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불완전한 CHASER, 해결되지 않은 숙취(宿醉)

조지 손더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리뷰: 세 번째 - 마지막

by Juncus

왜 작가별로 이렇게 해설에 질적인 차이가 있는지가 읽는 내내 의구심으로 남았다. 중간에는 이제 그만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만큼 매우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끝까지 읽었던 이유는, 이 불편한 의구심을 해결하는 것이 애초에 이 책을 읽기로 선택한 이유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난 후, 이 의구심에 대해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체호프를 제외한 다른 세 소설가들은 동적인 플롯을 통해 작품의 주제와 인물의 성격 그리고 심리를 압축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말인 즉, 현대 소설 이론을 기준으로 볼 때, 가장 단편답게 쓴 것은 체호프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투르게네프나 톨스토이, 고골이 실력 없는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미 네임드이고 클래식이며, 한 시대의 전형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바로 손더스에게 있는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가 말한 대로 정말 ‘작가’라는 존재가 단편 문학 작품을 읽는 방식에는 어떤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동적인 플롯에 대한 정밀한 파악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단적으로 말해, ‘작가’라면, 그 어떤 소설이든지 매우 잘 읽어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 의미에서 볼 때, 체호프를 제외한 다른 세 작가에 대한 손더스의 읽어내기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며, 변죽만 울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우선 투르게네프의 「가수들」의 경우, 이는 분명 단편으로서 플롯 상의 문제가 뚜렷하다. 즉, 결말 부분을 제외하고는 압축이 효과적으로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압축을 위해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은, 예를 들어, 체호프의 「마차에서」와 같이 객관적 상관물과 같은 문학적 장치를 통한 ‘보여주기(showing)’인데, 확실히 이 작품에서 투르게네프가 쓰는 방식은 ‘설명하기(telling)’ 일변도이다. 심지어 이 작품에는 중심인물이 과연 누구인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잡다한 모든 인물들 – 심지어 오브제 정도의 역할로 한정될 수도 있는 동네 개까지 –에 대해 모두 세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더스는 이런 형식상의 큰 문제점에 대해, ‘나보코프(Nabokov)’ 등의 말의 권위를 빌려, ‘르포르타주’에 가깝다고 조심스럽게 비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작품을 매우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느껴지는데, 정작 문제는 그가 왜 이 작품을 좋아하는지 그 이유조차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플롯과 인물들의 배치 및 관계 등 소설의 구조적인 문제점은 잘 지적하고 있지만, 정작 이 작품을 명작으로 만들고 있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제대로 된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가수들」의 주제적 그리고 예술적 형상화의 핵심은 결말 부분에 나오는 두 장소의 대조에 있다. 다시 말해 노래 겨루기가 이루어지던 술집과 그 술집 밖이라는 두 장소를 통해 구상화된 정적인 플롯에 있다. 이 플롯의 전개 방식은 분명 압축적이며, 이 압축은 두 장소에서 일어난 일들 각각이 서로를 메아리처럼 반영하는 유비적 대조를 통해 이루어진다. 즉, 일종의 거울 효과와 같은 유비와, 서술자와 각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간에 거리의 차이라는 대조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아마도 투르게네프 자신인 것 같은) 서술자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경험한 사건, 즉 한순간에 우스꽝스러운 희극으로 되돌아간 어떤 예술적 고양감이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먼 거리에서 일어난 사건 – 어린 동생을 애타게 부르는 형의 목소리와 이에 ‘왜에~?’라고 답하는 동생의 목소리 –을 통해 그 속에 희나리처럼 남아 있는 페이소스로서 예술적으로 객관화된다. 물론 이는 나의 의견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의견이 얼마나 설득적이냐는 것이고, 또 손더스가 쓴 이 책의 목적으로 본다면, 그 역시 자신의 의견을 설득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용하게’ 설명해 낼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그는 변죽만 울리고 있을 뿐, 어떤 효용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손더스의 이와 같은 한계는 톨스토이의 경우에도 역시 두드러진다. 글을 읽다 보면, 그는 톨스토이의 작품을 매우 좋아하는 게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왜 좋아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저 ‘인류애’라는, 톨스토이를 이야기할 때 늘 따라다니는 말을 자신의 이런저런 경험과 관련지어 반복할 뿐인데, 이는 ‘톨스토이 읽기’와 관련해서 전혀 효과적인 설명이 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과 하인」의 경우, 탐욕스럽고, 위선적이며, 다소 편협한 성공한 상인인 바실리 안드레예비치가 그의 집에서 일하는 성실하고 친절한 천성에, 어느 정도는 삶에 달관한 하인 니키타를 대하는 태도가 이 작품의 절정 부분에서 갑자기 일변한다. 즉, 악인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살신성인적인 행동을 하는 선인이 된다. 그들은 바실리의 아집과 탐욕으로 인해 어이없는 죽음에 이르게 될 위기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 상황은 분명 동적인 플롯을 따라가면서도 그 속에서는 정적인, 즉 장면적인 두 가지 버전의 플롯이 시간 순으로 나열된다. 그런데 이 두 사건 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 변칙적인 플롯이다. 그런데 과연 톨스토이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이 작품을 써 내려갔을까? 내가 보기에 이는 분명 의도된 것이고, 바로 이 지점에서 주제가 점철된다. 이에 대한 근거는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을 참고해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일종의 그가 일관되게 쓰고 있는 하나의 방식이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의 동화 같은 소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가난하기에 마음이 척박할 수밖에 없는 구두 수선공 세묜과 그의 아내가 천상에서 죄를 짓고 내려온 천사 미하일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 역시 이와 거의 동일하다. 즉, 규칙적인 플롯의 흐름상에 어떤 변칙이 있고, 이는 서로 대조되는 두 장면의 연속으로 드러나며, 이 속에서 인물들의 성격은 갑자기 일변한다. 이는 분명 과장적이다. 단편의 플롯의 핵심은 압축이지만, 이런 억지스러운 과장은 압축의 효과를 전혀 내지 못한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 톨스토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 핵심이 있다. 톨스토이에 대해 손더스가 강조했던 ‘사실주의’가 다름 아닌 바로 이 지점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과장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과장이 아니며, 그저 (톨스토이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사실’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즉, 그 어떤 사람이라도 – 심지어 구두 수선공 세묜과 같이 비루하거나 성공한 상인 바실리 안드레예비치와 같이 탐욕스럽고 위선적인 인간일지라도 – 그 내면 속에는 기독교적인 사랑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것 말이다.

