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 <더 레이븐> 리뷰 시리즈(4)

7,8,9연 번역 및 해설

by Juncus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에드거 앨런 포의 <더 레이븐>의 ‘전개 단계’의 마지막 부분인 3개의 연, 즉 7.8.9연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할게요.


<전개3 – 7연>

Much I marvelled this ungainly fowl to hear discourse so plainly,

나는 이 볼품없는 새가 그렇게 분명하게 말을 알아듣는 것에 매우 놀랐는데,

Though its answer little meaning –little relevancy bore;

비록 그것이 한 대답은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 별로 적절치 않은 대답이었지만,


For we cannot help agreeing that no living human being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인간들 중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Ever yet was blessed with seeing bird above his chamber door-


그들의 방문 위에 새가 있는 것을 보게 되는 축복을 받은 적은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기에.

Bird or beast upon the sculptured bust above his chamber door,


그들의 방문 위에 조각된 흉상 위에 앉아 있는 새를, 짐승을 본 적은 없기에,

With such name as “Nevermore.”

“네버모어”라는 이름을 가진 새를, 짐승을 본 적은 없기에.



이번 7연에서 방점을 두고 묘사되고 있는 것은 이 이상한 새에 대한 시적화자의 감정입니다. 흔히 우리가 누군가를 대할 때 맨 처음 느끼게 되는, 그리고 본능적으로 가장 관심을 갖게 되는 감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친밀감 여부’ 일 것입니다. 이 시적화자도 그러합니다. 시를 가만히 읽어보면, 그는 ‘왜 이런 새가 내 방에 들어올 수가 있는 것이지?’와 같은 의문은 좀체 품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다루었던, 그 까마귀가 처음 등장하는 6연에서 그가 보이는 감정은 ‘흥미’이지요. 시적화자는 그 새를 보고 생각보다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그의 태도를 보면 그 새를 보며 그가 느끼는 감정은 놀라움보다는 흥미로움이 더 크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7연에서 그가 보이는 감정은 어떤 종류일까요? 여전히 ‘흥미’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까요? 아니면 갑자기 일변(一變)을 해서 경악이나 공포로 바뀌어버릴까요? 물론 이 시가 평범한 서정시였다면, 이런 식의 감정의 일변도 가능합니다. 즉, 그런 게 시를 전개하는 데 있어 전혀 구조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 시는 narrative poem입니다. 즉 이야기가 있는 시이기 때문에, 이런 식의 서사 전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서사는 보통 플롯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플롯은 기본적으로 인과적인 흐름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워하다가 갑자기 공포에 질려 발작을 하는 행위는 이 두 행위 사이에 어떤 사건이 개입되지 않은 이상, 인과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지요. 물론 이 시의 화자 역시 노이로제에 사로잡힌 극도로 예민한 사람인 것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감정이 조리 없이 널을 뛰는 미치광이는 아닙니다. 애초에 포가 인물의 성격을 그렇게 설정했다면, 이 시가 이렇게 서사적인 구조로 짜여 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7연에서 보이는 시적화자의 감정 역시 이런 식의 일변(一變)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6연에서 보이는 ‘흥미’라는 호감이 더욱 발전한 것, 즉 ‘친밀감’에 가깝습니다.

이는 그가 쓰고 있는 시어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알아듣는 듯한 까마귀의 반응에 놀랍니다. 그런데 이 ‘놀라움’이라는 게 부정적인 뉘앙스가 아니에요. ‘놀라움’이라는 감정에는 부정적인 것도 있고, 긍정적인 것도 있지요. 그리고 이 7연에서 “Nevermore”라는 까마귀에 대답에 그가 보이는 놀라움은 부정적인 것이 아닌 긍정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놀라움을 표현하는 단어로 ‘startle’과 같은 공포감이 가미된 놀라움이 아닌, ‘marvel’이라는 경탄에 가까운 표현을 쓰고 있거든요.


