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st: 12-14연 번역 및 해설
에드거 앨런 포의 <더 레이븐> 리뷰 마지막 회 차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미리 말씀드렸던 대로, 오늘 다룰 내용은 이 시의 마지막 세 개의 연, 즉 12-14연에 대한 것입니다. 이 중, 12연과 13연이 소설로 치면 절정에 해당하고, 14연이 결말입니다.
우선, 12연으로 넘어가기 이전에 지난주에 다루었던 ‘위기’ 부분, 즉 10연과 11연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서사가 있는 시, 일종의 심리소설과 같은 시 내에서 이루어진 반전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이 시를 소설로 치자면, 시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물론 1인칭 주인공 시점입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장점은 주인공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심리의 흐름 등에 대해 그것을 타자화하는 정도가 약하고, 매우 밀도 있고 생생하게 제시한다는 점이지요. 하지만 이에는 전제 조건이 하나 있겠지요. 그것은 바로 주인공 자신이 자신의 심리 자체에 대해 그다지 낯설게 느끼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즉, 일종의 자기 일체감 같은 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보통의 경우이고, 이 시의 화자처럼 극도로 예민한 매우 특수한 경우라면,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일반적인 장점은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시의 경우는 그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까요? 바로, 주인공, 즉 화자 자신이 스스로를 매우 낯설어하는, 말 그대로 ‘완전한 소외’가 플롯이 전개되어 감에 따라 점차 시의 표면 위로 드러나면서 이에 대한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반응의 아이러니가 강조되게 됩니다. 상상을 한번 해보세요. 분명 지금 자신은 뭔가를 매우 강렬하게 느끼고, 그래서 거의 미칠 지경인데, 그러면서도 이 감정이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동시에 낯설게 느껴질 때, 즉 뜨거운 불과 차가운 얼음을 자신의 가슴속에 동시에 품고 있는 느낌이 들 때, 그 인물의 심리는 과연 어떠할까요? 이런 경우에 대한 상상을 하면서 이 시를 읽어보시는 것도 괜찮은 시도일 듯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정도로 불안한 정동(情動, affect)의 상태에 놓인 사람은 분명 매우 외로울 것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를 낯선 타자로 느끼는 존재, 즉 완전히 소외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가장 강하게 갈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누군가로부터의 관심, 사랑 등이겠지요. 자기 스스로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이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이 가장 원하는 건 바로 자신이 그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의지할 무엇입니다. 그것이 리어노어와 같은 연인이면 좋겠지만, 그녀는 이미 죽고 없지요. 시적화자의 말대로 그의 희망은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 불온하기 짝이 없는 까마귀에게조차 의지하며, 8연을 보면 제발 날아가지 말아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 간절한 바람은 그의 표현대로 ‘Nevermore’라는 말만 반복되는 장송곡과 함께 언제나와 같이 좌절되고 맙니다(“the dirges of his Hope that melancholy burden bore of ‘Never-evermore.’”).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10연과 11연은 이 파국의 양상이 시의 표면 위로 완전히 드러나기 시작한 지점입니다. 즉, 지독히도 외로운 시적화자가 의지하고 싶어 했던 그 까마귀가 사실은 시적화자 자신, 즉 시적화자의 무의식이라는 게 드러나는 지점이지요. 이 말인 즉, 그는 결국 스스로부터도 소외된, 완전하게 고독한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재확인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그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무엇일까요? 그는 분명 정동 상에 장애가 있는 매우 예민한 인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미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기에는 이 1인칭 주인공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플롯이 매우 인과적이거든요. 그리고 이제부터 설명한 연들에서 그가 보이는 태도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는 비교적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며, 이때 그가 보이는 방어기제는 ‘부정denial’에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결론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는 부정하고 싶을 뿐이지, 그가 부정하는 것을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가 보이는 이 방어기제는 병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상적인 것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12연을 시작해 보도록 할게요.
<절정 – 12연>
“Prophet!” said I, “thing of evil!-prophet still, if bird or devil!-
“예언자여!” 나는 말했다. “새든 악마든, 악마에게 종속된 것일지라도 예언할 수 있는 자여!”
