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1연 번역 및 해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대로 이번에는 이 시의 narrative 중 ‘위기’에 해당하는 10연과 11연을 해석하고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할게요.
<위기 – 10연>
This I sat engaged in guessing, but no syllable expressing
이렇게 나는 앉아 골똘히 추측에 골몰하였지만 어떤 음절도 소리 내지는 않았다.
To the fowl whose fiery eyes now burned into my bosom’s core;
그 새를 향해, 불처럼 타오르는 두 눈이 이제 내 가슴 깊은 곳에 새겨진 그 새를 향해
This and more I sat divining, with my head at ease reclining
이렇게 나는 추측에 더욱 몰두하며 앉아 있었다. 내 머리를 편안히 기울인 채
On the cushion’s velvet lining that the lamp-light gloating o’er,
그 쿠션을 감싼 벨벳 위로 머리를 기울인 채
그 램프의 불빛이 고소한 듯 내려다보고 있는 그 쿠션 위에 머리를 기울인 채
But whose velvet lining that the lamp-light gloating o’er,
하지만 그 램프의 불빛이 고소한 듯 바라보는 그 벨벳 쿠션 위에
She shall press, ah, nevermore!
그녀는, 아, 두 번 다시, 그녀는, 그 머리를 뉘일 수 없겠지!
이번 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시적화자의 심리변화입니다. 그전까지, 즉 1연에서 9연까지 이어진 발단과 전개 단계에서 묘사된 시적화자의 정서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죽은 연인인 리어노어에 대한 그리움 -> ② 그녀를 만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 ③ 방문 밖을 확인한 후 이어진 약간의 좌절 -> ④ (하지만) 이 좌절이 심화되기 이전에 등장한 까마귀로 인한 관심의 전환과 이에 따른 흥미 -> ⑤ (그리고 이어진) 까마귀에 대한 친근함과 경계의 공존
이었지요.
이 감정의 흐름을, 쾌와 불쾌라는 미적 감정의 가장 기본적인 두 틀에서 살펴보면,
① 불쾌-> ② 쾌 -> ③ 불쾌 -> ④ 쾌 -> ⑤ 쾌와 불쾌의 공존과 이에 따른 긴장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가 narrative poem, 즉 플롯 구조를 따르는 이야기로서의 시라는 것을 고려할 때, 이후 이 시적화자의 감정의 상태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⑤번의 저 긴장이 그의 내면에서 점점 비등(沸騰)해서, 즉 부글부글 끓어올라 폭발하기 직전에까지 이르러야 되겠지요. 심리소설에서는 이게 보통 ‘위기’ 단계에서 표현이 되는데, 이 시에서는 오늘 설명하려는 10연과 11연이 바로 이 ‘위기’에 해당됩니다.
우선 지금 다루고 있는 10연에서 드러나고 있는 시적화자의 심리변화를 한번 살펴볼까요?
이를 위해 주목해야 할 구조는 바로 1행에 표현된 구절,
“This I sat engaged in guessing, but no syllable expressing to the fowl(나는 이렇게 앉아, 추측에 골몰했지만, 그 새를 향해 단 한마디의 음절도 표현하지는 않았다)”
입니다. 여기서 ‘추측하다’라는 의미의 동사로 “guess”가 쓰이고 있지요. 웹스터 사전을 찾아보면, “guess”의 의미는 “to form an opinion or give an answer about something when you do not know much or anything about it”이라고 정의되어 나옵니다. 즉,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표명하거나 답을 내리는 행위’라는 의미이지요.
한편, 이 시에 대한 해석을 시작하면서, 저는 이 시의 화자가 지금 자각몽을 꾸고 있는 상태로 상정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었지요. 그럼 이 가정 하에서 이 시어를 한번 다시 살펴볼까요? 웹스터 사전 상의 의미를 보면, “guess”라는 단어는 분명 매우 ‘의식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능동적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지만 보통의 꿈에서 능동적이라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펼쳐지는 꿈의 광경들을 꼼짝없이 볼 뿐이지요.
