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리뷰 두 번째
오늘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리뷰 시리즈 중 세 번째 글입니다. 지난주에는 1장의 도입부를 설명드리는 것까지 했었지요. 그리고 그 내용은 바로 『자유론』에서 다루고자 하는 ‘시민적 자유’란, 구체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유’의 의미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밀은 ‘시민적 혹은 사회적 자유’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돌이켜보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했지요. 그리고 그는 이를 ‘유럽의 자유주의의 역사’라고 불렀습니다.
자, 지금 간략하게 재정리해드린 것까지가 지난주에 다룬 1장 도입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럼 이번 시간에 이루어질 1장에 대한 두 번째 리뷰의 내용이 무엇일지는 대충 감이 오실 겁니다. 그것은 바로 개개인의 독립성, 즉 자율이 수반된 자유라는 의미에서의 리버티liberty의 중요성과 이에 대한 사회적 통제와 관련된 내용이겠지요. 이는 사실 밀이 『자유론』을 쓰게 된 목적이자, 이 책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런 글에서 보통 1장은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는 장이기 때문에, 오늘 다룰 내용은 이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통제 사이의 갈등의 보편적인 양상에 관한 것이 될 겁니다. 그럼, 바로 시작을 해볼까요?
4) 개인의 독립성과 사회적 통제
① “관습의 주술적인 힘”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시대마다 그리고 사회마다 개인의 독립성과 사회적 통제를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방법은 다 제각기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적인 양상이 일관되게 발견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 대부분은 이 문제, 즉 개인의 독립성과 사회적 통제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인류가 언제나 동일하게 생각을 해온 것처럼 여긴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자신들의 방식에 대해 조금이라도 반성이나 의심을 해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말인 즉, 시대나 사회가 다양하든지 말든지 간에,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메타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밀이 '관습'이라는 말로 지적하고 있는 태도에는,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공유하는 믿음', '관례' 등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다시 말해, 관습의 외양은 시대마다 나라마다 다를지는 몰라도, ‘관습’이라는 것, 그 자체에 대해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는 항상 거의 똑같다는 것이지요. 즉, “이건 원래부터 그런 거야.”라는 식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의 정당성에 대해 의심을 가져보거나, 반성을 해 볼 생각 같은 건 좀체 안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실입니다. 경험적으로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이를 두고, 한국사회에서는 보통 “꼰대”라는 비하적인 표현을 쓰지요. 하지만 이 말을 쓰며 기성세대를 비웃는 사람들 역시 어떤 면에서는 매우 꼰대적인 게 또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또 이를 비웃으면서 “젊은 꼰대”라고 하지요. 이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제 곧 이에 대한 설명이 이어질 겁니다. 아무튼 밀에 따르면, 우선,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이런 태도들은 인류 공통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태도를 두고 밀은 ‘관습이 마치 제1의 본성인 양, 잘못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관습이 무반성적으로 왜곡·확장되어서 받아들여지면, 당연히 이성적인 설명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는 축소되고, 이는 다시 관습의 힘을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겠지요. 밀은 이 문제의 원인을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관습과 이성 그리고 정서 사이의 관계’에 그 원인이 있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관습에 무비판적으로 의존하는 사람들의 경향성 혹은 습성은 이성보다는 정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선호’라는 정서
‘선호’라는 정서를 두고, 밀은 범인(凡人)들, 즉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과 판단의 지침이라고 다소 신랄하게 표현합니다. 여기서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란, 오늘날의 표현에 따르면, ‘대중(大衆)’이겠지요.