Whether Tempter sent, or whether tempest tossed thee here ashore,
“사탄이 보낸 것이든지 간에, 아니면 폭풍우가 이 세상으로 너를 날려 보낸 것이든 간에”
Desolate, yet all undaunted, on this desert land enchanted-
“이 요술이 걸린 버려진 땅에서 쓸쓸하기 짝이 없어도 꿋꿋하게”
On this home by Horror haunted-tell me truly I implore-
“이 공포의 망령이 깃든 집에서 여전히 꿋꿋하게 간청하노니, 내게 말을 해다오.”
Is there-is there balm in Gilead?-tell me-tell me, I implore! "
“그곳에는, 그곳에는 향기로운 감람나무가 있는가? 말해다오, 말해다오. 이렇게 간청하노니!”
Quoth the Raven, “Nevermore.”
그 까마귀는 말했다, “네버모어”라고.
“Prophet!” said I, “thing of evil!-prophet still, if bird or devil!”
“예언자여!” 나는 말했다. “새든 악마든, 악마에게 종속된 것일지라도 예언할 수 있는 자여!”
By that Heaven that bends above us-by that God we both adore-
“우리를 굽어보고 있는 저 천상을 걸고, 너와 나, 우리 둘 모두가 경애하는 신의 이름으로”
Tell this soul with sorrow laden if, within the distant Aidenn,
“이 비통함을 짊어지고 있는 이 영혼에게 제발 말해다오, 저 머나먼 에덴의 땅에”
It shall clasp a sainted maiden whom the angels name Lenore-
“천사들이 리어노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성스러운 처녀가 영원히 머물러 있는지를”
Clasp a rare and radiant maiden whom the angels name Lenore. "
“그 쉽게 찾아볼 수 없고 밝게 빛나는 소녀가, 천사들이 리어노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소녀가 영원히 머물고 있는지를”
Quoth the Raven, “Nevermore.”
그 까마귀는 말했다, “네버모어.”라고.
12연의 전반적인 내용은 방금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정denial’입니다. 이는 인간의 심리적 반응을 설명하는 전형적인 방어기제 중 하나이지요.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고통에 직면했을 때, ‘이건 사실이 아닐 거야. 사실이 아니야.’라는 식으로 부정을 하면서 그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내려고 하지요. 대부분은 내심 이게 자신의 바람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일단 이런 식으로 자신의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효과도 있고요. 하지만 이게 병리적인 수준인 경우는, 자신이 부정한 게 진짜 사실이라고 그냥 믿어버리기도 하지요. 이런 경우는 그게 아니라고 아무리 설득을 하려고 해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의 화자는 이 중 어느 쪽에 기울여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 생각에는 그는 정상의 범주에 있습니다. 이는 이 시의 마지막 연인 결말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는 자신이 그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오히려 그래서 더 그는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는 겁니다. 절대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괴로우면,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그냥 이를 믿어버리거나 아니면 그 믿고 싶지 않은 일이 돌이킬 수 없는(“Nevermore”) 사실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이 양자 사이의 차이는 단지 뭐가 더 건강한 방식이냐 여부이지, 살아가는 것에는 아무튼 도움이 됩니다.
반면, 이 시의 화자처럼 절대 믿고 싶지 않지만 부정도 못하고, 체념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 아닐까요? 게다가 그는 이를 단 한순간도 망각도 못하는데, 이 정도가 어느 정도이냐면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이 지옥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을 정도이지요.
이 12연을 보면, 그는 까마귀를 대뜸 “예언자”라고 불러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지난 10연과 11연의 내용을 보면, 그는 분명 저 까마귀가 자신의 무의식, 즉 또 다른 자기 자신이라는 걸 이미 깨닫고 있어요. 그럼에도 그걸 갑자기 “예언자”라고 추켜세우면서, 거의 애걸을 하다시피, 자신이 부정하고 싶어 하는 사실이 실은 그의 바람대로 정말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소리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이미 이 새가 자기 자신, 자신의 무의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요. 그리고 결국 그 새의 대답, 즉 자기 자신의 대답은 언제나와 같이 “Nevermore”라는 단언뿐입니다. 즉, 그는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렇게 처절하게 부정을 해대어 보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그의 이 방어기제는 병적인 수준이 아니라는 게 드러나지요.
