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자유론』리뷰 시리즈 (7)

제2장 두 번째 part 1

by Juncus

지난주에 이어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2장에 대한 리뷰 및 설명을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부터 다루기 시작한 내용은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 대한 것이었지요. 구체적으로는 이 자유들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면서, 이를 ‘억압하고자 하는 개인의 의견이 옳은 경우’와 반대로 ‘억압하고자 하는 개인의 의견이 틀린 경우’로 나누어서 살펴보겠다는 밀의 예비적 설명을 우선 소개하고 이에 대해 부연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이 두 경우 중 첫 번째 것, 즉 ‘억압하고자 하는 개인의 의견이 옳은 것을 경우’에 대한 설명을 중간쯤까지 진행하다가 끝이 났지요. 즉, 이 경우와 관련한 밀의 비판을 먼저 설명한 후, 이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전통적인 반론의 두 양상들을 소개하고 부연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 반론들에 대한 밀의 재반론까지 설명을 했었지요.


이번 시간에는 ‘억압하고자 하는 개인의 의견이 옳은 것을 경우’에 관해 『자유론』에서 다루고 있는 나머지 논의에 대한 소개 및 설명을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바로 시작을 해볼게요.


(3) 토론의 필요성


① 인간의 판단이 지니는 모든 힘과 가치는 그 판단이 틀렸을 때에 바로잡을 수 있다는 데 달려 있다. 또한 그 판단을 바로잡을 수 있는 수단이 언제나 마련되어 있을 때만, (그 판단에 대한) 신뢰가 생겨날 수 있다.


⇨ 밀의 이 말은 제가 개인적으로 『자유론』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는 지성인이 가질 수 있는 양심과 품위가 그대로 녹아 있는 태도로 보입니다. 인간은 쉽게 오만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오만해지는 근거는 보통은 자기 자신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에 의해 좌우되지요. 예를 들어, 19세기 실학자 박지원의 『양반전』을 보면, 양반의 옷을 입고, 양반의 갓을 쓰고 살던 ‘양반’이 돈이 없어서 상놈의 옷을 입게 되자, 그 기세등등하던 태도가 어느 사이에 전연 사라지고, 다른 양반 앞에서 그를 ‘나으리’라고 부르며, 몸을 조아리며 굽신 거리는 모습이 매우 신랄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게 매우 풍자적인 이유는 매우 사실적이어서 그런 것이지요. 실제로 법관의 옷이나, 고위 종교 지도자의 옷을 입고 있으면, 대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 것은 단지 그들이 오만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입은 그 옷 때문에 그들의 의견이나 판단의 정당성이 강화되기 때문인데, 그 정당화에 근거는 그들이 입은 옷을 보고, 그들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기인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근거들은 근본적으로 근거가 될 수 없지요.


경험론이 지니는 가치는 인간의 지식과 판단 능력을 평가 절하하는 것이 아닌, 그것의 정당성과 신뢰를 높이기 위해 매우 정직한 스탠스를 견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꾸준한 실천, 즉 오류를 발견하기 위해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지식의 축소가 아닌, 오히려 지식의 확장을 낳아 왔다는 것은 역사가 이미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뉴턴의 역학이 아인슈타인에 의해 그 오류를 지적당했을 때, 이를 그 오랜 믿음과 헤게모니로 억압하려고 했다면, 과학의 발전은 거기서 멈췄을 겁니다.


② 인간이 자신의 능력의 범위 안에서 어떤 문제의 전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온갖 다양한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고, 온갖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그 문제를 바라보는 각양각색의 방식들을 깊이 연구해보는 것이다.

③ 끊임없는 의견 교환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수정해 나갈 때에만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한 의견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이를 부단히 실천하고 확고한 습관으로 정착시키는 것만이 신뢰할 수 있는 의견과 판단을 생산해내는 유일하게 안정적인 토대이다.


⇨ ②와 ③에 대해 감정적으로는 못마땅해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을지 몰라도, 이 말에 대해 온전히 논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매우 교과서적인 말이지요. 즉 일종의 자유에 대한 초석과 같은 믿음이지만, 이 믿음을 견지하고 실천해 나가는 것은 21세기 현재에도 생각만큼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밀도 이 당연한 믿음의 정당성을 어떻게 해서든지 실천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자유론』이라는 책을 썼겠지요.^^; 왜냐하면 밀이 인간 본성과 관련해서 디폴트값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체념한 그 경향성, 즉 본능적으로 무리를 이루고, 편을 가르며, 이 무리의 논리로 ‘다름’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성향은 거의 생존 욕구에 비할 만큼 강력하니까요.


(4) 토론의 자유를 제한하고자 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근거


① (교리의) 옳고 그름 (-> 이 말은 곧 절대적 옳고 그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밀은 다음과 같은 부연을 답니다. ‘자유로운 토론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특정한 교리(신념)에 대해서는 그 확실성을 전혀 의심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금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밀이 당시에 관찰한 사람들의 이런 모습은 21세기 현재에도 별다를 것 없이 쉽게 경험하게 되는 모습들입니다.


