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chapter 2 요약 설명 PART 1
1. 『정의란 무엇인가』 chapter 2 요약 설명 PART 1
이번 회 차부터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두 번째 챕터에 해당하는 부분을 요약 설명해 볼까 합니다. 이는 아마도 각각 part 1과 part 2으로 나뉘어서 2주에 걸쳐 진행될 것 같습니다.
대중 교양서로서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각 챕터 별로 소제목을 비교적 매우 명확히 달 수 있다는 것일 겁니다. 이는 곧 해당 챕터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의 범위가 분명하다는 걸 의미하고, 그것이 분명할수록 그것을 요약 이해하는 것은 간단해집니다. 하지만 뭐든지 알면 알수록 어려워지는 것처럼, 철학 역시 그러합니다. 그리고 철학 교양서인 이 책의 내용 역시 그러하지요. 즉, 점점 논의가 진행될수록 내용은 조금 복잡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챕터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다룰 정의에 관한 입장들 중에서 직관적으로는 가장 이해하기가 수월합니다. 하지만 쉽다고 해서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는 다른 윤리학적 스탠스를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비교 기준점이기 때문입니다. 즉, 공리주의를 잘 이해하면 할수록, 자유주의와 같은 다른 입장들에 대한 이해도 역시 넓고 깊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샌델이 이번 장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바로 ‘공리주의(Utilitarianism)’입니다. 지난번 제1장에 대한 요약 설명에서 언급을 했듯이, 이 입장의 대표적인 철학자는 바로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입니다. 벤담이 밀보다 전(前) 세대로, 제 기억이 맞다면, 밀의 아버지, 즉 존 스튜어트 밀 1세와 벤담은 서로 친분이 있었고, 그 결과 밀 2세는 일찍부터 벤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스승의 사상을 답습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공리주의의 외연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Liberalism)의 심층적 기반을 마련할 만한, 의미 있는 철학적 논제들을 후대에게 던져주었습니다. 이는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 중 하나인 『자유론』을 보면 잘 알 수 있지요.
샌델은 이번 챕터의 구성을 위해 매우 전형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이 두 인물의 사상을 중심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지요. 그 결과, 이번 챕터의 하위 범주는 크게 두 개, 즉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와 밀의 ‘질적 공리주의’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책의 순서대로,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부터 요약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벤담이 고안한 교도소 디자인, 파놉티콘
1) 제레미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
(1)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good of the greatest number)”
이 말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본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중·고등학교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에 반드시 나오는 말이지요. 이는 벤담이 사회 정의와 관련된 가치 판단의 기본 명제로 삼은 유명한 말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명확합니다.
즉, 첫째, 공리(utility)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는 뜻입니다. 벤담은 말합니다. “감정은 우리의 통치권자”이며, 따라서 쾌락과 행복을 극대화시키고, 고통과 불행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곧 정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감정은 매우 사적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경우 야기될 수 있는 문제는 정의 역시 사적인 것으로 파편화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불러올 수 있는 결과는 오히려 극도의 혼란뿐일 것입니다. 즉, 정의가 곧 부정의가 되는 역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저 말이 담지하고 있는 두 번째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즉, 이때의 쾌락이란, 온전히 양적으로 환산 가능한 의미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인 즉, 쾌락의 질적 차이를 완전히 배제한 의미에서의 쾌락만이 인정된다는 것이지요. 이와 관련해서 벤담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쾌락의 양이 동일하다면 아이들이 하는 푸시핀 게임이나 시를 짓는 행위나 그게 그거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더 부연을 달자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good of the greatest number)”이라는 말에서 ‘good’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번역은 비록 ‘행복’으로 되어 있지만, 원문은 분명 ‘happiness’가 아닌 ‘good’으로 되어 있지요. 철학에서 이 단어가 지칭하는 의미의 외연은 생각보다 넓습니다. 이 단어는 보통 ‘행복’보다는 흔히 ‘선(善)’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한국어의 화용론적 의미에서 ‘선(善)’이란 전통적으로 ‘자신의 이익보다는 남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의 욕심을 버리는 것’ 정도의 의미로 쓰이지만, 공리주의 맥락에서는 이와 다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국인에게 익숙한 선(善)의 의미는 ‘의도’에 방점이 찍혀 있다면,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선(善)’의 의미는 ‘결과’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즉, 어떤 행위의 결과가 더 많은 효용, 즉 좋음(goodness)을 수반하다면, 그 행위는 옳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한번 영어사전에서 ‘good’이라는 단어와 ‘happy’ 그리고 ‘happiness’라는 단어들을 찾아 비교해 보세요. 그러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으실 겁니다. ‘good’은 다른 두 단어와 달리 형용사이면서도 동시에 명사입니다. 또한 ‘happiness’처럼 추상명사, 즉 셀 수 없는 명사이면서도 복수형이 가능한 셀 수 있는 명사이기도 하지요. 후자의 경우, 즉 ‘goods’의 의미는 바로 ‘재화, 재산’ 등을 뜻합니다. 왠지 감이 조금 오시지 않나요? 지난번 이 책의 제1장에 대한 요약을 떠올려 보세요. 정의(justice)에 관한 세 가지 정의(definition) 중 첫 번째 것이 ‘복지’ 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경제적인 번영을 전제로 한 개념이며, 동시에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본 정의의 개념이라고 정리해 드렸습니다.