그리고 시적화자는 그가 왜 그 말귀를 알아듣고, ‘nevermore’라는 다소 불길한 대답을 하는 까마귀에게 공포감보다는 경탄을 느끼는지에 관한 까닭을 3행에서부터 이 연이 끝날 때까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For we cannot help agreeing that no living human being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인간들 중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Ever yet was blessed with seeing bird above his chamber door-


(그들의 방문 위에 새가 있는 것을 보게 되는 축복을 받은 적은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기에)

Bird or beast upon the sculptured bust above his chamber door,


(그들의 방문 위에 조각된 흉상 위에 앉아 있는 새를, 짐승을 본 적은 없기에)

With such name as “Nevermore.”

(“네버모어”라는 이름을 가진 새를, 짐승을 본 적은 없기에)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4행의 매우 기묘한 표현, “was blessed with”입니다. 즉, 직역하자면, “축복을 받았다.”라는 뜻이지요. 그는 흑단처럼 눈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새까만 이 새, 그의 표현에 따르면, 저승의 신인 하데스가 지배하는 밤의 영토로부터 날아온 이 불길한 새를 만난 것을 ‘축복받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소 앞뒤가 안 맞는 감정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는 그가 악마 신봉자이어서 그런 것일까요? 하지만 그는 리어노어를 언급할 때 항상 천사들도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들을 모욕하거나 평가절하하는 표현 따위는 일체 쓰고 있지 않지요. 이것을 볼 때 그는 악마 신봉자 같은 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저, 그는 매우 외로운 것입니다. 너무도 고독하고 외로운데, 칠흑 같이 어두운 12월의 황량한 밤을 홀로 새워야 하는 게 너무도 두려운 그는, 2연에서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Eagerly I wished the morrow”, 즉 “나는 간절히 내일이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라고 말이지요. 즉, 너무도 고독하고 외로워서, 창밖에서 사람들의 왁자한 생활 소음이라도 듣고 싶어서, 빨리 날이 새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것을 종합해서 볼 때, 그는 그저 이 새가 자신과 함께 있는 것, 그런데 왠지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은 게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게 기뻐서 이 불길한 새에 대해 느끼는 친밀감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극도로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남자가 이 새가 가지고 있는, 그 본연의 불길함을 완전히 놓쳐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저 너무 외로운 나머지, 그것을 어떻게든지 잠시라도 외면하고 싶어 하는 것뿐이지요. 이 역시 시 구절 속에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번 연의 2행, 즉,


Though its answer little meaning –little relevancy bore;

(비록 그것이 한 대답은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 별로 적절치 않은 대답이었지만)


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though’는 부사절을 이끄는 종속접속사로서, 옥스퍼드 사전 상의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대조되는 의미를 가진 내용을 언급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의 맥락에서 화자가 위의 이 표현을 쓰기 전에 언급된, 이와 대조되는 의미의 구절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를 명확히 지칭하기 위해서는 우선 though 이하 문장과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 문장이 무엇인지를 알아야겠지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저 문장에서 부정의 의미를 가진 ‘little(거의 없는)’을 빼기만 하면 됩니다. 즉, ‘its answer had some meaning, it bore some relevancy.’ 정도가 되겠지요. 즉, ‘그 새가 한 대답은 어떤 의미가 있었다. 상당히 의미심장한 관련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라는 정도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새가 한 그 의미심장한 대답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Nevermore”입니다. 바로 재고의 여지없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 그 어떤 희망도 그저 헛된 것일 뿐인 것, 인간의 자유의지의 재량권이 그저 오만한 치기(稚氣)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되고 마는 것, 즉 죽음이라는 숙명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name”이라는 시어를 통해 포가 풀어내고 있는 하나의 대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리어노어’라는 이름이 천사들에 의해 불린다는 표현(“a sainted maiden whom the angels name Lenore”)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리어노어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고 없지만(“nameless here”),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었을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이건 분명 ‘희망’이에요. 매우 인간적이고 인간만이 품을 수 있는 희망이지요.


반면, 이번 7연의 마지막 행의 구절,


With such name as “Nevermore.”

