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리뷰 세 번째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리뷰 네 번째 시간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우선 1장의 남은 부분을 마무리하도록 할게요.
그리고 2장 이후부터의 진행 계획에 대해 미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을 보면, 2장부터는 논의가 더 심화되는데다가 논의 주제별로 내용이 더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방식 그대로 한다면 한 회 차에 다룰 분량도 더 늘어나겠지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일단 임시적으로 밀의 『자유론』을 리뷰하는 동안에는 일주일에 두 번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화요일에 2회를 연달아 올리던지, 아니면 화, 수 이렇게 차례로 한 개씩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애초에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는, 작가소개에도 밝힌 것처럼 여러분들에게 좋은 책을 소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시중에도 그런 해설서는 많지만, 제가 보기에는 내용들이 충분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자세하고 충실한 해설을 원하시는 소수의 분들도 분명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이 브런치입니다.
어떤 일이든 목적을 잃으면, 개성도 잃는 법이지요. 그러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진행하도록 할게요. 이 점 깊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8) (개인의) 자유의 고유한 영역
만약 ‘자유liberty’를 논하고,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쟁취하고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면, 설사 그런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지라도 그건 사상누각(沙上樓閣) 같은 것이 될 가능성에 매우 높지요. 그리고 아마도 이 모래성은 ‘선호’라는 이름의 집단적 정서의 광풍으로 인해 언제나 위태위태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허무하게 무너지는 최악의 순간이 올 수도 있는 것이고요.
한편, 무언가의 의미, 특히 그것이 매우 추상적이면서도 또 매우 실천적인 것인 어떤 개념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의미를 규정하는 도메인, 즉 영역을 잘 살펴보고 분명히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밀은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유liberty에 귀속된 고유한 영역들’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인 즉, 이 영역들이 올바르게 보장되지 않으면, 어떤 사회가 자유로워보일지라도, 혹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등을 표방할지라도,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와 같이, 자유로운 척 시늉만 하는 꼴이 된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그 영역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전제적(antecedent)인 영역
첫 번째: “의식”이라는 내면의 영역, 즉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두 번째: 취향과 추구의 자유(표현의 자유)
② 귀결적(consequent)인 영역
세 번째: 결사의 자유
우선 위를 보면 제가 넘버링을 달면서 ‘전제적’, ‘귀결적’이라는 소제목을 달았습니다. 이는 밀이 결사의 자유는 다름 아닌 양심, 사상, 종교의 자유와 취향과 추구의 자유로부터 도출되는 자유의 영역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맞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집회를 하는 이유는 ①번에 정리된 자유들을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지요. 이 말인 즉,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양심과 사상, 종교의 자유는 물론, 취향과 추구의 자유와 같이 자기의 기호(嗜好)에 따라 무언가를 즐기고 그것을 표현하는 자유 역시 온전히 보장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결사의 자유는 최소한의 저항권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이러한 까닭에 결사의 자유에 대한 보장이 헌법적으로 전제(presupposed)가 되어야, 개인의 자유의 고유한 영역, 즉 양심, 사상, 종교,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은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상식과 같은 것이지요.
9) 자유를 통제하는 해악
인류가 자유를 방임 혹은 보장하는 것을 헌법적인 가치로 온전히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아직 채 200년도 안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게 여전히 ‘시늉’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종종 있기는 합니다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지난 시간에 이야기드렸던 ‘포퓰리즘’이지요.
요즘은 비주얼의 시대이지요. 지난번에 포퓰리즘을 이야기하며 끌어왔던 팝아트의 창시자 앤디 워홀도 사람들의 ‘선호’에 의해 소비되는 비주얼이 그들의 인식과 판단 그리고 심지어 자신들의 자유로운 선택 행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고, 이를 이용해서 어떤 면에서는 상당한 사회적 효용을 유도해 낸 사람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만큼 부작용도 상당하지만요. 아무튼 이제 우리는 활자 역시도 하나의 이미지로서 소비되지 않으면, 그것을 읽는 것을 힘들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실제의 경험들이 밀의 통찰력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에 대한 방증(傍證)이라는 건, 지난 회 차 리뷰에서 충분히 설명드렸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밀이 말한 대로 ‘선호에 기반한 여론’이 ‘사회의 규범을 규정’하고 있고, 이는 SNS, Youtube 등의 개별적이고 짤막한 이미지 서사들을 통해 사람들의 자유liberty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 수준에 이르기까지 통제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과연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는 걸까요? 곧 설명하겠지만, 밀에 따르면, 이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통제 욕구는 인간의 타고난 경향성이거든요. 그리고 이는 여러분들도 대체로 공감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오히려 이런 포퓰리즘을 이용해서, 즉, 포퓰리즘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여전히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이성적인 판단이 아닐까요?