하지만 표현의 신랄함과는 별개로 이와 같은 밀의 생각은 매우 설득적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매우 유효하지요. 왜냐하면 실제로 21세기 현재의 우리도 매일 같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즉, 우리의 매일의 경험이 밀의 이 주장의 진실성을 귀납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오늘날,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를 가진 이데올로기는 과연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다름 아닌, 바로 포퓰리즘populism입니다. 특히, 지금은 정말 말 그대로, 날 것 그대로의 포퓰리즘의 시대이지요. 인스타 등의 SNS나 Youtube 등의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 의해 TV방송이나 신문 등의 레거시 미디어가 대체되어 가고 있는 지금은 기존과는 조금 양상이 다를 뿐, 여전히(하지만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포퓰리즘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건 똑같습니다. 즉, 밀이 ‘시대와 나라마다 관습의 겉모습은 다를 수 있어도, 그것이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통제와 관련해서 작용하는 기제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다 본질적으로 똑같다.’라는 말한 바가 지금의 21세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요.
1960-70년대쯤 활동했던 20세기에 가장 유명했던 인물 중 하나인 앤디 워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당신이 똥을 싸도 사람들은 당신한테 열광할 것이다.’
뭐, 이게 사실은 앤디 워홀이 한 말이 아니라고 하기도 하지만, 누가 말을 했건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저 말은 분명 앤디 워홀을 설명하는 말이니까요.
앤디 워홀은 실크 스크린 기법의 이용을 극대화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실크 스크린은 초·중·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을 겁니다. 일종의 판화 같은 것인데, 전통적인 판화보다 훨씬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동판 같은 것에 힘과 시간을 들여 에칭(etching)을 하는 예비적인 과정이 전혀 요구되지 않거든요. 그냥 물감을 써서 찍어내면 됩니다. 이 기법을 이용해서 그는, 코카콜라, 캠벨 수프의 포스터 등을 대량으로 찍어냈습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바로 메릴린 먼로의 얼굴을 화려한 색감의 변주만 약간 줘서 반복해서 복사하듯이 찍어낸 작품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점입니다. 그런데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밀이 관습을 언급하며 강조했던 것처럼 ‘메타적인 시각’이 좀 필요합니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양산된 워홀을 작품을 두고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 ‘팝아트’라는 독립된 영역으로서 주류에 편입해 있지요. 이게 가능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그것은 바로 그가 ‘유명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가 하나의 상징적인 표지와 같은 존재로 많은 사람들에게 ‘선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기제는 바로 그가 찍어낸 작품들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가 만들어 낸 예술의 정신은 바로 다름 아닌 이 기제 자체를 작품의 주제로서 당당히 표현한 것에 있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메릴린 먼로의 얼굴의 실루엣을 색감만 좀 달리해서 복사하듯이 찍어낸 그 유명한 작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점차 진짜 ‘메릴린 먼로’는 사라지고, ‘메릴린 먼로라는 이미지’만 전면으로 부각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게 포퓰리즘의 작용하는 기제의 본질 같습니다. 그럼 이 점을 요즘 우리가 겪는 실제의 경험 사례에 적용해보겠습니다.
불과 얼마 전, ‘두바이 쫀득 쿠키’ 일명, ‘두쫀쿠’ 광풍이 불어서, 마트에 가면 피스타치오가 다 품절되어 있거나, 있어도 가격이 폭등한 적이 있었지요. 그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너도 나도 ‘두쫀쿠’를 사 먹거나, 만들어 먹는 게 대유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그렇게 맛이 있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그런 것치고는 이 유행이 마치 촛불에 입으로 바람을 휙 불면 바로 꺼지듯, 한순간에 꺼져버렸어요. 그렇게 맛이 있는 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게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즉, 인스타에 찍어 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두쫀쿠 이미지’를 위해서였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 사람들이 두쫀쿠를 소비했던 이유는 그것의 음식으로서의 본질보다는 그것의 이미지를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앤디 워홀의 ‘메릴린 먼로’가 떠오르는 지점이지요.