(“네버모어”라는 이름을 가진 새를, 짐승을 본 적은 없기에)


이 구절에서는 그 불길한 까마귀를 ‘Nevermore’라는 이름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시가 전개되는 내용을 보시면 아시게 되겠지만, 이 ‘이름’은 시적화자의 저 희망을 완전히 무용(無用)하고,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지요. ‘Lenore – Nevermore’, 이 같은 운(韻, rhyme)의 말들을 계속 가만히 읊조려 보세요. 점점 리어노어라는 이름이 네버모어처럼 들리는 것 같지 않나요? 그 방문 밖 어둠을 향해 시적화자가 “Lenore?”라고 불렀던 이름이 “Lenore!”라는 절망적인 외침으로 변한 메아리로 되돌아오고, 이제는 시체를 파먹는 새가 까악 거리는 불길한 음성으로 “Nevermore”라고 부르는 것이 귓전에서 생생하게 들려오지 않나요? 그리고 점차 이 세 개의 소리가 결국에는 마지막 그 하나의 것으로 수렴해갈 것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나요?




<전개3 –8연>

But the Raven, sitting lonely on that placid bust, spoke only

하지만 그 까마귀는 그 차분한 흉상 위에 홀로 앉은 채,

That one word, as if its soul in that one word he did outpour

오직 그 한마디만 말할 뿐이었다. 마치 그 말 한마디 안에 자신의 영혼을 쏟아붓는 것처럼,

Nothing farther then he uttered; not a feather then he fluttered-

그리고 그는 더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단 한 개의 깃털도 움직이지 않았다.

Till I scarcely more than muttered: “Other friends have flown before-

내가 간신히 이렇게 중얼거릴 때까지. “다른 친구들은 이미 다 날아가 버리고”

On the morrow he will leave me, as my Hopes have flown before.”

“내일이 오면, 그 역시 나를 떠나겠지. 내가 그동안 품었던 희망들이 모두 그러했던 것처럼.”

Then the bird said “Nevermore.”

그러자 그 새는 말했다. “아니 결코”라고.



8연에서 묘사되고 있는 까마귀의 모습은 마치 그것이 앉아 있는 아테나 여신의 흉상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그대로 그 위에 화석처럼 굳어 버린 것처럼 보이지요. 그 까마귀가 지금까지 낸 소리는, 그가 6연의 끝부분에서 그것의 이름을 물었을 때 대답처럼 한 말, “Nevermore”라는 말 한마디였습니다. 그리고 마치 이 한 마디에 그것의 영혼을 모두 쏟아부어버린 것처럼(“its soul in that one word he did outpour”), 그래서 그것의 몸뚱이에서 영혼이 싹 빠져나가버린 것처럼, 그것은 그대로 그 석상 위에 화석처럼 굳은 모양새로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대로 있습니다. 털끝 하나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말이에요(“not a feather then he fluttered”). 마치 좀 전까지 있었던 일이 꿈이었던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분명 이것은 꿈이지요. 이것이 꿈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는 화자가 꾸고 있는 자각몽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지점에서도 시적화자는 이 까마귀의 이상한 양태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어요.’ 즉, 전혀 문제 삼고 있지 않고 있지요. 왜냐하면 꿈이니까요.


대신에 오히려 그는 까마귀가 이렇게 돌처럼 굳어버린 것과 같은 모습을 보고, ‘외로움’을 느낍니다. 마치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nothing farther then he uttered”) 그 새의 모습에 애가 달아서 끝내는 얼마 없는 기운마저 잃고, 간신히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지요.


“Other friends have flown before-

“다른 친구들은 이미 다 날아가 버리고”

On the morrow he will leave me, as my Hopes have flown before.”

“내일이 오면, 그 역시 나를 떠나겠지. 내가 그동안 품었던 희망들이 모두 그러했던 것처럼.”