그는 지금 자신의 꿈, 루시드 드림, 즉 자각몽이라는 무대 위에서 혼자 일인극을 하고 있습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또 얼마나 지독히도 슬프고 고독한 일인지를. 이 무대 위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에게 답하고 있습니다. 이를 자세히 풀어보면, 그는 이 감당하기 힘든 고독이 너무 괴로워서 스스로에게 ‘이건 사실이 아니야. 내 희망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야.’라고 자기 설득을 하려고 시도하지만, 이 부정의 방어기제가 마법의 주문과 같은 역할을 하기에는 그는 너무도 명료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 주문이 먹혀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마치 최면에 잘 걸리지 않는 사람들처럼 말이에요. 그 결과, 그 자신은 스스로의 이 간절한 애청에 냉정하게 대답을 하지요. “Nevermore”라고 말입니다.
<절정 – 13연>
“Be that word our sign of parting, bird or fiend!”
“그 말은 이제 너와 내가 서로 볼 일 없다는 걸 알려주는 표식이 되리니! 새 아니 악령이여!”
I shrieked, upstarting-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Get thee back into the tempest and the Night’s Plutonian shore!
“다시 저 폭풍 속으로, 저 하데스가 지배하는 밤의 영토로 돌아가라!”
Leave my loneliness unbroken!-quit the bust above my door!
“나의 고독을 방해하지 말고, 내 방문 위의 그 흉상으로부터 떠나라!”
Take thy beak from out my heart,
“내 심장에 닿아 있는 너의 부리를 거둬라!”
and take thy form from off my door! "
“그리고 나의 문에서 너의 그 몰골을 더 이상 보이지 마라!”
Quoth the Raven, “Nevermore.”
그 까마귀는 말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어.”라고.
13연에서는 12연에서 보였던 감정이 완전히 일변합니다. 12연에서는 간절하게 사실을 부정하며 까마귀이자 자기 자신인 상대에게 애원을 하고 있다면, 13연에서는 분노와 증오로 날뛰기 시작하지요. 물론 그의 감정이 이렇게 급변한 이유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간절한 부정denial에 대한 까마귀의 ‘부정(“Nevermore”)’ 때문이지요.
이렇게 감정이 일순간에 급변을 하며 극도의 불안 위에서 사는 사람들을 두고 경계선(borderline) 위에 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한 성격 장애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 보이는 공통점 중 하나는 자아 정체감이 매우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홀로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조차도 내 편이 아닌 것처럼, 매일 같이 문득문득 너무도 빈번하게 낯선 존재처럼 느껴진다면, 얼마나 공허하고 고독하겠습니까? 즉,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들인 것이지요. 물론 이 시의 화자가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포가 그런 고통을 겪고 살았다는 증거도 없고요. 그러니 이는, 그저 비유로, 이 시의 화자가 지금 겪고 있는 감정의 격변과 불안, 두려움을 이해하기 위해 빌려오는 유사한 사례로 생각해 주길 바랍니다.
10연과 11연에서 까마귀가 바로 자기 자신의 무의식이라는 걸 확인한 시적화자는 이제 완전한 자기 분열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누구인지, 저 까마귀가 나인 것인지, 그렇다면 지금 저 까마귀를 보고 애원을 하고, 의심을 하며, 화를 내고 있는 나는 대체 누구인 것인지 하는 극도의 혼란이 지금 시적화자의 의식을 정신없이 헤집어 놓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지경에 놓인 인간은 그럼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당연히 매우 두려워하겠지요. 무서워서 미칠 것 같겠지요. 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외롭겠지요.