하지만, 자각몽의 경우는 다릅니다. 자각몽을 꿔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어느 정도는 꿈의 내용에 개입을 하거나 내 의지대로 통제를 할 수가 있지요. 즉, 능동성이 어느 정도는 개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시의 화자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경우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지금, 정확히 말해서는 그의 전두엽 피질 내 의식의 영역은 지금, 그가 꾸고 있는 꿈의 내용을 추측(“guess”)하고 있어요. 즉, 그 꿈의 장면들을 시퀀스적으로sequentially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그 불길한 새가 반복적으로 말하는 “Nevermore”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추론하고 있는 것이지요. ‘시퀀스sequence’라는 건 인과적인 배열을 뜻합니다. 그리고 인과율을 따지는 것은 뇌의 의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추론과 판단 행위이지요.
아마도 그는 이를 통해 나름의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아직 ‘발화(發話)’하지는, 즉 소리를 내어 그것을 표현하지 않아요(“engaged in guessing but no syllable expressing”).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분명히 상당히 유의미한 추측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이건 곧 무슨 뜻일까요? 그가 스스로를 제어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는 의지적인 행위입니다. 전혀 보통의 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경우가 아니지요.
또한 그는 분명 ‘syllable’, 즉 ‘음절’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요. 이건 앞 연에 나온 ‘croak’처럼 그냥 의미 없는 ‘소리’, 즉 언어가 될 수 없는 소리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음절을 이루는 건 음운이고, 음운이란 말의 의미를 구분하는 최소의 소리 단위를 뜻합니다. 즉, 언어로서의 소리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언어란 생각을 음성이나 문자 등의 물리적 매개를 통해 표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시적화자는 지금 꿈을 꾸는 와중이지만, 그의 의식은 매우 또렷하게 깨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의식은 왜 이렇게 각성이 되어 있고, 또 왜 그렇게 스스로를 제어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 추측(“guessing”)의 행위 속에서 뭔가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건 과연 무엇일까요? 물론, 이것 역시 narrative poem에 맞게 이 시 속에 앞으로의 결론을 암시할 하나의 복선적인 상징으로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3행의 구절이지요.
“To the fowl whose fiery eyes now burned into my bosom’s core”
(불처럼 타오르는 두 눈이 이제 내 가슴 깊은 곳에 새겨진 그 새를 향해)
여기서 점차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오시나요? 이와 관련한 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그가 그 팔라디움과 같은 흉상 위에 새가 앉아 있는 방문 앞에까지 의자를 끌어와 앉은 채로, 즉 자신의 무의식의 경계 바로 앞까지 다가가 앉은 채로, 그 무의식에 대한 의식적인 추측에 골몰한 결과, 그가 점차 ‘인식(“divine”)’하게 되는 것은, 바로 저 새, 저 차가운 흉상 위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새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 더 정확히 말해 바로 자기 자신의 무의식이라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이 구절에서 묘사되고 있는 ‘눈’을 한번 풀어볼게요.
까마귀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으신 분들은 누구나 쉽게 떠올리실 수 있을 겁니다. 까마귀는 말 그대로 ‘까맣습니다.’ 이 시에서도 묘사하고 있다시피, 몸 전체가 말 그대로 흑단(“ebony”) 같이 까맣지요. 눈도, 부리고, 하다못해 발톱까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칠흑같이 까만 눈이 완전한 어둠 속에 잠긴 자정의 밤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는(“fiery eyes”)’ 색감을 띌 수 있을까요? “fiery”, 즉, ‘불처럼 타오르는’ 이라는 형용사가 상기하는 감각적 이미지는 ‘붉고 노란색’이지요. 깜깜한 방에서 이는 분명 매우 선명할 겁니다.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이 깜깜한 어둠에 잠긴 방에서는 그 새의 그 까만 눈동자는 절대 보일 수 없어야 해요. 하지만 지금 그는 분명 그 새의 눈동자를 보고 있고, 그것도 그것을 매우 강하게 의식하고 있습니다. 뭔가 모순되지요. 그런데 그는 이 모순을 곧 이어지는 부연(敷衍), 즉 덧붙이는 말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저 구절을 보면, 그는 분명 그 새의 눈을 보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방문 위 팔라스 상 위에 앉아 있는 그 새의 눈동자가 아닌, 자신의 가슴, 혹은 의식 속에 눈동자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즉, 그는 그 새의 눈을 자기 자신 속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말이 의미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요?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중 <스펠바운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45년 작으로, 그레고리 팩과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하고, 초현실주의 화가로 유명한 살바도르 달리가 미장센 제작에 참여한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인간의 무의식을 해석해서 현실의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이 영화의 내용인데, 국내 OTT 서비스에서도 구매해서 보실 수 있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이 영화를 보면, 그레고리 팩이 꾸는 꿈의 내용들이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통해 매우 인상적으로 제시가 되는데, 이 꿈속에는 몇 가지 중요한 상징들이 있습니다. 여러 개의 눈이라든지, 커다란 바퀴라든지 하는 게 등장하는데, 이게 현실의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되지요.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꿈속의 상징들이 뜬금없이 튀어나온 무의식의 이미지들이 아니라, 꿈밖의 실제의 것들, 실제의 경험들, 목격한 사실들, 기억들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는 수많은 눈의 이미지들은, 주인공인 그레고리 팩의 과거의 트라우마, 즉 어린 시절 동생이 사고로 죽는 것을 구하지 못한 채 보고 있었던 것에서 비롯된 죄책감을 상징하는 동시에, 살인사건의 목격자로서의 자신의 자의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커다란 바퀴는 살인자가 피해자를 죽일 때 썼던 리볼버 소총을 상징하지요.