이 부분은 시적화자가 자신이 느끼는 고독감과 삶의 무상함을 매우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는 구절이지요. 얼마나 외로우면 이 흉측하기 짝이 없는 볼품없는 새를 ‘친구’로 부르고 싶어 하는 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표현은 ‘시제’입니다. 영어에서 ‘시제’란 단순히 과거, 현재, 미래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지요. 비근한 예로 일본어 문법에는 상(相, Aspect, アスペクト, 아스펙토)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 개념의 의미는 간단히 말해 말하는 사람, 즉 화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하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문장의 양상(modality)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이 개념을 적용해서 위에 인용한 구절을 좀 더 세밀하게 풀어볼게요.


먼저, “other friends have flown before (다른 친구들은 이미 다 날아가 버리고)”라는 문장의 경우, 그냥 단순 시제로만 표현하면,


Other friends flew long ago(다른 친구들은 오래전에 날아갔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즉, 시적화자의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다 죽어버렸다는 뜻이겠지요. 이건 ‘사실’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 시적화자가 느끼는 어떤 감정, 예를 들어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이나 고독 등이 이 사실만을 적시한 문장에서는 느껴지지가 않지요. 이런 느낌들을 사실-진술 문장에 ‘입히는 게’, 곧 양상 표현, 즉 ‘아스펙토(アスペクト)’입니다. 그리고 지금 설명하고 있는 문장에서는 이것이 ‘현재완료’라는 형태로 표현되고 있지요. 완료형은 흔히 ‘시제’의 범주에 포함되어 설명되지만, 시제이면서도 동시에 양상표현입니다.


완료시제에는 크게 네 가지의 양상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완료, 계속, 경험,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중 지금 설명하고 있는 문장에서 쓰이고 있는 양상은 바로 ‘결과’입니다. 현재완료시제에서 ‘결과’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 현재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주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럼 이걸 적용해서 “other friends have flown before (다른 친구들은 이미 다 날아가 버리고)”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곰곰이 음미해 보세요. 이 시의 주제어라고 단언할 수 있는 “Nevermore”의 의미가 확 와닿지 않으신가요? 바로 이미 죽어서 그의 곁은 떠나버린 친구들은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자각과 이로부터 기인하는 극도의 상실감과 고독, 그것이 응축된 단어가 바로 “Nevermore”인 것이지요.


한편, 영어에서 이런 양상 표현은 단지 완료형으로만 구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will, should, might.......’등등의 조동사를 통한 경우가 더 빈번하지요. 이 시에서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방금 설명한 구절 바로 밑에 오는 말, “on the morrow he will leave me(내일이 되면, 저 새도 나를 떠나겠지)”라는 표현이지요.


이 구절에는 조동사 ‘will’이 쓰이고 있습니다. ‘on the morrow(내일이 되면)’이라는 미래를 나타내는 부사구를 볼 때, 이 조동사 ‘will’은 분명 미래 시제를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고 있지만, 동시에 그 양상적 뉘앙스는 ‘미래에 일어날 일이 반드시 그렇게 일어나도록 정해져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음의 용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


“This ball will go down to the bottom in accordance with Newton’s law of gravity.”


와 같은 문장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 문장의 의미는 “뉴턴의 중력 법칙에 따라 이 공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라는 의미이지요. 이때도 보통 반드시 ‘will’을 씁니다. 왜냐하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특별한 장치가 없는 이상, 잡고 있고 공을 놓아버리면, 앞으로 이 공은 반드시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즉, 이런 ‘돌이킬 수 없이 정해진 미래’의 양상을 표현할 때 ‘will’이라는 표현이 쓰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 역시 이 시의 주제어인 “Nevermore”를 상술하는, 즉, 죽음이라는 숙명은 반드시 인간에게 닥칠 수밖에 없고, 한번 일어난 죽음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극복 불가능함을 강조하는, 매우 강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as my Hopes have flown before(나의 희망들이 모두 이미 날아가 버린 것처럼).”이라는 마지막 구절을 보면, 이 시의 화자는 그의 경험, 즉 사랑하는 여인과 친했던 주변 친구들의 잇따른 죽음을 통해, 이를 이미 자각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문제는 단지 그것을 아직은 완전히 체념적으로 받아들일 수많은 없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 즉 보통 인간의 마음인 것인지요. 비록 표현은 저렇게 체념적인 양상으로 표현을 하고 있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Hopes’라는 단어입니다. 이걸 왜 주목해야 할까요? 바로 눈에 보이시지 않나요? 맞습니다. 포는 분명 이 단어를 대문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분명 시적화자는 이 혼잣말들을 힘없이 중얼거릴 때, 이 단어만큼은 강하게 악센트를 주면서 발음했을 겁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말이에요. 그것은 왜 그럴까요? 도대체 그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게 대체 무엇이기에 그러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제 차차 드러나게 됩니다. 전개의 마지막 부분인 다음 연, 즉 9연 이후에, ‘위기-절정’을 거치면서, 시적화자의 감정이 폭발을 하고, 이것이 완전한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 즉 대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끝이 날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됩니다.