그럼, 이 지점에서 지금까지 이어진 이 narrative poem의 플롯 전반에서 시적화자와 까마귀 사이의 심리적 거리, 다시 말하면, 시적화자가 스스로에 대해 가지는 일체감의 거리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한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까마귀가 처음 등장한 연은 6연이지요. 시적화자가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주된 감정은 ‘흥미’였습니다. 그리고 7연에 이르러서는 ‘경탄’으로 바뀌고, 8연과 9연 전반부에 이르러서는 ‘친밀함’에까지 이 긍정적인 감정들이 발전합니다. 즉, 그와 까마귀 사이의 심리적 거리가 점점 매우 가까워진다는 것이지요. 이를 표현하듯 급기야 그는 까마귀가 앉아 있는 팔라스의 흉상 바로 밑에까지 자신의 의자를 끌어와서 앉지요(“Straight I wheeled a cushioned seat in front of bird and bust and door”).
하지만 이렇게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짐과 동시에 그에 대한 경계도 심화되는데, 이게 바로 9연 후반부터입니다. 즉, 그는 이제 까마귀에 대한 친밀과 경계 사이에 놓인 경계선(borderline) 위에 서 있기에 이른 것이지요. 그리고 10연에 이르러서 결국 그는 그 까마귀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감지하게 되고(“divining”), 11연에는 이를 완전히 깨닫지만,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리고 이후 지금 다루고 있는 12연과 13연에 이르러서는 부정과 애원, 그리고 분노, 혐오라는 방식으로 감정이 일변하며 널을 뛰고 말 그대로 발작을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럼, 이러한 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정확히 말해서 이 변화의 양상 속에서 보이는 특이점은 무엇일까요? 9연에서 시적화자는 분명 자신의 의자를 까마귀가 앉아 있는 흉상 바로 밑까지 어떤 망설임도 없이(“straight”) 끌고 갔습니다. 이는 그 순간 그것을 매우 친밀하게, 세상 더없이 친밀한 존재로 여기고 싶어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를 함과 거의 동시에 그는 그 까마귀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극단적인 비일관성에서 느껴지는 건, 그의 정동의 상태가 굉장히 불안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불안은 그 까마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그가 깨닫게 되는 순간, 압도적인 두려움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그만큼 그 까마귀와 그 사이의 심리적 거리도 압도적인 크기로 멀어지게 됩니다. 이 말인 즉, 그가 완전히 소외되기에 이르렀다는 것,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완전히 외면받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 아닐까요?
<결말 – 14연>
And the Raven, never flitting, still is sitting, still is sitting
그리고 그 까마귀는 이제 결코 퍼덕이지 않고, 가만히, 그저 가만히 앉아 있다.
On the pallid bust of Pallas just above my chamber door;
그 창백한 팔라스의 흉상 위에서, 바로 내 방문 위에서
And his eyes have all the seeming of a demon’s that is dreaming
그리고 그의 눈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악마의 그것과 꼭 닮아 있다.
And the lamp-light o’er him streaming throw his shadows on the floor;
그리고 그를 비추고 있는 그 램프불이 바닥 위에 그 그림자들을 길게 던지고
And my soul from out that shadow that lies floating on the floor
그리고 바닥 위에 둥둥 떠 있는, 저 그림자로부터 나온 나의 영혼은
Shall be lifted-nevermore!
이제 두 번 다시는 결코 그 위로 들어 올려 질 수 없겠지!
이제 드디어 결말입니다. 이 결말 부분에서 유념하셔야 할 부분은 바로 ‘시제’입니다. 전체적인 시를 쭉 훑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시는 기본적으로 ‘과거시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즉, 시적화자가 자신이 경험했던 자각몽에 대해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해주는 식으로 시의 내용이 전개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 ‘시제’가 바로 이 마지막 연에 이르러 갑자기 ‘현재시제(밑줄 친 부분들 참고)’로 바뀝니다. 그렇다면 이건 왜 그런 걸까요? 시의 주제와 정서와 관련해서 이게 의미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요?
