드리워진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그림자 같은 것이었지요. 또한 매우 명석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지나치게 예민한 감성과 지성을 가진 인물의 전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물들 중 비참하게 살다 죽은 작가를 한 번 꼽아 본다면, 독일에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있다면, 미국에는 바로 ‘에드거 앨런 포’가 있다고도 할 수 있지요.
이런 천재들의 삶을 보면 뭔가 ‘천형(天刑)’즉, 하늘의 벌을 운명으로 타고난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작품은 늘 매우 음울합니다. 하지만 그 음울함은 결코 ‘자기 연민’적인 것이 아닙니다. 즉, 기만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것은 인간 공통의 매우 실존적인 기저에 깔린 공포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매우 ‘진실’ 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마치 그들은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그런 게 있는지조차도 평생 자각하지 못하고 사는) 절대 열어봐서는 안 되는 던전(dungeon), 즉 지하 감옥 같은 것을 강박적으로 훔쳐보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즉, 전혀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럴 수밖에 없는 지옥에 빠진 강박증 환자들처럼 말이에요.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강박적으로 제 살을 파먹듯이, 천착했던 그 ‘공포’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론 ‘죽음’입니다. ‘죽음’만큼 실존적인 것은 없지요. 물론 인간만 죽는 것은 아닙니다. 동물도 죽고, 식물도 죽고, 심지어는 그냥 물건들도 다 사용 가능한 기한이라는 게 있습니다. 하지만 동물이나, 식물이나, 물건들에게 ‘실존’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요.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죽음’이나 ‘유한한 시간’ 등을 ‘의식’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의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뿐이지요.
에드거 앨런 포 같은 인물은 이 의식이 매우 예민하게 각성된 사람입니다. 이는 아마도 타고난 능력일 겁니다. 결과적으로 매우 불운한 능력이기는 하지만요.^^; 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매 순간순간마다 자신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깨어 있을 때도 그리고 심지어 잠들어 있을 때도 자각하고 있는 상태를 상상해 보세요. 제가 보기에 에드거 앨런 포는 이런 예민함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각은 틀린 것은 아니지요. 단지, 자각하지 않는 편이 사는 데 더 나은 것, 더 유리한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인간은 매 순간 사는 시간만큼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망각’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중 하나인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이 천형과도 같이 고통스러운 재능은 우리에게 어떤 ‘즐거움’을 줍니다. 정말 아이러니하지요. 사람들 사는 건 정말 아이러니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즐거움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유일한 진실, 즉 ‘죽음’이라는 것을 좀 더 로맨틱하게 바라봄으로써 그 공포의 적나라함을 감추고, 거리를 두는 것, 그래서 언젠가는 맞닥뜨릴 그 두려움을 고상하게 유예시키는 것, 그것 아닐까요? 제가 보기에는 이건 분명 기만적이지만, 동시에 예술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에드거 앨런 포는 이런 의미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예술가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긴 게 없지요. 이 말은 곧, ‘플롯’은 그의 작품을 읽는데 중요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인간 본연의 가장 원시적인 감정, 즉 ‘공포’가 매우 이지적으로 세심하게 구상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인과적 플롯을 따른 수평적인 방식보다는, 이 감정이 매우 농축되기에 이르는 어느 절정의 순간을 향해 수직적으로 쌓아 올려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지요.
에드가 앨런 포 Edgar Allan Poe
그럼, 그의 작품들 중에서 이런 방식이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된 건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바로 이번에 리뷰해 드리려고 하는 <The Raven> 즉, (오역이기는 하지만 이미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갈까마귀>입니다.
여담이지만, 원래 예정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대한 리뷰를 시작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기존에 해드렸던 것들보다 좀 더 긴 기간 동안 이루어질 것 같기에, 그전에 짤막하게 포우 단편이나 하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뭘 할까 하고 생각을 해보다가, 갑자기 <갈까마귀>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이제부터는 그냥 <더 레이븐>이라고 표기하겠습니다).