히치콕, 1945년, <스펠바운드>의 꿈속 시퀀스들 중 등장하는 장면들, by 살바도르 달리
이런 식으로 꿈밖의 실제의 경험이나 실제의 자극들은 그 꿈을 꾸고 있을 때 영향을 줍니다. 이는 제가 이 리뷰 시리즈 (2)에서 인용한, 일라이저 스텐버그의 『NeuroLogic』이라는 신경학 교양서에도 실험적 근거를 통해 제시가 되어 있지요. 이 책에서 스텐버그도 역시 살바도르 달리의 1944년 그림 <Dream Caused by the Flight of a Bee Around a Pomegranate>을 가지고 자각몽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 속 나체의 여성은 달리의 아내인데, 그녀가 석류pomegranate가 놓인 테이블 옆 카우치에서 잠이 들었을 때 벌 한 마리가 아마도 그 석류 냄새를 맡고 날아 들어왔고, 그녀의 귀 주위에서 뱅뱅 소리를 내며 날아다녔겠지요. 그리고 이 소리에 그녀의 의식은 위협을 느꼈고, 이 위협감은 그녀의 꿈에서 권총의 이미지로 나타났습니다.
<Dream Caused by the Flight of a Bee Around a Pomegranate> by Salvadore Dali
그럼, 다시 시 속으로 잠시 돌아가 볼게요. 이 시의 3,4행을 보면,
This and more I sat divining, with my head at ease reclining
(이렇게 나는 추측에 더욱 몰두하며 앉아 있었다. 내 머리를 편안히 기울인 채)
On the cushion’s velvet lining that the lamp-light gloating o’er,
(그 쿠션을 감싼 벨벳 위로 머리를 기울인 채
그 램프의 불빛이 고소한 듯 내려다보고 있는 그 쿠션 위에)
먼저 기호학적으로 이번 연에 나오는 시어들을 연결시켜보겠습니다.
① guessing – divining
② his fiery eyes now burned into my bosom’s core - the lamp-light gloating o’er
이 단어와 구(句)들 각각 서로 유의 관계에 있습니다. 먼저 ‘divine’의 의미를 설명드릴게요. 흔히 이 단어는 ‘성스러운’이라는 형용사로 많이 쓰이지만. 여기서는 이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동사로서, 웹스터 사전을 찾아보면, “to discover or understand (something) without having direct evidence”라고 명시되어 있지요. 즉, ‘직접적인 근거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앞에서 설명드린 ‘guess’의 의미와 비슷하지요. 단 차이가 있다면, guess는 좀 더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의 뉘앙스가 강한 반면, ‘divine’은 ‘sense(감지하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뉘앙스, 즉 ‘직감’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이 느껴지시나요? 시어가 좀 더 밀도 있게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 들지요. 즉, 시적화자의 의식이 그것의 도플갱어인 무의식에 매우 가까워져 가고 있는 게 느껴집니다.