그리고 이 이미지를 본 팔로워들은 ‘좋아요’를 눌러줍니다. 사실, 이 ‘좋아요’를 위해, 사람들이 두쫀쿠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 ‘좋아요’가 바로 ‘선호’의 정서이고, 이 두쫀쿠 유행이라는 사실적 경험은 밀의 다소 신랄한 진단, 즉 ‘선호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과 판단의 지침’이라는 주장의 설득력을 높여주는 매우 유효한 귀납적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한편, 이런 식의 소비를 사회적 효용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과연 어떨까요? 여러분들도 한번 공리주의자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이 실크 스크린으로 찍어대듯, 사진으로 계속 복사된 비슷한 이미지들이 다 소비되자, 즉 이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가 사라지자, 그 광풍도 순식간에 꺼져 버렸어요. 그리고는 이제는 너도 나도 만들어둔 두쫀쿠의 재고만 쌓여 있을 뿐입니다.
이 상황을 밀과 같은 공리주의자가 보면, 이 두쫀쿠 열풍의 효용utility이 제로 혹은 마이너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사례의 이면을 메타적으로 바라본 후, 포퓰리즘, 즉 선호에 기반한 사회적 행위에 대한 효용에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할지도 모르지요. 제가 보기에는 『자유론』에서 ‘선호’라는 정서를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루는 이유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밀은 말합니다. ‘선호라는 정서는 인간 행동의 규율과 관련해서 사람들의 견해를 결정하는 실제적인 원리로서 작동’한다고 말입니다. 즉, 매우, 매우 강력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경험적 관찰로부터 유추한 귀납적 근거에 따라, 밀은 관습을 결정하는 건 바로 이성이 아닌 정서라고 결론 내리기에 이른 것일 겁니다.
이 ‘선호’라는 정서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통제와 관련해서 이처럼 매우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까닭에, 밀은 이를 해석하는 데 상당한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선호’라는 정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는 ‘실제적인 원리’가 됩니다.
a. 자신이 느끼는 선호가 자신이 내리는 판단의 근거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아마도 분명 그럴 겁니다. 당장 오늘날 우리들 자신부터 그러니까요.^^;;). 하지만 어떤 한 사람이 내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사 결정이 이성적인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의 선호일 뿐이다.
⇨ 이 논리는 ‘옥캄의 면도날(Ockham’s blade)’이라는 철학적 혹은 논리학적 원칙에 따른 것입니다. 옥캄은 영국인으로, 14세기에 활동한 후기 스콜라 철학자이자 프란체스코회에 속한 수사(修士)였습니다. ‘옥캄의 면도날’의 의미는 (진리치를 증명할 수 없는) 불필요한 가정들은 최대한 배제해서 가장 단순한 설명을 하는 것이 논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과학 이론들이 거의 이렇지요. 밀은 경험론자이고 공리주의자입니다. 경험론의 특징은 경험되지 않은 사실은 근거로 삼지 않는 것이고, 공리주의의 특징은 가치의 방점을 ‘효용’에 두는 것이지요. 그리고 불필요한 번잡함은 결코 ‘효용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밀이 이런 논리적 귀결을 내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 한편, 이 논리적 귀결 역시 비약적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오히려 매우 간명하고 명쾌하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b. 설령 이성적인 근거를 제시했다고 하더라도, 실은 그것이 단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느끼는 비슷한 선호일 뿐이라면, 이 역시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선호 대신 많은 사람의 선호를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일 뿐이다.
⇨ 이걸 읽고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바로 유행, 다수결의 원칙 등등이 떠오르시지는 않나요?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한국의 학생들 사이에는 자신이 재학 중인 학교의 교복 말고, 보통 다른 교복이 한 벌 더 있지요. 한때는 ‘노스페이스’가, 또 한때는 ‘롱 패딩’이 모든 학생들이 반드시 입어야 할 ‘교복’이었어요. 그런데 만약 이를 이상하게 여긴 누군가가 “너 왜 이걸 입는 거야?”라고 물으면, 대다수는 “이게 이뻐. 그리고 무엇보다 엄청 따뜻해. 그래서 나는 이게 좋아.”라고 대답할 겁니다.