② 유용성


『자유론』에서 밀은 이 ‘유용성’이라는 것을 토론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근거로 들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회의주의의 시대에 개인의 의견이 대중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근거는 그 의견이 반드시 옳은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의견 하나하나가 사회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부 역시 그 고유의 의견을 가질 권리와 그에 따라 행동할 필요성이 있고, 이는 정부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의견이 명확히 틀리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여론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경우에는 그 의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정당하고, 또한 반드시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어떤가요? 여러분들의 이들의 이 의견에 동의를 하시나요? 하지만 일단 동의 여부를 결정하기 이전에, 이 말을 찬찬히 살펴보면 어떤 교묘한 기만술이 보이지 않나요?


이제부터 토론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된 이 두 의견들에 대한 제 나름의 부연 설명을 조금 해보겠습니다.


⇨ 먼저 지난주에 다루었던, 억압하고자 하는 개인의 의견이 옳은 경우, 그럼에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게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들이 그 근거로 내세운 의견들을 다시 한 번 재인용해보겠습니다.


‘① 공권력이 그것의 판단과 책임에 따라 행하는 모든 행위들 중에서, 틀린 의견이 전파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야말로, 공권력은 절대로 틀릴 수가 없다는 전제를 가장 강력하게 천명하는 것임.’

‘② 입법부나 행정부가 국가에 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은 그들이 오류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틀릴 수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맡겨진 의무를 양심과 확신에 따라 행하는 것일 뿐임.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의 의견에 의거하여 행동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모든 의무는 제대로 이행될 수 없고, 그 결과 시민의 모든 이익은 방치되어 버릴 것임.’

자, 그럼 이제 이 두 의견들과 위에서 소개한 토론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한 두 근거, 즉 ‘교리의 옳고 그름’과 ‘유용성’을 천천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뭐가 보이시나요? 결국에는 같은 말들의 반복이라는 게 보이시나요? 즉, ①과 ②의 내용 각각은 ‘교리의 옳고 그름’과 ‘유용성’ 각각에 대한 패러프레이징paraphrasing, 즉 같은 말을 단지 표현을 달리 한 것뿐이라는 게 보이실 겁니다.


또한 이는 『자유론』에서 궁극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개인의 자유’와 그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입장의 두 양태, 즉, ‘법률’과 ‘선호에 기반한 여론’에 대한 패러프레이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법률’과 ‘선호에 기반한 여론’이라는 두 양태는 겉으로 드러난 옷만 조금씩 달리 하고 있을 뿐, 인간 사회에서 매우 뿌리 깊게 박힌 성향이라는 사실이지요.


제가 보기에 이 두 양태는 시대에 따라 어느 것이 주도권을 잡아 왔느냐의 여부만 다를 뿐입니다. 즉, 사이가 서로 좋지만은 않은 경제 공동체로서의 형제처럼, 한 사회에 끼치는 강한 권력 혹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서로 번갈아 가며 과점(寡占)하고 있는 것이지요. 즉, 다시 말하지만, ‘도긴개긴’이라는 뜻입니다.


밀이 활동하던 당시를 고려하며 이를 한번 곰곰이 살펴볼까요? 그러면 이 주장들, 특히 ‘유용성’을 근거로 제시하는 주장이 얼마나 ‘눈 가리고 아웅’을 잘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위에서 토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근거로서 ‘유용성’을 제시하는 의견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이런 말로 시작하고 있지요.


‘회의주의의 시대에 개인의 의견이 대중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근거는 그 의견이 반드시 옳은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의견 하나하나가 사회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별 생각 없이 표면적으로 받아들이면, 이들이 하는 주장과 밀이 하는 주장은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상당히 위선적인 기만술일 뿐이지요.


우선 저 의견을 주장하는 입장이 왜 굳이 ‘회의주의의 시대’라는 말을 쓰고 있는지를 곰곰이 한번 생각을 해보면, 이는 자신들은 선민의식에 빠진 교리주의자, 즉 유럽을 기준으로 보면, 구태의연한 ‘교회 권력’과는 다르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자신들은 스스로가 언제들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과 잠정적인 지식에의 확신을 가진, 교양 있는 자들이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를 위해 그들은 또 한 번의 위선적인 기만을 가장(假裝)합니다. 그리고 이 가장은 공리주의자로서 밀이 볼 때에는 다소 불쾌했을 것 같아요. 만약 제가 밀이라면 분명 기가 차고 불쾌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가장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유용성’ 즉, ‘효용’이라는 공리주의적 가치 개념을 이용해서, ‘자신들은 개인의 자유를 기본적으로 존중하지만, 유용성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토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통제 욕구를 도덕적으로 합리화를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하나가 더 있지요.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정부(政府)의 의견이 명확히 틀리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여론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경우에는 그 의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정당하고, 또한 반드시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이 말은 곧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이유는 사람들 자신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꼴이지요. 이와 관련해서는 실제의 사례 하나를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좀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관방장관이었던 선전·선동의 달인, 요제프 괴벨스 역시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지요.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을 다룬 독일 영화 『Der Untergang(Downfall)』을 보면, 괴벨스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의 장면 같고, 사실 영화의 장면이지만, 실제로 괴벨스가 태연히 저렇게 말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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