아무튼 이번 연에서 까마귀는 화석화된 석상처럼 완전히 굳어 있지요. 즉, 생명을 전혀 느낄 없는 상태, 죽음의 모습으로 그렇게 굳어 있어요. 이를 보고 좌절한 그는 고독감에 완전히 기력을 잃고 지금까지 설명한 구절을 혼잣말처럼 겨우 겨우 중얼거리지요. 그게 바로 이번 연에서 장면화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 절묘한 찰나에, 그 화석처럼 굳어 있던 새가 다시 어떤 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이 소리는 이제 더 이상 바로 앞의 연에서 시적화자가 고집스럽게 단정한 ‘little meaning’, 즉 ‘무의미에 가까운’ 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힘없이 중얼거렸던 혼잣말 속에 담지 된 그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을 집약적으로 강조하는 말임과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완전히 그 반대로도 해석될 수 있는 말, 말하자면 이 시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 표현대로 ‘beguiling’한, 즉 위안적이지만 그 기저에는 철저한 기만이 깔려 있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가 ‘리어노어도, 내 친구들도 모두 죽어 내 곁을 완전히 떠나버렸는데, 저 새 역시 그러하겠지.’ 라며 완전히 힘을 잃은 채 중얼거릴 때, 그 새가 “Nevermore”, 즉 “아니, 두 번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야.”라고 말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으니까요.


모든 희망을 잃은 인간에게 있어 약점은 바로 그럼에도 그 희망을 절대 잃고 싶어 하지 않는 무용한 발버둥이지요. 이를 교묘히 이용하며,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저 새, 이 까마귀는 과연 악마일까요, 아니면 희망이 없음에도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일까요? 이 점 역시 이 시를 점차 곧 밝혀지게 됩니다.



<전개3 – 9연>


Startled at that stillness broken by reply so aptly spoken,

그 너무도 절묘한 대답에 적막이 깨지고, 이에 놀란 나는 말했다.

“Doubtless,” said I, “what it utters is its only stock and store,

“틀림없이, 저것은 오직 저 말밖에는 하지 못하는 것인 게야.”라고

Caught from some unhappy master whom unmerciful Disaster

어떤 불행한 주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거야.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불행이

Followed fast and followed faster till his songs one burden bore-

그의 뒤를 빠르게, 점점 더 빠르게 좇아, 결국 그가 부르는 노래들이 고통이 될 운명을 가진-

Till the dirges of his Hope that melancholy burden bore of ‘Never-evermore.’”

결국 그의 희망의 장송곡들이 “결코- 두 번 다시는”라고 불리는 구슬픈 괴로움을 품게 되는 주인의 말을.

But the Raven still beguiling all my sad soul into smiling,

하지만 여전히 그 까마귀는 슬픔으로 가득 찬 내 영혼을 기만하고 있었다.


이 속임수에 걸려든 나는 쾌활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Straight I wheeled a cushioned seat in front of bird and bust and door;

나는 곧장 쿠션이 달린 의자를 새와 흉상이 있는 문 앞으로 밀고 갔다.

Then, upon the velvet sinking, I betook myself to linking

그리고는 그 벨벳 위로 몸을 뉘인 채, 공상에 공상을 거듭했다.