<더 레이븐>은 소설이 아니라 ‘시’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narrative poem’인데, 이게 직역을 하면 ‘서사가 있는 시’가 되지요. 하지만 이는 흔히 우리가 아는 ‘서사시 epic’와는 다른 장르입니다. 일단 ‘서사시 epic’는 매우 깁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같은 게 서사시입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주로 영웅적인 인물들의 일대기 같은 게 소재이자 주제입니다.
반면 ‘narrative poem’은 짧습니다. 일반적인 서정시보다 약간 더 긴 정도입니다. 또한 영웅의 일대기 같은 걸 노래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시의 기본 형식인 운율이 살아 있으면서도, 그 시 안에 일정한 서사적 흐름, 즉, 기-승-전-결 혹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있고, 시간의 흐름이 있고........ 이런 식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가 있는 시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하기로 결정한 후, 어떤 식으로 진행을 할까를 좀 고민해 봤습니다. 일단 길지 않은 시이므로 내용을 요약하는 게 별 의미가 없지요. 또한 이 작품을 이미 읽어본 분들도 계시겠지만, 읽어보지 못하신 분들이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작품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면서 진행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이후 고민한 문제는, 이미 번역된 것들 중 적당한 것을 찾아 그대로 인용을 할까, 아니면 원문을 그대로 옮긴 후, 직접 번역을 해가면서 설명을 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시중에 번역된 <더 레이븐> 판본들을 보면, 이 시가 의도하고 있는 감흥이 잘 일어나는 것을 찾아보기가 꽤 힘듭니다. 시 번역이 매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겠지요. 사실, 시를 번역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원문과의 대조를 통해 보면 좀 더 생생하게 와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원문을 일단 그대로 옮기면서, 최대한 직역에 가깝게 번역을 하는 식으로 진행해 보자는 것입니다. 영어에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아마 더 생생하게 이 리뷰를 즐기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또한 영어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이라도, 최대한 원문의 느낌을 즐기실 수 있도록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리 알려드릴 것은, 이 리뷰는 이 시에 대한 저의 해석이기에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무수히 많은 해석 중 하나일 뿐이니, 가볍게 읽어주세요.
시를 잘 읽어내기 위해서는 시적 화자의 심리나 정서를 내 감정처럼 느낄 수 있는 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시적 화자가 그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환경을 나름의 방식으로 잘 이해하거나 상상할 수 있어야 해요. 저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합니다. 이 시의 화자인 어떤 남자, 사랑하는 연인을 죽음이라는 형태로 영원히 잃어버린 어떤 매우 예민한 남자가 밤늦도록 잠을 못 이룬 채 번민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면서 자각몽 lucid dream을 꾸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그 꿈에 완전히 먹혀 버렸다고 말입니다.
누구나 살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악몽이라는 것을 꾸지요. 악몽 자체가 공포스러운 체험이기는 하지만, 그런 악몽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내가 악몽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그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속 그것을 꾸고 있어야 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체험은 흔한 게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체험이고,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지요. 흔히 우리가 잠을 잘 때는 전액골 피질 prefrontal cortex은 비활성화됩니다. 뇌에서 이 부위는 무의식이 아닌 의식의 영역에 수반되는 활동들, 예를 들어 자기반성, 자기통제, 사실 점검, 오류 확인, 의사결정 등의 행위들을 관장하는 부위로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잠이 들어 있을 때는 보통 형광등의 스위치가 꺼지듯이 이 부위의 활동 역시 비활성 상태에 들어간다고 해요. 이 말은 경험상 맞지요. 우리가 자면서 의사결정 같은 건 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잠을 자면서 꾸는 꿈 역시 이 전두엽 앞부분에 위치한 전액골 피질 부위가 비활성화되었을 때 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꿈속의 내용을 통제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지요.