그럼, 이제 ②번의 구(句)들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his fiery eyes now burned into my bosom’s core - the lamp-light gloating o’er
‘까마귀의 새까만 눈’이 ‘시적화자의 가슴속에 각인된 불타는 눈동자’로 그리고는 ‘비웃듯이 (“gloating over”) 그의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램프불’로 그 시각적 이미지들이 선형적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 ‘눈’과 ‘불’과 ‘빛’의 이미지에서 시적화자가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감정이 포착되시나요? 그것은 바로 ‘위협감’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무언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느낌’이지요. 그리고 그를 그렇게 주시하고 있는 미지의 존재는 바로 그 자신, 즉 그의 무의식이라는 걸 그는 점차 직관적으로 깨닫고 있습니다(“divining”).
그렇다면 이번에는 위의 구절을 신경학적으로, 그리고 프로이트적인 방식으로 한번 해석해볼까요? 이를 위해 방금 위에서 히치콕의 영화와 스텐버그의 책을 인용하며 설명드린 내용을 한번 곰곰이 상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적화자는 왜 “the lamp-light gloating o’er”라는 표현을 쓰고 있을까요? 정확히 말해서 왜 여기서 뜬금없어 ‘램프불’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일까요? 스텐버그의 설명을 참조해 보면, 그 까닭은 아마도 시적화자가 잠이 들었을 때, 그의 깜깜한 방 안에는 램프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으므로, 그 램프불은 그가 앉아 있던 자리 가까이에 놓여 있었겠지요. 그리고 석류 옆에서 잠이 든 달리의 아내가 근처에 날아온 벌의 소리를 듣고, 그게 그녀의 자각몽 속에서 그녀를 겨누고 있는 권총의 이미지로 나타난 것처럼, 이 램프불이 그의 꿈속에서 어떤 위협을 느끼는 그의 감정과 연계되어서, 그를 주시하는 어떤 강렬한 시선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럼, 이제 이 분석들을 마지막 두 행과 연계해서 더 풀어볼까요?
But whose velvet lining that the lamp-light gloating o’er,
(하지만 그 램프의 불빛이 고소한 듯 바라보는 그 벨벳 쿠션 위에)
She shall press, ah, nevermore!
(그녀는, 아, 두 번 다시, 그녀는, 그 머리를 뉘일 수 없겠지!)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내면에서 비등하고 있던 심리적 갈등이 이 마지막 구절에서 드디어 폭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폭발시킨 촉매제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론 저 구절 내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첫째, 램프불과 기호학적으로 연계되는 까마귀의 눈으로 상징되는, 죽음의 압도적인 힘에 대한 무의식적 직관
둘째, 다시는 그녀가 그 쿠션 위에 머리를 뉘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적화자의 의식
이 둘을 통해 그는 까마귀, 즉 그의 무의식이 마치 헛된 희망을 품고 있는 그에게 내리는 냉정한 언도(言渡), 즉 돌이킬 수 없는 선고처럼 반복하는 말, “Nevermore”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희망을 순순히 놔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즉 마지막 저항을 하기 시작하지요. 스스로 이게 부질없음을 이미 깨닫고 있으면서도 절대 그 희망을 놓을 수는 없는 그 심리, 그 매우 인간적인 심리가 이제 11연부터 격렬하게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위기 – 11연>
Then, methought, the air grew denser,
perfumed from an unseen censer
그때, 나는 생각했다. 방 안 공기의 밀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고.
어느 보이지 않는 향로로부터 나는 향기가 이 방 안의 공기를 채우고 있다고.
Swung by Seraphim whose foot-falls tinkled on the tufted floor.
촘촘한 깔개가 깔린 바닥 위로 경쾌한 발소리를 내는 세라핌이 흔드는 그 향로부터 나는 향기가 이 방 안의 공기를 채우고 있다고.
“Wretch,”I cried,
“thy God hath lent thee-by these angels he hath sent thee
“박복하기 짝이 없는 자여!” 나는 소리쳤다.
“너의 신이 너를 여기에 보낸 것이야. 이 천사들로 하여금 너를 이리로 데려오게끔 한 것이야.”
Respite-respite and nepenthe from thy memories of Lenore!
“쉬어라. 리어노어에 대한 너의 기억들은 잠시 잊고 쉬어라!”
Quaff, oh quaff this kind nepenthe and forget this lost Lenore!“
“어서 어서 들이켜라. 오 이 네펜시(슬픔, 고통 등을 잠시 잊게 하는 약)를 들이켜서 이 영원히 잃어버린 리어노어에 대한 기억을 잠시라도 잊어라!”