워쇼스키 형제의 마스터피스masterpiece인,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가 바로 이런 가능성에 대한 유명한 알레고리이지요. 이 영화의 모티프가 된 것은 바로 “통 속의 뇌Brain in a Vat”라는 유명한 사고실험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시리즈의 1편 도입부를 보면, 각성한 자인 네오(키아누 리브스 分)가 어떻게 각성하게 되는지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수많은 캡슐 속에 마네킨처럼 잠들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갑자기 깨어나서 캡슐을 깨고 나오는 장면이지요. 이 말인 즉, 20-21세기의 인류 중 많은 이들은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행위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들의 선택을 통제하는 매트릭스, 즉 이미 설계된 세계 속에서 단지 그러하다고 착각을 하며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매트릭스> 속에서 묘사되고 있는 이 통제는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지금 설명하고 있는, 밀이 강조한 자유의 영역과 관련해서 영화 속 한 장면을 끌어와 볼까요? 밀은 개인의 자유의 영역 중 두 번째로 ‘취향과 표현의 자유’를 강조했지요.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 모피어스 사단, 즉, 매트릭스에 대항하는 각성자들 중 한 배신자가 밀고를 한 대가로 스테이크를 얻어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그것을 정말 매우 맛있게 먹는데, 먹으면서 이렇게 말을 해요.
“이 맛이 가짜라는 건 알지만, 그렇든지 말든지, 난 정말 맛있다!”
라고 말입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즉, 취향마저도 통제당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왜냐하면 매트릭스 속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맛이 가짜라는 것도 모를 테니까요.
하지만 이들을 통제하는 세력들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요. 즉,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별 의심을 안 하고, 하게 되더라도 금세 ‘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보이는 것들’이 너무도 많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그런 ‘세계정부(?)’ 같은 게 실제로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짜 있냐, 없냐 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있어도 없어도 양상은 늘 똑같을 것이니까요. 즉, 말하자면 철가루를 뿌리고 그 주변에 자석을 두면 순식간에 그 철가루들이 그 자석의 자기장을 중심으로 서로 엉겨 붙듯이, 사람들은 어떤 자극, 즉 자신들의 선호를 유도할 만한 자극이 주어지면, 쉽사리 집단을 이룹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좋아하는 듯합니다. 즉, 일종의 ‘메타-선호’이지요.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자신들의 리버티를 통제하려고 하지요. 마치 프로이트가 생의 의지, 즉 리비도와 죽음에의 충동, 즉, 데스트루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한 것처럼, 사람들은 자유와 통제 모두를 갈구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개인은 결국 몰개성적인 존재가 됩니다. ‘개인인데 몰개성적이다......’라는 말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어떤 역설이 인지되지 않나요? ‘개인’이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수많은 인간들 중 한 명, 즉, ‘all the people’이라는 말을 ‘everyone’으로 바꾼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이 양자 중 우리는 스스로를 첫 번째 경우로 인식하고, 또 그렇게 인식되기를 원하지요. 즉, ‘존중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선호에 의한 여론’이 강력한 헤게모니를 가진 사회에서 개인은 이 중 후자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건, 바로 ‘선호’라는 집단적인 정서에 자신의 자율적인 선택권의 기준의 범위를 지나치게 할당하는 개인들 자신이지요.
다시 영화 <매트릭스>의 알레고리에 빗대어 볼까요? 이 영화를 보면, 네오를 쫓는 그 검은 선글라스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아마도 이 매트릭스 시스템의 중간 관리자쯤 될 법한 남자가 네오를 부를 때, 계속 ‘네오’라고 부르지 않고, ‘미스터 앤더슨’이라고 부르지요.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네오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 그의 리버티liberty를 무시하는 일종의 상징적인 언도(言渡)처럼 보입니다. 즉, “넌 그저 ‘000씨’에 불과해. 넌 그저 수많은 퍼블릭 중의 한 명일뿐이야.”라고 말입니다.
한편, 과거에는 이를 통제하는 힘이 표면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고, 종교 등의 강력한 헤게모니를 바탕으로 정치적, 도덕적 명분을 얻었지요. 적어도 (밀이 소속된) 유럽의 역사를 기준으로 볼 때, 르네상스 이후로는 종교전쟁이라는 양태로 개인의 자유와 통제 사이 격렬한 싸움이 지속되어 왔습니다. 당장 생각이 나는 대표적인 예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있네요. 흔히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유명한 말로 상징되는 이 에피소드는, 종교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미약하지만 쉽게 꺾이지 않는 개인의 신념(사상)과 이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나타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 같은 소설을 보면, 주인공인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은 프리메이슨이라는 비밀결사 집단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이작 뉴턴 등도 소속되어 있었다고 말하지요. 그 사실 여부는 일단 차치하고, 이 역시 개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와 그것에 대한 정치적 지배자의 통제와 관련이 이야기일 겁니다.