하지만 자각몽을 꿔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 꿈을 꾸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되는 까닭은, 잠이 드는 것과 동시에 원래는 꺼져야 할 전액골 피질의 스위치가 꺼지기 않고 계속 켜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 악몽을 꾼다고 한 번 상상을 해보세요. 그리고 그 악몽이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통제가 도저히 불가능한데, 나는 그게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그 꿈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면........ 그 공포는 상당하겠지요. 그러다가 결국에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구분이 안 될 지경에까지 이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아마도 무의식과 의식이 모두 깨어서 무슨 도플갱어doppelgänger처럼 서로를 꼼짝없이 바라보는 상황과 비슷할 겁니다.
‘도플갱어’란, ‘나와 똑같이 생긴 또 다른 나’로서 만일 이 두 존재가 만나면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유명한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 바로 이 도플갱어를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서로 도플갱어로 태어난 프랑스의 베로니끄와 폴란드의 베로니카는 어느 날 우연히 폴란드 크라쿠프의 한 광장에서 서로 마주칩니다. 하지만 베로니끄는 또 다른 자신인 베로니카를 보지 못했어요. 반면 베로니카는 베로니끄를 봐버렸지요. 당연히 그녀는 매우 놀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이 갑자기 멈춰 죽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알 까닭이 없는 베로니끄는 이후 자신의 영혼 속에서 뭔가가 빠져나간 것 같은 이상한 공허감을 느끼게 되지요. 이게 이 작품이 시작되는 기본 틀입니다.
이 영화는 매우 서정적입니다. 그 주된 감정의 흐름은 결코 ‘공포’가 아니에요. 하지만 <더 레이븐> 다릅니다. 이 작품의 정서는 분명 ‘공포’이지만, 매우 차원이 높은 공포, 다시 말하면 일종의 ‘숭고미sublime’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숭고미란 도저히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얻게 되는 미적 감정을 의미합니다. 흔히 이를 두고, ‘약분 불가능함incommensurabili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이 말인 즉, 나와 내가 보고 있는 대상 사이에 공약수가 있다면, 그만큼 그 대상의 크기는 나를 기준으로 나뉠 수 있는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더 작게 의식될 수 있지요. 하지만 이런 공약수가 없이, 그 대상이 한정 없이 크다면, 나는 그 무게나 존재감에 완전히 압도당해 버립니다. 예를 들어, 허리케인이나 헤일 같은 통제 불능의 자연현상 같은 것을 볼 때 느끼는 공포감, 아니면 시쳇말로 ‘목성 증후군’ 같은 감정이 이와 비슷할 듯합니다.
실존적인 맥락에서 서블라임, 즉 숭고미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론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노력을 하면 지연은 시킬 수는 있어도, 절대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실존철학의 대가, 하이데거는 말했지요. 인간은 “죽음 앞에 선 단독자”라고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더 레이븐>은 무의식 속 깊이 잠들어 있던 이 통제 불가능한 죽음에 대한 공포(생존을 위해서는 이런 망각은 필수적인 것일 겁니다)가 매우 깊이 사랑했던 연인의 죽음으로 인해 의식의 표면 가까이까지 깨어나기 시작한, 어느 매우 예민하고 편집증적인 남자가, 그대로 의식이 각성된 채로 잠이 들어 자각몽을 꾸게 되고, 그 상태로 이 공포스러운 무의식을 대면하게 되는 상황을 묘사한 작품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는 ‘큰까마귀’라는 상징을 통해 표현이 되고 있지요. 왜 이런 객관적 상관물이 쓰였는지는 시를 잘 살펴보면 알게 됩니다.
그럼, 본격적인 시 번역과 해석은 다음 시간부터 시작을 하도록 할게요. 원래는 1회로 끝내려고 했던 글이 이번에도 2회나 3회까지도 이어질 것 같습니다. 일단 대충 구상만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다 보니, 이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글이 진행되다 보면 저절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고는 하니까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급한 것은 아니니, 천천히 즐기면서 써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천천히 가볍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전 다음 시간에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