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자유론』리뷰 시리즈 (6)

제2장 첫 번째 ②

by Juncus

방금 올려드린 제2장 첫 번째 part 1 리뷰에 이어 part 2 리뷰를 바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 억압하고자 하는 (개인의) 의견이 옳은 경우


밀은 a의 경우를 다음과 같이 더욱 면밀하게 분석합니다.


① 그 의견을 억압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 의견을 잘못되었다고 확신하는 것은 그들의 이 확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전제할 때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임. 하지만 이 전제를 보장할 근거는 전혀 없음.


⇨ 이는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회의를 지식을 위한 기본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경험주의’를 떠올려 보시면 납득이 가실 겁니다. 계속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인간 본성에 대한 잠정적인 태도와 경험론이라는 인식론적인 태도는 ‘공리주의’의 기본 모태입니다.


②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속해 있는 ‘세계’는 완벽하게 옳고 절대로 틀릴 수가 없다는 암묵적인 믿음 위에서 그 세계가 지닌 의견들에 의지함.


⇨ 이와 관련된 사례로는 대표적으로 종교적인 도그마를 들 수 있을 겁니다. 9.11 사태와 같이 소위, 성전(聖戰)이라는 것을 위해 불특정다수를 향해 하이재킹high-jacking 등의 테러를 하는 경우를 우리는 여전히 종종 봅니다. 또한 자신이 속한 종교 집단의 믿음 때문에 가족을 죽이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지는 일들 중 하나이지요. 그렇다면 이들이 과연 냉혹한 사이코패스들이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닐 겁니다. 애초에 사이코패스가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믿을 리가 없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 이라는 태도 자체에 전혀 관심도 없고, 오히려 이를 비웃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대상으로만 볼 터이니까요. 아마도 저와 같은 광신도들도 일상에서는 그냥 평범한 부모, 아들이자 딸, 친구였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저런 극단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믿고 의지하고 있는 세계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즉 ②에서 밀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경향성이 어떤 이유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강화된 케이스인 것일 겁니다.


③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일수록 ②와 같은 모습을 보임.


⇨ 2008년 인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연쇄테러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호텔 뭄바이>를 보면, 이와 관련된 사례가 하나 나옵니다. 영화를 보면, 그 끔찍한 테러를 일으킨 사람들은 다소 호인처럼 보이는 청년들이지요. 그리고 정작 주모자는 전면에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로만 그 존재를 드러낼 뿐이지요. 그 청년들이 패닉에 빠져, 자신들의 행위에 두려움을 느끼고, 헷갈려 할 때마다 그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그들을 달래듯이 명령을 합니다. 마치 무슨 신이 인간에게 커버넌트를 약속하듯이 말이지요. 그러면 또 공포감에 발작 일보 직전이었던 그 청년들은 다시 조금 차분해져서 어떻게 해서든지 정신을 부여잡고 계속 사람들을 죽이고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이런 부분들이 이 영화의 다른 어느 장면들보다 사실적이라고 느껴졌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떠실지 궁금하네요.


시대 역시 개인과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는 것은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것임.


⇨ 자명한 것임에도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막상 눈앞에 펼쳐지는 것에 대해서는 맹인(盲人)이 됩니다. 이 역시 인간의 경향성이겠지요. 하지만 지나간 역사가 이를 ‘증명’해줍니다. 이는 여러분들도 대부분 동의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 1)에 제시된 밀의 의견에 대해 제시될 수 있는 반론


밀은 1)에 제시한 자신의 의견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반론들 역시 검토하고, 이에 대해 재반박을 합니다. 이번 장이 길어지는 이유는 바로 밀의 이런 성실함(sincerity) 때문이지요. 하지만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의견을 제시할 때는 밀처럼 해야 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밀이 결코 단순히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반박을 위한 반박’에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발견해야 할 모습은 밀이 몸소 보여주는 리버티liberty의 형식입니다. 그는 ‘자유’에 대해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올바른 토론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의견의 제시-반대의 의견의 제시와 경청-반대 의견에 대한 재반론’ 식으로 사상의 자유가 표현되는 진지한 형식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 우선 1)에 제시된 밀의 의견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전형적인 반론의 양상을 살펴볼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반론 ① 공권력이 그것의 판단과 책임에 따라 행하는 모든 행위들 중에서, 틀린 의견이 전파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야말로, 공권력은 절대로 틀릴 수가 없다는 전제를 가장 강력하게 천명하는 것임.