Fancy unto fancy, thinking what this ominous bird of yore-

이 불길한 옛적의 새가,

What this grim, ungainly, ghastly, gaunt and ominous bird of yore

이 음울하고, 볼품없으며, 섬뜩하고, 수척한 불길한 옛 시절의 새가,

Meant in croaking “Nevermore.”

쉰 소리로 까악 대는 “네버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했다.

9연의 첫 문장은 “startled at that stillness broken by reply so aptly spoken(그 적막을 깨고 들린 그 너무나도 절묘한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입니다. 우선 시적화자 역시 제가 느꼈던 것처럼 8연의 마지막에 그 까마귀가 한 “Nevermore”라는 말에 담지된 의미들을 감지하고 깜짝 놀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움(being startled)’의 감정은 7연의 첫 행에서 묘사되고 있는 ‘놀라움(marveling)’과는 다릅니다. 맨 앞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놀라움’이라는 감정에도 다소 부정적인 것이 있고, 또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것이 있지요. 7연에서 묘사되고 있는 ‘놀라움(marveling)’은 ‘경이’, ‘경탄’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로서 긍정적인 뉘앙스를 담지한 표현이지요. ‘marvel’ 즉 ‘경탄하다’라는 말은 대개 자동사로 쓰이는 단어로, 수동태로는 쓰이지 않습니다. 이 말인 즉, 뭔가 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감정에 휘말리게 된다는 어떤 부정적이고 막연한 느낌이 없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이 9연에서 묘사되고 있는 ‘놀라움(being startled)’는 다릅니다. 일단 옥스퍼드 등의 영영사전을 참고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startle’이라는 단어 자체에 ‘공포감’이라는 뉘앙스가 기본적으로 수반이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보통은 수동태로 쓰이지요. 즉, 말 그대로 자기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떤 막연한 상황에 휘말려서 깜짝 놀라게 된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연에서 화자가 그런 상황에 놓여 있지요.


‘놀라움’이라는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의 감정을 표현하는 유의어, ‘marvel’과 ‘startle’을 사용을 통해, 이렇게 포는 점차 양상을 달리해가는 시적화자의 감정을 압축적으로 은밀하게 표현함과 동시에 시의 긴장을 점점 높이고 있습니다. 정말 언어를 세련되고 섬세하게 구사하는 재능을 타고난 인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이런 긴장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이 점차 팽팽해지는 텐션의 밀도와 평행해서 이 새에 대해 시적화자가 느끼는 친밀감 역시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게 어느 정도이냐면, 이번 9연에 이르러서 화자는 이 새를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이입한, 말 그대로 완전한 객관적 상관물로서 표현하고 있을 정도이니까요. 아니, 심지어는 자신의 분신(分身)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게 어느 부분이냐면, 바로 이 구절입니다.


“Doubtless,” said I, “what it utters is its only stock and store,

(“틀림없이, 저것은 오직 저 말밖에는 하지 못하는 것인 게야.”라고)

Caught from some unhappy master whom unmerciful Disaster

(어떤 불행한 주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거야.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불행이)

Followed fast and followed faster till his songs one burden bore-

(그의 뒤를 빠르게, 점점 더 빠르게 좇아, 결국 그가 부르는 노래들이 고통이 될 운명을 가진)

Till the dirges of his Hope that melancholy burden bore of ‘Never-evermore.’”

(결국 그의 희망의 장송곡들이 “결코- 두 번 다시는”이라고 불리는 구슬픈 괴로움을 품게 되는 주인의 말을)