아무튼 이처럼 복수형이 가능하다는 말은 그것이 양적으로 환산가능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국어의 화용론적 의미에서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서양인의 언어 사용을 통해 조금 우회적으로 살펴보면, 쾌락의 양적 환산은 가능한 것이며 또한 그것이 윤리적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그들 문화에서는 그다지 이상한 것이 아니었을 거라는 걸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2) 양적 공리주의 강점과 약점
양적 공리주의의 장점은 정의와 같은 윤리적 가치 판단의 대상에 대해 사적인 판단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매우 간명하며 그래서 상당히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지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장점이 곧 단점의 근본 원인이기도 합니다. 즉, 쾌락의 질적 차이를 완전히 배제하고 양적으로 환산 가능한 것으로만 한정해서 보고 있기 때문에, 사회 정의로서의 복지 역시 개개인의 만족의 총합으로만 보고 있지요. 이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⓵ 개인의 기본권 인정과 관련된 문제
우선 샌델이 강조하는 문제부터 정리해 보겠습니다. 샌델은 말합니다. 쾌락의 질적인 차이를 배제하고 양적인 총합에만 방점을 둔 결과 발생할 수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개인의 개별성, 즉 오늘날의 정의(定義)대로 하자면, 기본권으로서의 인권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이는 분명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식에서 ‘복지’라는 말의 뜻은 개인의 기본권 보장과 거의 동의어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샌델은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개인의 기본권 자체를 허구로 보고, 나아가 공동체 자체를 허구의 집단으로 보고 있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비판적 읽기에 익숙하신 분들은 샌델의 이 주장을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저는 이 주장에 대해 그다지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는 저의 의견일 뿐이지요. 하지만 샌델의 주장 역시 그의 의견일 뿐입니다. 모든 비판적 의견은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이 단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한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점이 이 책이 여러분에게 주는 가장 큰 효용(utility)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샌델의 주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벤담은 공동체를 두고, 개인들의 총합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 그 자체로는 허구의 집단에 불과하다고 믿었습니다. 아마도 샌델은 이 말을 저 주장의 근거들 중 하나로 여겼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공동체에 관한 벤담의 이와 같은 주장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단 한 가지 확실해 보이는 건, 벤담이 공동체의 실체성 자체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었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가 이러한 회의를 어떤 방식으로 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제가 보기에 샌델의 해석은 다소 극단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는 바로 샌델 자신의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즉, 개개인의 기본권은 의심하기 힘든 실체이고, 이 실체들이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서로 대등하게 그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곧 공동체의 메타볼리즘이고, 이것이 곧 공동체의 실체적 현상이라고 본다면, 저와 같이 다소 강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겁니다. 개인들 한 명, 한 명은 분명 감각적으로 경험되어 확인이 됩니다. 한 반에 20명의 학생이 있다면, 20명이 한 명, 한 명 모두 확인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그 반이 2학년 A반이라고 한다면, A반이라는 공동체는 이 20명의 학생들로써 확인이 됩니다. 1년이 지나고, 학년이 바뀌면, 이 공동체는 더 이상 없지요. 그리고 2학년 A반은 다시 각기 다른 20명의 학생들로 채워집니다. 새로운 공동체가 생기는 겁니다. 이 말인 즉, ‘공동체’라는 말 자체가 지칭하는, 유일무이의 온전한 대상은 없습니다. 그것의 내용은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총합으로 결정되고, 늘 변하지요. 철학적으로 보면, 바로 이 지점에서 공동체라는 말이 지칭하는 대상의 실체성이 의심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공동체 자체는 개개인들과는 달리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벤담이 개인의 기본권을 완전한 허구로 보고 있다는 샌델의 주장 역시 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근거로 한 가지 예만 들고 넘어가겠습니다. 오늘날 1인 1 투표라는 참정권,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를 가능하게 하는 이 기본 권리는 철저하게 양적으로 환산된 겁니다. 즉, 공리주의적인 의식의 발로가 곧 오늘날의 민주적인 선거 방식으로 구체화된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플라톤 식으로 하자면, 철인(哲人)처럼 현명하고 탁월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는 건 공동체의 안녕과 항구적 유지를 위해 비윤리적일 수 있다고 보는 입장들도 분명 있습니다. 미국의 복잡한 선거제도, 선거인단 제도와 같은 것은 이런 입장이 조금 반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중 어느 입장이 더 개인의 기본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일까요?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⓶ 정의와 도덕의 불일치 문제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로마 원형 경기장의 사례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로마 시민들의 유흥을 위해 원형 경기장에 사자와 기독교인들을 함께 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기독교인들은 사자에게 산 채로 물어 뜯겨서 죽는 극심한 고통을 겪지만, 로마 관중들은 이 광경을 보고 극도의 황홀경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 잔혹한 유흥은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될 시에는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정의에 부합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인들의 고통 << 로마 시민들의 즐거움
입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하지요? 근거 역시 간명합니다. 양적 공리주의 입장에서 볼 때, 만족의 총량이 결국에는 양(+)의 값이므로, 이는 기독교인들과 로마 시민들을 전체를 합한 사회 전체의 만족의 총량이 늘어났고, 이는 곧 사회 복지의 총량도 늘어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논리는 분명 매우 명쾌하고 간명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설득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공리주의의 맹점, 즉 정의와 도덕의 불일치 문제의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