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두 번째 part 2
(5) (4)에 제시된 의견들에 대한 밀의 반박
① ‘(교리의) 옳고 그름’을 근거로 제시하는 입장들에 대한 밀의 반박
‘어떤 사람이 자신은 절대로 틀릴 수가 없다고 전제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교리(혹은 신념)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교리가 옳다고 자신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의적 결정에 절대성을 부여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어떠한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으려 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뿐이다.’
⇨ 차분한 어조이지만, 말 그대로 촌철살인(寸鐵殺人) 같은 지적이지요. 이 말을 논박하기 위해서는 그 상대는 자신이 믿는 교리가 완전히 옳다는 것을 어떻게든 증명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이러한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요. 하지만 인간의 한계 내에서 이는 절대 증명될 수 없는 것이기에, 계속 이 의견을 근거로 내세운다면 결국 그는 자신이 밀이 지적한 이와 같은 태도를 지니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꼴 밖에는 안 되게 됩니다. 즉, 그들이 기껏해야 내세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는 ‘내가 그렇게 믿으니까!’ 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② ‘유용성’을 근거로 제시하는 입장들에 대한 밀의 반박
‘유용성을 토론을 제한할 수 있는 근거로 드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옳고 그름에 대해 절대 틀릴 수 없는 판단을 내리는 재판관으로 전제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눈가림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생각 역시 또 다른 형태로 자신들은 절대 틀릴 리가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의견이 유용한지 여부의 문제는 그 자체가 또 다른 의견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는 토론의 대상이며, 반드시 토론이 되어야 할 문제이다.’
⇨ 여기서 드러나는 것 ‘효용’에 대한 정직함sincerity의 유무입니다. 질적 공리주의자인 밀은 ‘효용’을 이 책의 1장에서 이미 분명히 밝혔다시피, ‘모든 윤리적 문제의 궁극적인 근거’로 보고 있지요. 그리고 겉보기에는 이 ‘유용성’이라는 것을 토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근거로 두는 입장들 역시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밀의 지적대로 ‘눈가림’일 뿐입니다. 오히려 질이 더 안 좋은 것은, 위선을 가장하며 교묘한 궤변을 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즉, 같은 개념을 가지고 밀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해하시기 쉽도록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볼까요?
먼저, 밀은 ‘모든 윤리적 문제의 궁극적 근거’인 ‘효용’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인류의 항구적인 진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반면, 저 입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요. ‘모든 윤리적 문제의 궁극적 근거’인 ‘효용’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 이제 보이시지요? ‘효용’이라는 같은 개념을 가지고 밀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는 단순한 궤변이라고 과소평가할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이들은 우선 공리주의의 개념과 그 논리적인 틀을 그대로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모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논리를 교묘하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려 가는데, 논리적인 틀로만 보면 이를 논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공리주의의 설득력은 연역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효용’이라는 것은 결과적인 것이지요. 경험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을 논리로만 논박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둘째는,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사람들의 동의를 끌어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적 효용을 사람들의 의견을 통해 판단하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지요. 문제는 사람들이 그 효용이 뭔지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여론을 이용한다는 점입니다. 올바른 순서는 사람들이 우선 그 효용에 대해 잘 알고, 스스로 반성을 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토론이라는 과정이지요. 그리고 이 토론을 통해 여론은 형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저들이 주장하는 것은 토론을 통제하기 위해 여론을 근거로 든다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순서가 뒤바뀐 것을 넘어 그 자체가 궤변이고 모순인 것입니다.
이로 인한 폐해는 생각보다 매우 파괴적입니다. 역사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볼까요?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인류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몇몇의 문명들 중,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처럼 절정에 이른 순간에, 가장 극적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문명은 바로 고대 그리스 문명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허무한 몰락의 저변에는 ‘소피스트들’, 즉 교묘한 궤변론자들의 방종과 그들의 지지기반인 민주정의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사례들을 밀 역시 이 책에서 종종 인용하고 있지요. 리뷰를 진행하다가 그런 부분이 나오게 되면, 상황을 봐가며 더 자세하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유용성’을 위해 토론의 자유를 제한하고자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 밀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강조합니다.