이처럼 개인의 자유에 대한 통제의 역사는 매우 깊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한 해악과 관련해서 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프리메이슨 엠블럼>
① 자유 통제의 역사
a. (밀이 살던 시대를 기준으로) 이전까지의 경우
모든 시민을 육체적·정신적으로 훈육시키는 것이 국가의 이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김. 법이라는 형태의 옷을 입은 공권력으로 개인에 대한 규율이 철학적 그리고 윤리적으로 정당화됨,
⇨ 유럽의 역사를 기준으로 볼 때, 여기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교회법’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현재 말 그대로 아비규환(阿鼻叫喚) 상태에 놓인 이란과 같이 매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만, 과거의 유럽은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b. (밀이 살던 시대를 기준으로) 현재의 경우
정치공동체가 확장되었고, 교회와 정치가 분리됨. 그 결과, (교회)법에 의한 개인의 통제는 과거에 비해 약해졌지만, 반대로 여론에 의한 개인을 향한 압력은 과거에 비해 더욱 심해짐.
⇨ 이건 오늘날의 모습과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밑줄 친 부분이 그러한데, 밀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에도 이미 이게 상당히 심각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 같아요^^;
② 인간의 통제 욕구: 타고난 경향성
권력자이든 동료 시민이든 간에 자신의 생각과 취향을 다른 이들에게 하나의 행위 규범으로 강제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성향임.
따라서 결코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대로 방임해버리면, 점점 가공할만한 힘을 얻을 수 있는 해악임.
⇨ 일단 이 말에 깊이 공감하실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저 역시 그렇고요.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점 한 가지는, 밀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무한한 신뢰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바로 자유와 관련된 모든 도덕의 출발점, 디폴트 값, 즉 기본값으로 보고 있습니다. 철학적인 방식으로 보자면, ‘왜 인간은 남을 통제하고자 하는가?’라고 더 묻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저 이게 이미 주어진 판이라고 보고, 여기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는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예비적인 사항들에 대한 글에서 설명을 드렸듯이, 도덕철학으로서의 공리주의가 시작된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presuppositions) 중 하나입니다. 즉, 지식의 불완전성(경험주의)과 인간 본성은 선하지 않다(성악설, 혹은 백지설)이라는 전제적 믿음이 없었더라면, 공리주의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식 능력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회의적인 혹은 잠정적인tentative 시각이 견지되지 않으면, 도덕적 판단의 근거를 결과적인 효용에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니까요.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저의 의견을 짤막하게 이야기하자면, 인생을 살다 보니, 사람이 온전히 선하다고 믿는 것보다는, 사람은 이기적이고 악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믿는 것이, 그리고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지식이 다 사실인 것은 아니다 라고 믿는 것이 도덕적 판단을 포함한 많은 것을 판단하는 데 있어 더 현명한 기준을 제시해주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렇게 생각을 하면, 나의 기대에서 비롯된, 즉 상황에 따라 내가 믿고 싶은 바대로 믿고자 하는 충동에서 비롯되는 임의적이고arbitrary 모호한 전제들이 그렇지 않은 것들로부터 상당 부분 추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옥캄의 면도날ockam’s blade’과 같은 것이지요. 현인이 괜히 현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옥캄의 이 방식을 한번 스스로의 판단에 적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훈련이 반복이 되면, 철학이라는 게 탁상공론이 아닌, 얼마나 실천적인 것이지를, 그리고 얼마나 큰 효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이 효용은 여러분들의 리버티 liberty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리버티는 자율적인 것이기에, 언제나 꾸준한 노력과 반성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밀이 강조한 바대로 말이지요.
한편, 인간의 이런 경향성이 기본 값이라면, 개인의 리버티는 궁극적으로 결코 보장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일까요? ‘그냥 이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우선 이런 식의 태도는 리버티의 의미와 완전히 모순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 혹시라도 ‘이런 자연적 경향성 속에서 자유를 찾는다?’와 같은 생각을 대안적인 방식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그저 말이 안 되는 상상에 불과하거나, 고도의 통제술에 의한 기만에 불과할 것입니다.
밀 역시 이 자연스러운 경향성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규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다음과 같이 역설합니다.
‘인간의 타고난 통제 욕구야말로 오히려 사상의 자유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된다. 또한 이 자유의 영역을 실천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토론의 자유(언론과 출판의 자유)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번 시간은 이 정도로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1장이 다 끝났네요. 그리고 2장부터 다룰 내용은 이미 암시가 된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토론의 자유’에 관한 내용입니다. 일단 밀이 이 논제와 관련해서 무척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기에 조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다음 시간부터는 논의가 더욱 심화되기 때문에, 회당 분량을 좀 더 줄이고 글을 올리는 횟수를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대로 매주 두 번씩 올리도록 할게요. 그럼, 다음 주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