하지만 따뜻한 옷은 저것 이외에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겉으로는 이성적인 근거인 것처럼 보여도, 실은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의심이 되지요. 그저 대부분의 학생들이 입으니까 예쁘다고 생각하고, 다 그렇게 입으니까 자신도 그렇게 입고 싶어 하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나요?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저 대답은, 밀의 말대로, ‘이성적인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선호 대신 많은 사람의 선호를 그 근거로 제시한 것’으로 보이지 않나요?
a와 b에 정리된 경험적 근거에 따라 밀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대개 도덕적 평가에 영향을 주는 원인은 이성에 근거한 정당성 여부가 아닌, 사람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지 여부가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즉, (비록 학생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패딩을 입는 것이 도덕적 평가와 별 관련은 없지만, 인간 행동론적 양태로 본다면), 학생들이 너도 나도 제2의 교복을 입는 이유는 그것을 입는 게 안 입는 것보다 자신들이 또래 집단 내에서 활동을 하는데 더 유리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밀은 다음과 같은 통시적 관찰에 의한 근거를 부연으로 덧붙입니다.
‘실제로 한 사회 속에서 작용하는 도덕률의 상당 부분은 신흥계급의 이해관계와 우월의식에서 나온다. 구(舊) 계급이 세력을 잃으면, 기존에는 지배적이었던 도덕적 정서들에 대한 반감과 문제제기가 발생한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말을 통해 맨 처음에 언급한 사례에 대한 설명이 어느 정도는 해결되는 것 같습니다. 즉, 밀은 이 매우 세련되고 절제된 표현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이는 행동 양태, 즉 ‘꼰대를 비웃는 또 다른 젊은 꼰대’의 모습과 까닭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5) 규범의 주된 요인
이제부터 설명할 밀의 주장을 보면, 그것이 매우 간결 명확하면서도 설득적이라는 걸 반박하기가 쉽지 않으실 겁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우리가 매일 같이 하는 경험이 이를 반증(反證)하기보다는 방증(傍證)해주고 있거든요.
한 사회 내에서 규범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밀은 위에서 설명한 ‘선호’라는 정서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매우 촌철살인(寸鐵殺人)적인 멘트를 날립니다.
‘한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잡은 세력이 선호하는 것들과 기피하는 것들이, 법률에 의한 처벌이나 여론을 통해, 모든 사람이 지키도록 강제되는 것이 곧 실제적으로 규범이 결정되는 과정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로, 다음과 같이, 통시적인, 다시 말해 역사적인 사례들을 들고 있습니다.
a. 선호에 기반한 법률에 의한 경우의 사례
이와 관련해서 밀은 유럽(대륙 쪽)의 종교 개혁 중에 있었던 구교와 신교 사이의 처벌과 투쟁의 과정들을 그 사례로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건, 이 말이 영국에는 종교 전쟁이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영국에서 신교와 구교 간의 종교 갈등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미국이라는 나라는 탄생하지 않았을 터이니까요. 즉, 밀이 여기서 굳이 대륙 쪽이라는 암시를 준 건 선호에 의해 개인의 자유가 통제되는 양상이 영국의 경우는, 그 특유의 정치사의 영향에 따라, 법률에 의한 것보다는 여론에 의한 것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는 애초에 당시 지중해 무역을 장악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진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처음에는 부유한 자들이 각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예술가들을 후원해 줌으로써 문예를 부흥시키는 것이었다면, 그것이 알프스를 넘어 유럽 대륙 한가운데로 퍼졌을 때는 종교전쟁의 양상으로 변해갔습니다. 즉, 신구(新舊) 사이의 격렬한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그 외연이 넓혀진 것이지요.