두 번째 행에서 제가 밑줄 친 어구를 보면, ‘어떤 불행한 주인(“some unhappy master”)’라는 표현이 있지요. 여기서 주인은 누구일까요? 시적화자가 말하는 대로 이 새가 하데스가 지배하는 밤의 영토에서 왔다면, 저승의 신 하데스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저승의 왕으로 군림하는 자가 과연 ‘unhappy’할까요? 그리고 하데스는 유일무이한 저승의 신인데 정관사 ‘the’를 불이려면 불일 수 있을지언정, 부정(不定) 한정사인 ‘some’이 붙을 수도 없지요. 그렇다면 그 주인은 아마도 ‘어떤 사람(some person)’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시의 기호학적인 구도에서 보았을 때, 여기서 지칭할 수 있는 유의미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시적화자, 자신이지요. ‘어느 지독히도 불행한 남자(some severely unhappy man)’ 말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까마귀와 시적화자의 밀접한 관련성, 무의식의 저변에 가리어 있던 이 관련성이 이제 점차 의식의 경계에까지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다시 주의 깊게 돌아봐야 할 것은 바로 “Nevermore”의 의미이지요. 정확히 말해서는 시적화자가 이제 이 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 태도의 변화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분명, 6,7연에서 이 까마귀가 이 말을 처음으로 말할 때의 시적화자의 반응은 이를 별로 심각한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분명 의식적으로 그것이 ‘little meaning and little relevancy bore’ 하다고, 즉 별 의미 없고, 생뚱스러운 소리‘라고 가볍게 여겨버리려고 하지요.


하지만 이제 9연부터는 이런 시적화자의 태도가 판이하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말의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고, 곱씹기 시작하지요. 우선 지금 설명하고 이는 구절을 다시 한번 살펴볼까요? 이미 설명드렸다시피, 이 구절을 보면, 시적화자는 까마귀를 자신의 분신 비슷하게 여기고, 그것에 온전히 감정을 이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감정의 이입을 구체적으로 무엇을 통해 할까요? 바로 그 까마귀가 반복하는 말, 바로 “Nevermore”라는 말을 통해서이지요. 다시 말해, 이 말은 이제 시적화자의 무의식 저변에서 일관되게 감지하고 있던 사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한 감지로부터 비롯되는 비참한 감정에 대한 의식을 의미하는 듯이 보입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그저 볼품없는 까마귀가 불길하게 까악 거리는 소리 정도로만 치부되었던 것이(마치 무의식의 자각을 우리가 흔히 그저 의미 없는 꿈 정도로만 치부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제는 점차 결코 가볍게 무시할 수 없는 사실로서 뚜렷하게 의식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 8연에서부터 9연의 전반부(위에 인용된 부분)까지 시적화자가 까마귀에 대해 보이는 태도 변화의 추이를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이는 일종의 심리적 거리로서 나타나고 있으며, 이 거리는 시어를 통해 표현되고 있지요. 시의 기호학적 구도를 보면, 8연에서 그는 이 까마귀를, ‘친구’라는 말로 지칭하다가, 점차 ‘희망(“Hope”)’라는 말로 지칭하고, 9연에 이르러서는 자기 자신을 이 새의 주인(“master”)라고 지칭을 함으로써 그 심리적 거리를 점차 좁혀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가까워진 거리는, 지금까지 설명드린 바대로, 감정이입의 방식을 통해 그 친밀도가 상승하지요.


하지만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시적화자의 심리가 이 방향 일변도로 흐르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새를 자신과 무척 가까운 사이로 인식하게 되면서도, 그와 동시에 그것을 가깝게 느끼면 느낄수록 그것에 대한 경계심과 의심 역시 점차 강해집니다. 즉, 감정이입과 경계적 절제라는 두 상반되는 반응이 교차되면서 나타나고 있어요. 바로 위에서 설명드린 9연의 전반부까지의 정서는 ‘감정이입과 친밀감’이라면, 이제부터 설명드릴 9연의 후반부는 ‘경계적 절제’에 속합니다. 이 역시 시어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데, 먼저 그 구체적인 구절을 다시 인용한 후에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But the Raven still beguiling all my sad soul into smiling,

(하지만 여전히 그 까마귀는 슬픔으로 가득 찬 내 영혼을 기만하고 있었다.


이 속임수에 걸려든 나는 쾌활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Straight I wheeled a cushioned seat in front of bird and bust and door;

(나는 곧장 쿠션이 달린 의자를 새와 흉상이 있는 문 앞으로 밀고 갔다)

Then, upon the velvet sinking, I betook myself to linking

(그리고는 그 벨벳 위로 몸을 뉘인 채, 공상에 공상을 거듭했다)

Fancy unto fancy, thinking what this ominous bird of yore-

(이 불길한 옛적의 새가)

What this grim, ungainly, ghastly, gaunt and ominous bird of yore

(이 음울하고, 볼품없으며, 섬뜩하고, 수척한 불길한 옛 시절의 새가)

Meant in croaking “Nevermore.”