가장 설득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는 건, 그가 그 꿈을 꾼 이후로, 비록 잠에서 깨어난 이후에도, 그 꿈속에서 경험한 것들과 그로 인한 압도적인 감정들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 같습니다. 포의 다른 작품들 중 「A descent into the Maelström」이라는 장편(掌篇, conte)에 가까운 단편, 즉 매우 짧은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Maelström” 은 고유명사로 노르웨이인지 어딘지 지금 확실히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그 근방에 있는 매우 유명한 장소입니다. 이곳은 바다입니다. 늘 소용돌이가 치는 곳이라고 하는데, 그 소용돌이가 언제 칠지 예측 불가능한 데다가 그 크기와 힘이 매우 압도적이어서, 가장 위험한 바다 중 하나로 유명한 곳이라고 해요. 아무튼 이 소설을 보면, 이곳을 방문한 주인공인 어떤 남자를 안내해주는 현지 노인이 한 명 나오는데, 그 노인이 이곳에서 치던 그 소용돌이를 경험했던 일을 들려주면서 하는 말이, 그때 그 한순간의 경험으로 자신의 머리가 새하얗게 새어버렸다고 공포에 떨며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노인의 말을 따라 읽어보면, 이미 오래전에 경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생생히 느껴집니다. 마치 그 소용돌이를 경험하기 이전과 이후의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말이에요. 오히려 그때 그 압도적인 공포의 경험이 정말로 생생한 사실이고, 이렇게 살아서 그냥 살고 있는 현실이 오히려 꿈 같이 느껴지는 것, 이런 전도(顚倒)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과연 이게 전도일까요? 그저 우리가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보기에는 이 시의 화자 역시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 자각몽을 꾼 이후로, 그는 꿈이 아닌 현실을 살고 있을지라도, 그 현실은 더 이상 그에게 생생한 의미가 없는 것, 오히려 그 꿈속에서의 경험이 그에게는 더 실재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결과, 그 꿈은 하룻밤의 해프닝이 아닌, 어떤 필연성을 가진 것, 그저 꿈이라는 양태로 그에게 경험되었을 뿐인, 가장 실재에 가까운 실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이제 시의 구절들을 한번 자세히 살펴볼까요?
그전에 먼저 이 마지막 연에서 시적화자가 놓인 시적 상황을 정리해 보고 넘어갈게요. 그는 지금은 13연까지 이어졌던 그 자각몽을 꾸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는 아마도 깨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자신의 방에 있어요. 아마도 시각은 밤이거나 적어도 저녁은 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램프불을 켜 놓은 채로 있거든요.
And the Raven, never flitting, still is sitting, still is sitting
(그리고 그 까마귀는 이제 결코 퍼덕이지 않고, 가만히, 그저 가만히 앉아 있다)
On the pallid bust of Pallas just above my chamber door;
(그 창백한 팔라스의 흉상 위에서, 바로 내 방문 위에서)
이 첫 두 행을 보면, 더 이상 꿈을 꾸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까마귀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뜬금없는 팔라디움과 같은 팔라스의 흉상도 여전히 그의 방 문 위에 있지요. 그렇다면 이 문 위에 달린 팔라스의 흉상은 그저 고상한 취향의 장식품으로서 그의 방 문 위라는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다소 생뚱스러운 위치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일까요? 물론 그랬을 수도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고, 뭐, 그게 중요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까마귀가 앉아 있을 장소로서 그게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게 왜 필요할까요?
팔라디움은 원래 도시, 즉 어떤 공간을 지키기 위한 수호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호물 위에 죽음을 상징하는 새가 앉아 있다? 뭔가 의미심장하지요. 그리고 시 속의 묘사를 보면 이 팔라스의 흉상은 그의 방문 위에 달려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공간 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까마귀는 그 위에 올라가 앉아, 마치 그 돌과 하나가 된 것처럼 그를 내려다보고 있지요. 이게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방을 지배하는 주인은 이 새라는 것 하나와 그가 방문 위에서 꼼짝 앉고 있으므로 시적화자는 그 방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즉, 이 시적화자가 비록 깨어있을지언정 그의 정신과 마음은 이제 온전히 그 꿈에 완전히 먹혀버렸다는 것 아닐까요?
정상적인 상황, 혹은 일상적인 상황에서 보면 이는 분명 ‘전도(顚倒)’입니다. 왜냐하면 원래는 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어야 할 무의식, 즉 sub-conscious가 초(超)의식, 즉 super-conscious로 된 꼴이니까요. 여기서 ‘sub-’은 ‘-보다 아래에’라는 접두사입니다. 그리고 ‘super-’는 그것의 반의어로서의 접두사이지요.