Quoth the Raven “Nevermore.”
그 까마귀는 말했다. “아니, 더는 결코 그럴 수 없어.”라고.
이번 연의 첫 두 구절을 보면 그는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게 보입니다.
Then, methought, the air grew denser,
perfumed from an unseen censer
(그때, 나는 생각했다. 방 안 공기의 밀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고
어느 보이지 않는 향로로부터 나는 향기가 이 방 안의 공기를 채우고 있다고)
Swung by Seraphim whose foot-falls tinkled on the tufted floor.
(촘촘한 깔개가 깔린 바닥 위로 경쾌한 발소리를 내는 세라핌이 흔드는 그 향로부터 나는 향기가 이 방 안의 공기를 채우고 있다고)
제가 보기에 이 희망이 얼마나 처절한지는 ‘methought’라는 단어 속에 압축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methought’라는 단어의 의미는 ‘it seemed to me that.....’, 즉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라는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단정 내리는 것을 유보하는 잠정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싶어 하는 표현일 수도 있지요. 시적화자의 성격을 고려하면, 그가 이 말을 쓰는 의도는 아마도 이 중 전자에 가까울 것입니다. 반면,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정서를 고려하며 후자의 의미에 가깝지요. 그리고 지금 이 지점에서의 의미는 점점 후자 쪽으로 방점이 옮겨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고집스럽게 이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 세라핌, 즉 가장 고결한 천사가 데려와야 할 리어노어는 그가 지금 꾸고 있는 꿈에서조차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지금 그가 꾸고 있는 이 꿈속에서 보이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까마귀이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는 이제 억지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무슨 억지냐면, 이제 그 천사들이 자신을 위해 그 까마귀를 데리고 온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희망을 품기 시작하지요.
“Wretch,”I cried,
“thy God hath lent thee-by these angels he hath sent thee
(“박복하기 짝이 없는 자여!” 나는 소리쳤다.
“너의 신이 너를 여기에 보낸 것이야. 이 천사들로 하여금 너를 이리로 데려오게끔 한 것이야.”)
그런데 이 구절에서 “Wretch”는 대체 누구를 향해서 말하는 것일까요? 저 새를 향해서 말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신이 천사들을 대동해서 보냈다는 사자(使者)가, 혹은 하데스가 지배하는 영토에서 고결한 이름으로 불린다는 존재가 어떻게 ‘박복한 운명을 타고나서 불쌍하기 짝이 없을 수’ 있을까요? 뭔가 좀 앞뒤가 맞지 않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제가 보기에 바로 이 지점에서, 그동안 부질없는 희망과 시적화자의 매우 조심스러운 성격에서 기인한 경계와 절제 사이의 갈등이 한계에 이르고 그에 따라 그의 정신이 다소 널을 뛰는 양상, 즉, 자기분열적인 양상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 이 부분이 일종의 독백으로 읽힙니다. 말하자면, 그는 분명 지금 그 새에게 말을 하고 있지만, 실을 자기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말인 즉, 그 까마귀는 본래 시적화자 자신이라는 뜻이지요.