반론 ② 입법부나 행정부가 국가에 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은 그들이 오류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틀릴 수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맡겨진 의무를 양심과 확신에 따라 행하는 것일 뿐임.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의 의견에 의거하여 행동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모든 의무는 제대로 이행될 수 없고, 그 결과 시민의 모든 이익은 방치되어 버릴 것임.


⇨ 여러분들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반론 ①의 경우는, 근본적으로 개인의 리버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따라서 토론의 필요성 자체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지요. 이런 태도의 근저에는 항상 자신들의 무오류에 대한 맹목적인 확신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런 확신의 근저에는 과대망상적인 자의식 혹은 집단의식, 다른 말로 하자면 선민의식이 깔려 있지요. 이 선민의식은 ‘신의 대리자’, ‘선한 약자’ 등등, 특정 유형의 옷을 입은 양태로 역사와 현실 속에서 늘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유럽을 기준으로 보면 오랜 세월 동안 ‘종교’가 그러했겠지요. 그리고 여전히 이런 ‘신정(神政) 프레임’은 강력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이비 종교 집단 같은 건 이미 없어졌을 것이니까요. 그리고 여기서 이 ‘신(神)’을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바꾸기만 한다면, 이 프레임의 외연은 매우 넓어집니다.


반론 ②는 오류를 인정하는 척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실은 오류 여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이시지 않나요? 이 경우에는 좀 위선적인 게 사상과 토론의 자유를 인정하는 척하지만, 그게 결국에는 그저 요식(要式)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어차피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게 분명해 보이니까요. 밀이 이번 장을 전개하며 보여주는 성실함, 즉 sincerity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태도이지요. ‘sincerity’란 본래 ‘그런 척하는 게 없다’라는 뜻이니까요. 결국, 반론 ①이 ‘우리는 절대 틀릴 리가 없으니까, 우리말 대로 해!’ 라면, 반론 ②는 ‘우리가 틀리든지 말든지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 우리말 대로 해!’ 같아 보입니다. 즉 ‘도긴개긴’이라는 뜻이지요.


(2) (1)에 제시된 반론에 대한 밀의 재반론


① ‘반론 ①’에 대한 밀의 재반론: 인간이 하는 판단과 행동에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을 있을 수 없다. 아무리 탁월한 현인일지라도 언제나 옳은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다.


⇨ 이와 같은 밀의 믿음의 근저에는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인간의 본성과 지식에 관한 잠정적인 태도가 깔려 있습니다. 어떤 판단과 행위의 완전함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 조건으로 완전무결한 본성과 앎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세상 그 어떤 인간도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스스로가 그렇다고 단언을 한다면, 그 행위 자체가 그 사람이 매우 미흡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일단 적어도 매우 성급하고 오만하다는 것 자체는 스스로 자인하는 꼴이니까요.


밀은 이 경우의 예로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들고 있습니다. 로마 제정 전성기의 오현제(五賢帝) 중 마지막 황제로서, 그가 죽고 나서 그동안 위태하게 잠재되어 있었던 로마 몰락의 징후는 본격적으로 현상화되기 시작하지요. 리들리 스콧의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고결하고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장군 막시무스(러셀 크로우 分)에게 황위를 물려주려고 하다가 칼리쿨라 급의 미치광이 아들(호아킨 피닉스 分)에게 시해당하는 황제가 바로 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입니다. 물론 영화 속 이 부분은 허구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리들리 스콧 영화 <글래디에이터> 속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또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이라는 유명한 철학적 수상록(隨想錄)을 남긴 스토아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애민정신, 이성적 판단, 중용, 훌륭한 지도자로서 필요한 역량 등 덕성과 능력, 인격적인 측면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갖춘, 매우 탁월한 인물이지만, 아무리 이런 그라고 해서 늘 흠결 없는 판단만을 내린 것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밀은 그 예로서, 로마 황제로서 제위하고 있는 동안 그가 단호하게 행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들고 있지요. 『자유론』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사상과 종교, 신념의 자유’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는 분명 개인의 양심에 따른 자유를 가혹하게 통제한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입니다. 물론, 당시의 시대상을 보았을 때, ‘리버티’라는 개념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관념은 아직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는 곧, 밀이 강조한 ‘시대 역시 개인과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라는 것의 방증일 수도 있지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또한 이렇게 변화가 있는 게 곧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면, 이 변화 자체가 불완전함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인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지지난 회 차에서 인용했던 것처럼, 밀은 강조합니다. ‘인간은 진보하는 존재’라고 말입니다. 즉, 불완전함을 디폴트값으로 가지고 있지만, 늘 조금씩 나아질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뜻이겠지요.