And his eyes have all the seeming of a demon’s that is dreaming
(그리고 그의 눈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악마의 그것과 꼭 닮아 있다)
And the lamp-light o’er him streaming throw his shadows on the floor;
(그리고 그를 비추고 있는 그 램프불이 바닥 위에 그 그림자들을 길게 던지고)
And my soul from out that shadow that lies floating on the floor
(그리고 바닥 위에 둥둥 떠 있는, 저 그림자로부터 나온 나의 영혼은)
Shall be lifted-nevermore!
(이제 두 번 다시는 결코 그 위로 들어 올려 질 수 없겠지!)
이 세 번째 행이 저는 이 시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입니다. 처음에 이 시를 읽었을 당시 이 부분에 이르렀을 때 뒷덜미에 소름이 끼쳤던 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행을 잘 보시면, 시적화자와 까마귀가 동일한 존재라는 게, 하나이면서 둘인 도플갱어와 같은 존재라는 게, 그리고 이 말인 즉, 시적화자의 자아가 지금 분열되어 있다는 게 딱 드러나는 구절이 있거든요. 그게 바로 제가 밑줄 쳐 놓은 부분, “a demon’s that is dreaming”입니다. 여기서 ‘that’은 주격관계대명사입니다. 즉, ‘that’ 이하 이어지는 불완전한 문장의 주어는 ‘that’ 앞에 놓인 선행사인, ‘a demon’이라는 뜻이지요. 이 말인 즉, 시적화자는 지금 ‘어떤 악마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a demon is dreaming’)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만약 여기서 말하는 악마가 흔히 ‘사탄’이라고 하는 바로 그 악마라면, ‘a demon’이 아니라 ‘the Demon’이라고 표현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시적화자는 분명 ‘a demon’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이는 정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어떤 악마라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그런데 그 악마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그는 어떻게 아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 그 어떤 악마여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즉, 여기서 그가 말하고 있는 ‘a demon’은 시적화자 자신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스스로를 저렇게 모호하게, 그러면서도 매우 가치 없게 ‘악마처럼 타락한 어떤 존재’라고 인식하는 그는 이 구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 까마귀의 눈은 꿈을 꾸고 있는 어떤 악마의 그것과 꼭 닮아 있다.”라고 말입니다. 이 구절을 보면 그는 이제 자신의 자아상을 오직 저 까마귀를 통해서만 인식하는 지경에 이른 것으로만 보입니다. 즉, 예를 들어, 누군가가 그에게 ‘당신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당황과 혼란을 감추지 못하면서 이렇다 할 대답을 못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계속 저 까마귀의 모습만 떠오를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어떤 악마와 같은 존재’라고 대답할지도 모르지요. 이에 의아해진 질문자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으면 그가 과연 뭐라고 대답할까요? 제 상상 속에서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다시는 구원받을 수 없으니까. 완전히 버려져 버렸으니까. ‘Nevermore’이니까.”라고 말입니다.
이와 같은 그의 자의식은 더욱 하강하여, 다음의 구절을 힘없이 중얼거리며, 이 시는 끝이 납니다.
the lamp-light o’er him streaming throw his shadows on the floor;
(그를 비추고 있는 그 램프불이 바닥 위에 그 그림자들을 길게 던지고)
And my soul from out that shadow that lies floating on the floor
(그리고 바닥 위에 둥둥 떠 있는, 저 그림자로부터 나온 나의 영혼은)
Shall be lifted-nevermore!
(이제 두 번 다시는 결코 그 위로 들어 올려 질 수 없겠지!)
이 구절에서는 그는 자신이 저 까마귀의 그림자라고 말하고 있어요. 새까만 까마귀와 그것보다 더 새까만 그림자. 그 상태로 바닥에 달라붙어 다시는 들어 올려 질 수 없는, 다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 구절에 대한 복선은 2연에 제시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each separate dying ember wrought its ghost upon the floor(하나하나 식어 죽어가는 잉걸불들이 그것의 원혼을 바닥 위에 토해내고 있었다)”라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이 시는 수미상관이라는 형식적인 구조를 완성하며 끝을 맺게 됩니다.