시적화자는 지금 꿈속에서 까마귀의 모습을 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겁니다. 꿈은 무의식의 세계이므로 그 까마귀는 곧 시적화자의 무의식이겠지요. 그러므로 그는 어쩌면 지금까지 계속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즉, 저 까마귀가 자신의 방에, 즉 자신의 영역에 마음대로 들어왔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이 시의 상황이 자각몽이라고 가정을 해보면, 오히려 시적화자 자신이, 정확히 말하자면, 이 자각몽을 각성한 채로 꾸고 있는 시적화자의 잠들지 못하는 의식이 그 꿈의 영역에, 그 까마귀가 주인인 그 방에 마음대로 잠입한 것일 수도 있지요. 그리고는 착각에 빠져 자신이 이 방의 주인인 양 행세를 하는 걸, 그의 무의식이, 그 까맣고 까매서 결코 쉽게 드러나지 않는 그 까마귀 같은 무의식이 그를 가만히, 비웃으면서(“gloating o’er”) 주시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그동안 그가 들었던 그 소리들, 그 “tapping” 하고 “rapping” 하던 방문을 두드리던 소리들은 대체 무엇이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오히려 그 자신이, 즉 시적화자의 잠들지 못하는 의식이 그 방에 들어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그리고 점점 재촉하듯이, 그렇게 계속해서 두들겼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결국 그는 그 문을 열었지요. 열고서 “Lenore?”라고 물었어요. 하지만 대답은 “Lenore!”라는 절망적인 외침이었어요. 이 두 말은 하나이면서 둘인 말들이지요. 즉, 도플갱어의 관계에 있는 말들입니다. 서로 꼭 닮았으면서도 다른 도플갱어들. 이들을 서로 만나면 안 됩니다. 이들은 서로 같을지언정 다른 세계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발터 벤야민의 이론 중에 ‘문지방(threshold) 이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가 이론화하기는 했는데, 근본적으로 모든 문화권에 있는 일종의 보편관념 비슷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에는 가시적이든 불가시적이든 경계가 있고, 이 경계를 함부로 넘어서서는 안 되며, 이는 경계 사이에 놓인 문은 일방적이라는 것, 즉 A에서 B로는 열리지만, B에서 A로는 열리지 않는다는 것 등이 있지요. 그렇기에 이를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통과의례’가 있어요. 이 시험을 통과한 자만이 이 문지방을 넘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이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우리가 익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이 우리의 삶의 양상과 질을 결정하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미성년에서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야 한다는 관념은 여전히 강합니다. 흔히 시쳇말로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봐야 ‘진짜 어른’이 된다고 하지요. 보통 이 ‘통과의례’를 제대로 거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경우도 여전히 종종 있습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 어른들이 ‘이혼’이라는 걸 절대 금기로 여겼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즉, 이는 이 문지방 밖으로 쫓겨나는 것을 의미하고, 한번 역방향으로, 정해지지 않은 반대 방향으로 그 문지방을 넘으면, 다시는 돌아오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지요.
또 종교로 예를 들자면, 가톨릭이나 유대교와 같은 전통성이 강한 보수적인 종교에서는 16세가 되면, 견진성사confirmation를 받습니다. 이걸 받지 않으면 이도 저도 아닌 반쪽짜리 존재로 여겨집니다. 즉, 성숙한 신앙을 가진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지요. 그만큼 중요한 통과의례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데미안』을 보면, 데미안의 존재를 의심하던 마을 사람들이 그가 견진성사를 받자 그 의심을 어느 정도 거두는 게 나옵니다. 반면, 교회법에 어긋나는 어떤 죄를 지어서 파문을 당한다면, 즉 그 세계에서 쫓겨난다면, 그 사람은 다시 돌아오기 힘듭니다. 즉 “Nevermore”인 것이지요. 이걸 아주 제대로 넘어버렸던 스피노자 같은 경우는 유대교에서도 파문당하고, 가톨릭에서도 배척당하며, 심지어는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서도 외면당하면서, 고향인 포르투갈을 떠나 화란, 즉 네덜란드에서 ‘유럽의 개’라는 소리를 들으며, 렌즈를 깎으며 살다가 죽었지요. 물론 그 와중에도 그의 날카로운 정신과 신념은 더욱 단련이 되어가서 『에티카』와 같은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를 우리에게 남겨주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이 문지방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자유자재로 들고 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예를 하나 더 들어 볼게요. 지브리 애니메이션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봐도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인 마히토가 삶과 죽음의 경계의 땅에 들어가 마주하는 문에 이렇게 쓰여 있지요. “吾を学ぶ者は死す.” 즉,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영화를 보면 여러 의미로 풀어낼 수 있지만, 일단은 한번 넘어가면 결코 쉽게 되돌아올 수 없다. 즉 두 번은 없다. “Nevermore”하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지방들 중 가장 강력한 규범을 가진 것, 그것을 어기는 것에 결코 용납되지 않는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죽음’이지요. 이와 관련된 유명하고 슬픈 알레고리 중 그리스 신화의 에피소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 에우리디케가 죽자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되찾기 위해 하데스가 지배하는 저승으로 내려갑니다. 즉, ‘삶-> 죽음’이라는 문지방을 아직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넘어버린 것이에요. 하지만 오르페우스는 그냥 처벌하기에는 아까운 존재였기에, 하데스는 이를 일단 유예하고, 그에게 하나의 단서를 남깁니다. 즉, 이미 죽은 자인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이 저승의 경계, 즉 문지방을 넘을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죽음 -> 삶’으로 넘어갈 수 있다면, 다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지요. ‘단, 네가 앞장서서 그녀를 이끌고 가되, 뒤에서 그녀가 아무리 너를 애타게 불러도,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결국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의 간절함과 원망에 못 이겨 뒤를 돌아봤고, 모든 것은 허사가 됩니다.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끌려가고, 혼자 넋을 잃고 저승 밖 세상으로 나온 오르페우스는 과거 그를 신봉하고 따르던 무리들, 그런데 어찌 된 까닭인지 이 격렬한 맹종이 격렬한 분노로 바뀐 무리들에 의해 사지가 뜯긴 채로 죽게 됩니다. 함부로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를 넘으려고 한 것에 대한 가혹한 대가인 것이지요.