이 당시의 지도를 보면, 예를 들어, 루터가 활동했던 독일만 보더라도, 신교 지역, 구교 지역, 완충지대 등으로 번잡하게 나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게 수시로 바뀌었어요. 이 말인 즉, 그 속에서 어떤 큰 싸움들이 있었다는 뜻이지요. 독일은 당시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그저 비슷한 언어권의 지역으로서 여러 소국들로 나뉘어 있었지요. 이 말인 즉, 신교를 믿는 영주국에서는 가톨릭주의자들을 배척하거나 처벌했고, 그 반대인 곳은 또 그 반대로 하고 하는 식으로 정신이 없었다는 뜻이지요.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이 경우에 해당하는 희생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스피노자입니다. 그는 말 그대로 종교와 관련해서 이 선호에 기반한 법률 때문에 자신이 태어난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하고, 상대적으로 완충지대인 네덜란드에서 ‘유럽의 개’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다가 죽었지요.
그런데 이처럼 선호에 기반한 법률이 실제적 규범이 되어버리는 건 단지 이와 같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역시 그러하지요. 그리고 이를 ‘관습법’이라는 말로 교묘히 포장을 합니다. 요즘의 사례들을 예로 들자면, 사실 이와 관련된 문제로 현재의 한국사회의 갈등은 매우 심각합니다. 대표적으로, 젠더, 즉 성별과 관련된 문제들이 종종 포퓰리즘의 옷을 입고, 이제는 사법적인 판단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까요.
b. 선호에 기반한 여론에 의한 경우의 사례
위에서 설명드린 바대로 밀이 살던 시기를 기준으로 볼 때, 밀의 설명에 따르면, 선호에 기반한 여론에 의해 실제적인 규범들 형성되는 사례는 대륙 쪽 유럽에 비해 영국 쪽에 해당하는 양상이었습니다. 이는 영국 특유의 정치사 때문인데, 이와 관련된 내용은 지난 (1)과 (2)편에 자세하게 설명을 드렸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다시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밀은 말합니다. 이와 같이 선호에 기반한 여론에 의해 규범이 결정되는 영국적 특질은 개인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정당한 관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정부를 즉 왕권을 대중과 반대되는 이익을 가진 세력으로, 즉 사회계약론적인 관점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일 뿐이라고 조심스럽게 일축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자세한 설명은 (2)편에 해드렸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오늘날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이는 이제 그냥 우리가 사는 모습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굳이 특정한 사례를 들지 않아도, 이 사례의 경우와 관련해서는 누구나 깊이 공감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앞서 인용한 앤디 워홀은 ‘일단 유명해지면, 무슨 짓을 해도 사람들이 열광한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SNS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서로가 서로를 관찰하는 것 같은 사회를 사는 요즘의 경우를 보면,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습니다.
6) 『자유론』의 목적
여기까지 설명한 내용을 헤드라인처럼 키워드로 정리하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선호에 기반한 사회(라는 이름의) 집단의 통제와 개인의 독립성 그리고 그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사례들’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밀은 개인의 자유를 ‘선호’라는 매우 도그마적인 정서와 관련해서 여기까지 정리한 후, 비로소 『자유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힙니다.
‘사회가 법률적 원칙이라는 물리적인 힘 또는 여론이라는 형태의 도덕적인 강압의 방식으로 개인을 강제하고 통제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규율하는 데 필요한 간단한 원칙을 천명하는 것’
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밀이 설명하는 이 ‘간단한 원칙’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한 개인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 중 자신이 아닌 다른 한 개인에게 귀속된 행위의 자유에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개입하는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유일한 근거는 바로 자기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나 다른 사람의 안전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 오직 그 경우뿐이다. 다시 말해, 모든 강제는 그것이 만약 강제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한 수단인 경우에는 결코 용인될 수 없다. 오직 그것이 다른 사람의 안전이라는 목적을 위한 경우에만 정당화될 가능성이 있다.’