‘어떤 의견이 유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의견이 반드시 옳다는 게 전제되어야 한다. 옳음과 그름의 문제와 효용성의 문제는 서로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부단한 토론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6) 여론과 법률 중 ‘법률’을 통해 자유를 말살한 역사적 사례들
여기까지 잘 따라오셨으면, 아마도 이 논의가 처음부터 매우 일관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셨을 겁니다. 즉, 큰 틀에서 볼 때, 개인의 자유와 이를 통제하고자 하는 입장이 취하는 두 양태들(즉, 법률적 방식과 여론에 의한 방식) 사이의 문제에 대한 논의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쯤에서 밀은 이 두 방식 중 ‘법률’을 통해 자유를 말살한 역사적 사례들을 한번 짚어보고 지나갑니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는 그 사례들은 바로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의 처형’, 그리고 지난 시간에도 잠시 언급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독교 박해’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여러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가장 유명한 것들 중 하나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지요. 이 말을 남기고 그는 아테네를 탈출하자고 스승을 설득하는 제자들의 애원을 뒤로 하고 독약을 마시고 죽습니다. 이 광경을 그대로 목격한 젊은 시절의 플라톤은 엄청난 충격을 먹고,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가, 결국에는 ‘철인(哲人) 통치’라는 다소 극단적인 신념까지 갖게 되어 버립니다.
당시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이라는 극형이 내려지게 된 죄목은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해로운 생각을 심어준다’ 라는 것이었지요. 이는 곧 개인의 사상과 신념의 자유를 통제하고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법의 이름으로 죽인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언제나 늘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번쯤 다 보셨을,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유명한 영화 <젊은 시인의 사회> 역시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지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독교 박해’ 역시 개인의 신념의 자유를 권력을 가진 집단이 통제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리고 이는 마치 일벌백계(一罰百戒) 마냥, 모두가 볼 수 있는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못이 박힌 채로 죽어가거나, 모두가 구경하고 있는 원형 경기장에서 산 채로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것과 같이, 매우 즉물적인 형태로 잔인하기 그지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새뮤얼 존슨>
(7) ‘법률’을 통해 개인의 자유를 말살한 역사적 사례들에 대한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의 의견
“종교적 진리가 확증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순교를 통한 것이다. 통치자는 자기가 생각한 것을 시행할 권한이 있고, 진리를 전파하는 자는 박해를 당할 권한이 있다.”
새뮤얼 존슨은 18세기 초·중엽에 활동한 유명한 시인이자 평론가입니다. 말하자면,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인데,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보면, 호킹은 뉴턴의 절대 공간 개념에 대한 설명을 하는 중에, 새뮤얼 존슨과 버클리 주교 사이에 있었던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를 합니다.
당시 뉴턴은 절대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는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믿었던 그의 신념과 상충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매우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발견한 법칙이 가리키는 것과는 반대로 절대 공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는데, 그의 이런 모순되는 태도를 비판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바로 그 유명한 버클리 주교였다고 합니다. 버클리는 주교임과 동시에 대표적인 경험주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철학적으로 말해 ‘연장성’이 있는 건, 즉 모든 물질적인 대상이나 공간, 시간 등은 그저 인간의 의식이 경험적으로 만들어낸 환상에 가깝다고 여긴, 매우 철저한 회의론자였어요. 그런데 버클리와 대화를 하다가 그의 이러한 생각을 들은 새뮤얼 존슨은 더는 참지 못하고 화를 버럭 내면서, “나는 그것을 이렇게 반박하지!” 하고 소리를 지르며, 옆에 있던 큰 바위를 발로 찼다고 합니다.
저는 새뮤얼 존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이 일화를 통해 분명히 추측할 수 있는 건, 새뮤얼 존슨은 경험론자가 아니라는 점이지요.
그래서인지 그는 ‘옳고 그름의 절대성이나 지식의 확실성’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와 같은 말은 할 수 없겠지요.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 신화』를 보면, 까뮈가 쥘 르키에라는 19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에 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인용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르키에라는 사람은 자유의지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이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대양(大洋)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헤엄을 치다가 결국에는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르키에의 경우와 종교적 신념을 위해 기꺼이 순교를 하는 사람의 경우는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대상만 다를 뿐 완전히 동일합니다. 즉, 자신이 믿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를 증명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 것이지요. 이 자체는 개인의 신념과 그 실천의 자유의 문제이므로, 그 자체로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이와 같은 개인의 신념의 자유와 교리의 절대성을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물론 그 개인은 자신이 믿는 교리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순교를 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그 교리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에 대한 방증은 아니지요. 그리고 “종교적 진리가 확증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순교를 통한 것이다.”라는 새뮤얼 존슨의 주장은 이 두 경우를 혼동할 때 나올 수 있는 말 같습니다.
또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저 의견을 참이라고 전제해버린 후, 새뮤얼 존슨이 한, 그다음의 말입니다. 즉,
“통치자는 자기가 생각한 것을 시행할 권한이 있고, 진리를 전파하는 자는 박해를 당할 권한이 있다.”