Orpheus and Eurydice 1862 Edward John Poynter
다시 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시의 시적화자는 그 자각몽 속 그 방의 모습이 자신이 실제로 살고 있는 방의 모습과 같으므로, 자신이 그 방의 주인이라고 당연히 ‘판단’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는 그의 무의식이 그를 속인 것일 수도 있어 보입니다. 오히려 그 방의 주인은 그 까마귀인 것 같아 보인다는 말이지요. 그렇기에 그렇게 당당히, 마치 귀족 같은 모습으로 들어와 그 방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앉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그곳은 자신의 영지, 자신의 영역이니까요.
이 까마귀가 등장하던 시점은 바로 시적화자가 그 방문을 열고, “Lenore?”, “Lenore!”라고 외치던 바로 그때 직후이지요. 그렇다면 이 하나이면서도 두 개인 말은, 이 도플갱어와 같은 두 말은, 시적화자와 그 까마귀가 실은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즉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서로 같으면서도 다른 쌍둥이, 하지만 결코 서로 만나서는 안 되는 도플갱어라는 걸 암시하는 복선이 아닐까요?
전통적인 믿음에 따르면 도플갱어는 서로 만나서는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문지방은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들고 날 수 있는 경계가 아니지요. 하지만 시적화자는 그렇게 조심스러운 성격을 가졌음에도 결국 함부로 그 문을 열고 함부로 자신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5연에서 저 하나이면서도 다른 두 말을 한 후, 그는 다시 방 안으로 돌아옵니다, 아니, 그는 그렇게 생각합니다(“Back into the chamber turning, all my soul within me burning” 내 안의 영혼이 불타오르는 채로 내가 방 안으로 돌아왔을 때). 하지만 그는 방 안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 이 하나이지만 둘인, 도플갱어와 같은 방들 중 자신의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의 것으로 넘어 들어간 것입니다. 즉 문지방을 넘어버린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봐서는 안 될 존재, 그 까마귀, 또 다른 자기 자신인 것은 아닐까요?
마지막 세 구절을 설명하고 이번 시간은 마치도록 할게요.
Respite-respite and nepenthe from thy memories of Lenore!
(“쉬어라. 리어노어에 대한 너의 기억들은 잠시 잊고 쉬어라!”)
Quaff, oh quaff this kind nepenthe and forget this lost Lenore! “
(“어서 어서 들이켜라. 오 이 네펜시(슬픔, 고통 등을 잠시 잊게 하는 약)를 들이켜서 이 영원히 잃어버린 리어노어에 대한 기억을 잠시라도 잊어라!”)
Quoth the Raven “Nevermore.”
(그 까마귀는 말했다. “아니, 더는 결코 그럴 수 없어.”라고.)
시적화자는 시적 상황 상 이 말을 까마귀에게 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자기 자신에게 하고 있는 말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제 그는 이런 자기분열에 어떻게 대처를 할까요? 도플갱어 중 한 명은 반드시 죽어야 하니, 그는 결국 저 까마귀를 죽이게 될까요? 그리고는 이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날까요? 아니면 역으로 그가 그 꿈에 먹혀버리지는 않을까요? 이에 대한 결론은 다음 시간에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은 남은 마지막 세 개의 연, 즉 소설로 치자면, 절정과 결말 단계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매우 길어졌던 이 <더 레이븐>에 대한 리뷰도 이제 끝이 보이네요. 지난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