⇨ 이 말인 즉, 어떤 행위가 있고, 그게 어떤 한 사람 혹은 대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옳고 바람직한 행위라고 여겨지고 또 실제로 그러한다고 할지라도, 상대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제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즉, 설득하고 제안할 수는 있지만, 최종 결정권은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지요.
또한 반대로, 어떤 한 개인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를 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행위를 막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는 분명하거나 매우 높은 확률의 근거가 없다면, 그 개인이 그런 행위를 하는 것에 제제를 가할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즉, 그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concern 끼칠 가능성이 분명하거나 유의미할 정도로 높을 경우에만 그 행위에 제제 등의 간섭을 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누군가가 술을 즐긴다고 해서 그 사람을 형사 처벌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마약을 즐긴다면 말이 달라지지요. 이와 같은 구별을 두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 행위가 사회에, 정확히 말해서 다른 개인들에게 미칠 해악의 정도와 가능성이지요. 왜냐하면 이와 같은 해harm의 본질은 다른 개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니까요.
7) 자유의 효용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효용utility은 모든 윤리적인 문제들의 궁극적인 근거이다. 그런데 이는 진보하는 존재인 인간의 항구적인 이익permanent interests에 기반을 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효용이어야 한다.’
문장은 간명하지만. 의미는 매우 추상적이지요? 아마도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실 겁니다. 그래서 부연 설명을 좀 해드릴게요.
여기서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효용’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건, 비유하자면, 헌법의 조항 같은 겁니다. 헌법 조항을 보면 결코 구체적으로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건 헌법이 아니에요. 헌법의 문장은 다른 법조항에 비해 간명하면서도 매우 포괄적으로 쓰여 있습니다. 이게 뜻하는 게 무엇일까요? 말하자면, 바운더리를 설정해주는 기준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바운더리 내에서는 온갖 다양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예측 가능한 것도 있고, 그 해결책이 이미 설정된 것도 있고, 전혀 예기치 못한 것도 있지요. 그래서 필요한 게 무엇일까요? 바로 ‘판례’입니다. 이 점이 바로 ‘판례’가 법률에 준하는 사법적 힘을 갖는 까닭일 겁니다.
밀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효용’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진보하는 인간의 항구적인 이익’을 위한 효용이 무엇일지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것이 과연 ‘언제나 늘 이것이다!’라고 고정될 수 있는 것일까요? 대륙 쪽 칸트적인 입장에서는 이게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왜냐하면 규범의 기준을 동기에서 찾고 있고,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보고 있으니까요. 반면, 밀은 분명히 강조하고 있지요. ‘효용은 모든 윤리적인 문제들의 궁극적인 근거이다.’라고 말입니다. 즉, 규범의 기준을 결과에 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밀이 분명히 전제하길, 인간은 ‘진보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즉, 변화가 있다는 것이지요. 변화가 있다는 건, 결과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변화에 따라 효용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소와 같은 경우, 과거 농경 사회에는 매우 소중한, 인간보다 유능한 노동력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음식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소의 효용이 바뀐 것이지요.
이제 밀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효용’이라고 표현한 까닭이 감이 오시지요? 효용은 대원칙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는 가변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 식으로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 하지만 그 대원칙, ‘인간의 항구적인 이익을 위한 효용’이라는 대원칙은 마치, 그 어떤 판례도 헌법의 바운더리를 벗어나면 안 되는 것과 같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와 닿으실 수 있게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난번처럼 공자의 “人, 仁也.”, 즉 ‘인간은 인(仁)하다.’ 다시 말해 사람의 천성은 선하다는 주장과 관련된 이야기, 우물 속에 빠지려는 아이를 목도할 경우를 끌어와서 설명한 알레고리를 이용해서 일종의 사고실험을 풀어볼게요.