무슨 마조히스트도 아니고, 자신이 믿는 교리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어서 기꺼이 순교를 선택하는, (다소 극단적일 수도 있는) 신념의 자유가, 어떻게 ‘나는 내가 절대적으로 믿는 진리를 위해 기꺼이 박해를 당할 권한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또한 이 생각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논리적으로 이는 분명 비약입니다.
그런데 새뮤얼 존슨이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리는 데까지는, “종교적 진리가 확증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순교를 통한 것이다.”라는 전제 이외에도, 중간에 하나 더 있지요. 그것은 바로
“통치자는 자기가 생각한 것을 시행할 권한이 있다.”
라는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새뮤얼 존슨은 왕당파였습니다. 이미 앞에서 미리 설명을 드렸다시피, 당시 영국은 청교도혁명이나 명예혁명 등과 같은 시민과 왕권 사이에 지난한 권력 싸움이 있었지요. 그리고 이 싸움이 저변에는 종교 전쟁이라는, 종교적 신념과 관련된 갈등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말씀드릴 부분은 저의 추측이니, 그냥 참고 정도만 부탁드립니다. 아마도 새뮤얼 존슨은 옳고 그름의 절대성이나 지식의 확실성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이런 성향과 함께 정치적으로는 왕당파에 속했지요. 이 말인 즉, 절대왕정의 이데올로기였던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에 대해 어느 정도는 동의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이 두 경우를 종합해 보면, 결론적으로 그는 정치적 권력자가 ‘법률’에 의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입장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독교 박해와 같은 종교적 양심에 대한 권력자의 박해에 대해 저와 같은 논리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밀은 새뮤얼 존슨의 이런 생각을 매우 위험한 것으로 보고 경계합니다.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종교의 자유(즉, 양심에 따른 종교적 신념의 자유)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불관용론자들의 전형적인 논리이겠지만, 대단히 위험해질 수 있는 논리이기 때문에, 그냥 가볍게 보고 넘길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는 맞는 말입니다. 만약 권력을 가진 통치자가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한 성격을 가진 과대망상자라면, ‘순교하는 것은 너희들의 양심에 따른 종교적 신념의 자유를 행하는 가장 고결한 방식이므로, 너희들을 박해하는 나의 행위 역시 너희들의 고결함을 더욱 빛내주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 각자의 고결함을 위해 서로의 자율적인 권한을 최대한 실천하도록 하자! 순교를 하는 것은 너희들의 권한이고, 이를 위해 너희들을 박해하는 것은 나의 권한이니!’ 라는 식의 궤변으로 우아한(?) 공포정치를 자행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에 새뮤얼 존슨의 저 말이 무엇보다 위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일견 그것이 매우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런 호도는 대개 사람들의 선호의 정서와 잘 맞물리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흠결 없는 논리보다는 이런 비약이 사람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더욱 큰 설득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8) ‘여론’을 통한 자유의 통제의 경우
이 논의를 위해 먼저 밀은 사람들이 법적인 처벌을 두려워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즉, 사람들이 법적인 처벌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법적인 처벌을 받은 사람은 사회에서 낙인이 찍혀서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데는 여론이 법적인 처벌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런 식의 방식, 즉 여론에 의해 사람들을 처벌하고, 그들의 입을 막는 방식에 대해 만족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 밀은 주목을 합니다. 이는 분명히 그리고 여전히 그러하지요. 그리고 왜 그러한지에 대해 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즉, 여론에 의해 개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막는 방식을, 보통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나름대로 존중해주면서도 기존의 질서에 속한 모든 것들이 이전처럼 아무런 방해 없이 잘 돌아가게 함으로써,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태도를 두고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편의적인 태도, 즉, ‘절충주의적인 태도’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밀에 따르면, 이와 같은 절충주의적인 태도는 다음과 같은 폐해를 야기합니다.
즉, 이런 태도가 합리화된 사회에서는 일관된 논리로 자신의 의견을 아무런 두려움 없이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지성인이 나올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회에서 ‘선호’되는 사람들은 단지 일반적인 상식에 무반성적으로 영합하는 자들이거나, 단지 대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을 들려주고 진리를 사고파는 모리배들‘ 밖에는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이번 시간에 계획했던 부분에 대한 리뷰 및 설명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주에는 ‘억압받는 의견이 오류일 경우’와 관련한 논의들에 대한 리뷰를 이어가도록 할게요.
그럼, 다음 시간이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