'반론 ②'에 대한 밀의 재반론: 모든 주의를 기울여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올바른 의견을 만들어내고, 그럼에도 그 의견이 올바르다는 것이 아주 확실하게 증명된 것이 아닌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의견을 절대로 강제해서는 안 되는 것이 곧 ‘정부와 개인의 의무’이다.


⇨ 이에 대한 설명은 밀이 1장에서 『자유론』의 목적에 대해 설명을 하며 썼던 말을 재인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즉,



‘한 개인이나 사회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 중 자신이 아닌 다른 한 개인에게 귀속된 행위의 자유에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개입하는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유일한 근거는 바로 자기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나 다른 사람의 안전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 오직 그 경우뿐이며, 이는 언제나 진보하는 존재인 인간의 항구적인 이익permanent interests을 목적으로 하는 가장 넓은 의미의 효용에 부합해야 한다.’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제기될 수 있는 반박 두 가지에 대해 위와 같이 재반박을 하면서 밀은 다음과 같은 부연을 덧붙입니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없지만. 인간의 삶의 목적들을 이루는 데 필요한 행동들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확실성만큼은 충분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지닌, 스스로의 잘못을 개선해나가는 특질,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특질 덕분에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행위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우세한 것이 된 것이다.’


⇨ 밀의 이 의견에는 누구나 동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진화해 온 맥락을 볼 때, 이는 분명 사실에 부합하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밀은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즉, 인류를 진보하게 만든 인류 자신의 이러한 특질을 가장 유효하게, 즉 가장 큰 효용을 낳을 수 있는 방향으로 실천하는 방법은 바로, 토론경험을 통해 인류가 스스로를 교정하고 개선시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인류가 스스로를 교정하고 개선시켜 나가고자 하는 의지와 그 능력,’ 그것이 바로 자율로서의 자유, 즉 ‘리버티liberty’일 겁니다.


이러한 이유로 밀의 다음과 같은 역설은 매우 호소력 있게 와 닿습니다.


어떤 의견을 반박할 모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견이 반박될 만한 근거나 사실 등이 발견되지 않아 (그것을) 올바른 것으로 추정하는 것과 그 의견을 처음부터 올바른 것으로 무조건 전제를 하고, 반박할 기회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우이다.’


⇨ 이는 밀만의 의견이 아닌, 그냥 그 자체로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이 굳이 이렇게 강조를 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저 두 경우를 너무도 쉽게 혼동해서, 스스로의 자율이 타율적으로 통제되도록 방치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개인의 리버티를 통제하고자 하는 사람들 역시 이러한 혼동을 역으로 교묘하게 이용함으로써 자신들을 합리화하지요. 이는 바로 위에 제시된 밀의 의견에 대한 두 가지 반박에서 그대로 발견되는 양태이기도 합니다.



이번 주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자유론』을 직접 보면, 이번 장이 다소 지루할 수 있는 포맷인데다가 다소 추상적이라, 제 나름대로 흥미를 끌 만한 사례들을 부연으로 달아 설명을 드렸는데, 어떠셨을지 모르겠네요.


그럼, 이번 리뷰는 이 정도로 마치고, 다음 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갈게요. 총총.......


작가의 이전글존 스튜어트 밀『자유론』리뷰 시리즈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