요즘 사람들은 종교적인 언급을 최대한 피하려고 하고, 이는 분명 어느 정도는 필요한 태도이지만, 톨스토이를 읽을 때만큼은 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작가의 정신의 주된 축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뽀츠벤니끼라는 러시아 특유의 토양주의와 이를 바탕으로 한 그들만의 기독교 사상 등을 고려해야만 한다. 즉, 표현론적이고 반영론적인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손더스는 의도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이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체호프의 작품을 분석할 때 보여주었던 통찰력이 톨스토이의 경우에는 살아 있지 않다. 플롯에 대한 해석은 지루할 뿐이며, 주제와 관련해서는 ‘인류애’라는 말만 여러 번 반복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손더스를 통해 배우고 싶은 건, ‘톨스토이적 의미의 인류애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소설로서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가’이지,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인류애가 아니다.

아쉽지만 분량 상의 이유로 고골에 대해서는 짧게 언급만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코」는 손더스가 체호프를 분석할 때 보여주었던 강점이 전혀 효과가 없는 작품이다. 이는 생선회를 뜰 때는 회칼을 써야지, 소나 돼지를 해체할 때 쓰는 칼을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오히려 이는 그가 투르게네프의 「가수들」에 관해 강의할 때, 카프카의 『변신』을 끌어오면서 했던 말, “좋은 이야기는 과잉의 패턴을 만든 뒤, 그 과잉에 주목하고 그것을 장점으로 전환하는 이야기”라는 걸 적용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작 「코」에서 손더스는 이 같은 적용을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는 소설을 왜 읽는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제 이 질문은 양상은 미묘하게 바뀌어져 있다. 서두에서 던졌던 질문은 분명 ‘우리는 소설을 왜 읽어야만 하는가?’였기 때문이다. 이 질문의 양상을 이렇게 달리 표현하는 이유는, 손더스의 강의를 통해 애초에 얻고자 했던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이 chaser는 그다지 효과가 좋지는 못했다. 내 머릿속은 여전한 숙취로 고통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일종의 향수(鄕愁)로서 상기할 수 있던 것은 있었다. 하지만 이는 손더스가 해준 것이 아닌, 그가 선택한 저 과거의 작가들이 해준 것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소설로써 말해준다. 우리가 소설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진실을 보기 위해라는 것을 말이다. 삶의 진실은 현실의 잡다한 것들에 가리어져 있기에,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떤 허구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아이러니, 그것이 바로 소설의 본질이며 또한 소설의 당위이다. 필요(need)의 논리에만 의한다면, 이제 소설을 대체할 픽션은 차고 넘친다. 즉, 굳이 우리가 소설을 읽어야 할 필요는 이제 없다.

‘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가?’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톨스토이는 분명히 그 이유를 답해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손더스는? 그의 답변이 과연 구체적이었나 하는 의구심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는 순간까지 해결되지 못했다. 구체적이지 못한 답변은 당위적일 수 없다. 즉,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열게 한 페이소스는 결국 해결되지 못했다.




투르게네프

체홉과 톨스토이

톨스토이

썰매(톨스토이 <주인과 하인>의 플롯 전개의 동적 구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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