(쉰 소리로 까악 대는 “네버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했다)


밑줄 친 시어들은 매우 부정적인 의미의 것들입니다. 우선, 바로 윗부분까지는 새에 대한 친밀감이 매우 강해진 그가 갑자기, 그 새가 자신을 기만하고 현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어떤 착각에 빠지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beguile~into”이라는 동사구를 통해 분명히 명시(明示)되고 있지요. ‘beguile~into’라는 표현은, ‘현혹시키는 방식으로 상대를 속여서 나쁜 상태에 빠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이 의심은 더욱 강해져서, 바로 전까지 자신의 희망(Hope)일지도 모른다고까지 여긴(즉 이 새가 혹시 리어노어의 소식을 알려줄 존재인지도 모른다는 그런 희망 말입니다) 이 새를 두고, 갑자기 그 태도가 일변해서 ‘불길하다(ominous)’ 고 매우 분명한 단어로 말하고 있지요.


그리고는 그 새의 부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인 “Nevermore”라는 말에 대해서도 그 태도가 심각해집니다. 이전까지는 이 새가 이 말을 할 때 쓰는 단어는, “quoth”로서, 이는 매우 고풍스러운 문예체의 어조를 담지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런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서 그 새가, “croaking” 한다고, 즉 쉰 소리로 까악 댄다고 신경질적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croak’이라는 단어는 개구리가 개골거리거나, 새가 까악 대거나 하는 소리를 표현하는 ‘의성어’입니다. 즉, 이전까지는 이 새가 ‘말하고 있다’라고 여겼던 시적화자가, 또한 이 새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에 기쁜 마음으로 놀라워하던(“marvel”) 그가, 이제는 “Nevermore”라는 말을 애써 말이 아니라 그저 볼품없는 새가 까악 대는, 의미 없는 소리(“little meaning, little relevancy bore”)로 치부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를 통해 시의 구도상의 형식적인 대칭성 또한 드러나는데, 이는 매우 건축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지점입니다. 즉, 7연에서 다소 이 새를 우습게 여기고, 그것이 하는 말인 “Nevermore”의 의미를 다소 가볍게 여기면서 했던 말인, “little meaning, little relevancy bore”라는 표현이, 이제는 대조적으로 이 새를 매우 ‘불길하게(“ominous”)’ 여기고, 그렇기에 그것이 하는 말인 “Nevermore”의 의미심장함을 애써 외면하면서, 별 의미 없는 소리, 말이 될 수 없는 소리, 즉 그저 까악 대는 소리(“croaking”)로 치환되면서, 이제는 정말로 심각한 의미가 있는 말이라는 걸 내심 인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Nevermore”라는 주제어의 의미를 “little meaning, little relevancy bore” “croaking”이라는 시어들 사이의 관계, 즉 겉보기에는 유의관계이지만, 그 속뜻은 서로 완전히 모순되는 역설적인 상관(相關)을 통해, 점차 밀도 있는 공포의 정서로 드러내고 있는 포의 기술은 정말 탁월하다고 느껴집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시적화자의 심리적 갈등의 이제 위기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그는 까마귀에게 전에 없이 친밀감을 느낍니다. 의자를 그것이 앉아 있는 방문 앞까지 끌고 가 앉을 정도이지요. 하지만 동시에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방문 앞에서, 그 까마귀 바로 아래에서 그것을 보며, 다시 공상의 공상을 거듭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그렇게 숱한 죽음을 보아왔으면서도, 아직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매우 근원적인 공포에 급격히 가까워져 가기 시작합니다.




이후 10연과 11연은 그의 이러한 심리적 갈등이 폭발하기 시작하는, 소설로 치면, ‘위기’ 단계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 주에 하도록 할게요. 그럼 다음 시간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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