이 시의 주제는 ‘죽음’이지요. 그런데 단지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보다는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완전히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독을 다루고 있지요. 그러므로 여기서 방점은 ‘죽음’이 아닌 ‘고독’인 것 같아 보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그것에 이르는 순간에 육체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것도 있겠지만, 인간의 의식은 이보다는 이로 인한 고독, 그 막막하기 짝이 없는 고독을 더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이 시의 시적화자는 죽지 않았습니다. 분명 살아서 숨 쉬고 있지요. 하지만 그의 연인, 그의 친한 친구들도 모두 죽어 없어지고, 세상에 오로지 혼자 남았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 놓여도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강인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떤 일이든 다시 시작하고, 다시 친구들을 사귀고, 다시 결혼을 하고 하면서 그렇게 다시 살아가지요. 하지만 이 시의 화자는 이게 가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고독은 좀 더 심각하기 때문이지요. 즉, 그는 스스로에게도 소외된, 비참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극도의 자기 소외가 그의 기질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주변 사람들의 잇따른 죽음에 의한 충격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시를 읽어내는 데 있어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요. 중요한 것은, 그가 왜 저런 자각몽을 꿨는지, 그리고 그 자각몽을 분기점으로 왜 저와 같은 자기 분열의 양상이 병적으로 심화되었는지의 원인이 아마도 그의 이 지독한 고독감에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아직 죽지 않은 인간이라도, 이 정도로 자기 소외의 상태에 놓여 있다면, 그것이 죽음과 다른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게 만약 생존을 위해 가리어진 실존의 일면 중 하나라면, 이로 인한 공포는 얼마나 압도적일까요? 죽을 것 같아 미칠 것 같이 두려운데 그 두려움을 끝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역설, 그래서 새까만 까마귀의 더 새까만 그림자와 같은 고독 속에서 영원히 부유해야 하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빠져야 하는 아이러니, 이것이 이 죽음으로 상징되는 압도적인 힘의 내용이라는 걸 이 시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는 이와 같은 죽음과 고독의 압도적인 힘을 미학적으로 인식하고 표현할 줄 아는 천재적인 예술가입니다. 그의 언어는 정제되어 있고, 매우 세련되며, 고상하지요. 지난번에 프랑코 제피렐리의 영화 <햄릿>의 한 장면을 인용하면서, 죽음의 데코럼decorum에 대해 말씀드렸었습니다. 육중한 바위를 섬세하게 깎아 자신의 칼을 가슴에 굳게 올린 채 영원한 안식을 맞은 것 같은 중세 기사의 부조(浮彫)가 새겨진 관 아래에는 진짜 죽음, 즉물적인 죽음의 모습이 가리어져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잘 가리는 것, 그래서 이 즉물적인 죽음의 의미를 승화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의 데코럼입니다. 즉, 어느 정도는 기만적인 행위인 것이지요.
하지만 포가 다루는 죽음의 데코럼은 다릅니다. 그는 가리는 게 아니라 까발리지요. 위에 예로 든 관으로 친다면, 그 관을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시면서 어땠나요? 그게 매우 즉물적이고 흉물스러운 것으로 느껴졌었나요? 아니지요.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아름답다고 느껴졌지요.
포는 이렇게 죽음을 직관할 때 우리 대부분이 느끼게 되는 거부와 공포, 그리고 고독의 감정 내에 어스름하게 내려앉아 있는 어떤 육중한 힘을 감지하고, 그것을 압도적인 숭고미로 끌어올릴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난 천재입니다. 이런 탁월성을 타고난 작가가 남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행운입니다. 왜냐하면 살면서 정말 느끼기 힘든, 결코 무상(無常)하지 않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매우 드문 발견이니까요. 이번 기회를 통해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즐거움이 잘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것으로 에드거 앨런 포의 <더 레이븐> 리뷰 시리즈는 끝이 났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문학이 아닌 철학서에 대한 리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룰 책도 미리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입니다. 그럼 전 다음 시간에 찾아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