구체적으로는 이를 이번 시간에 다루었던 ①선호에 기반한 법률에 의한 규범과 ②선호에 기반한 여론에 의한 규범의 두 경우 각각과 관련지어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①의 경우,
곧 우물 안으로 떨어지려고 하는 아이를 보고 동정심을 가지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미덕으로 선호한다고 해봅시다. 그리고 이를 법률적인 규범으로까지 확대시킨 나라, 즉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시행되는 나라가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 경우, 우물 안으로 떨어지려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것, 즉 아이도 죽고,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것(결과적으로 효용이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겠지요)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구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기 때문에, 무조건 구해야 합니다. 그 결과, 이 경우 최선의 그리고 최대의 효용은 사실 운에 맡겨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선호의 정서는 어떻게 바뀔까요? 인지상정(人之常情), 즉 인간이라면 보통 가질 수 있는 마음이라고 여겼던 동정심을, 이제는 자신의 자유를 침해하는 거추장스러운 감정, 불쾌한 감정으로 느끼게 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까요?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이제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을 할까요? 그것은 아마도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것일 겁니다. 즉,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남을 위험으로부터 구하는 것을 외면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는 위의 6)에서 설명한 밀이 사회적 통제가 개인의 독립성을 통제하는 것과 관련된 ‘간단한 원칙’의 내용에 모순됩니다. 즉, 결과적으로 사회적인 효용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일은 요즘 한국 사회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호의로 곤경에 처한 타인을 도와주었는데, 예를 들어, 떨어뜨린 지갑을 주워 찾아 주었는데, 오히려 도둑으로 내몰려서 고소를 당하거나 하는 무고의 사례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지요.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점점 서로를 도와주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길을 가다 우연히 쓰러져 있는 아이나 여성을 본다든가 해도 그냥 외면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 이제 ②의 경우에서 살펴볼까요?
이 경우에는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하지 않았다고 해서 처벌은 받지 않지만, ‘비난’은 받을 겁니다. 이는 물론 효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비난은 개인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질 않으니까요. 또 오히려 이 비난의 경험을 통해, 그 개인은 앞으로 이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의 자율성, 즉 스스로를 통제하고, 남을 돕기 위해 나설 수 있는 자발성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는 최선의 효용을 낳는 경우로 이어지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바로 ‘선호에 의한 여론’ 그 자체에 있습니다. 특히 요즘과 같이 모든 정보가 초단위로 공유되는 사회에서, 이 힘은 가공할 정도입니다. 해당 개인의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지 편집되고, 재가공, 재생산될 수도 있고, 이를 바탕으로 흔히 말하는 ‘조리 돌림’도 자주 발생합니다. 즉, 아무리 그 사람이 잘못을 했더라도, 그가 받는 비난의 수위는 거의 사법적인 처벌에 준하거나 능가할 만큼 지나치게 높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를 두고 우리는 상식적으로 전혀 ‘정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의란, 정의의 여신인 디케가 들고 있는 양팔 저울과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경우도 역시 사회적 효용은 없습니다. 오히려 마이너스일 수도 있지요.
이처럼 ‘효용’이라는 것은 일괄적으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효용’이 개인의 리버티liberty, 즉 자율성이 수반된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이유입니다. 또한 바로 이 점 때문에 밀이 이 책을 쓴 것일 것이고요.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자신과 사회 전체의 진보와 영속적인 이익을 위한 효용이 어떤 양태이어야 하는지를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개인의 자유이고, 이러한 개개인이 이상적으로 모두 모여 리버티liberty를 행할 때, 그 사회의 효용은 극대화되겠지요. 물론 이는 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이상론’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게 왜 ‘이상론’으로 남을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훨씬 더 큰지를 밀은 뒤이어 이어지는 설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인간의 타고난 본성으로 보고,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디폴트 값default value, 즉 기본값으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또 유추할 수 있는 게 바로, 밀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무한한 신뢰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시간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1장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기에, 다음 시간에는 아마도 1장 마지막 리뷰와 2장의 첫 번째 리뷰가 진행될 것 같아요.
그럼, 전 다음 시간에 찾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