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chapter 2 요약 설명 PART 2
1. 『정의란 무엇인가』 chapter 2 요약 설명 PART 2
이번에도 역시 지난번에 이어 『정의란 무엇인가』에 설명된 공리주의에 대해 요약 및 부가적인 해석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에 다룬 내용이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였다면 이번에는 밀의 질적 공리주의를 다루겠습니다. 이는 물론 해당 책의 순서를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흔히 존 스튜어트 밀은 ‘질적 공리주의’를 창시한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끼친 영향력의 범주는 단지 공리주의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에 대한 그의 창의적 반성은 공리주의의 외연을 질적인 차원으로까지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자유주의’에 대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물론 자유주의 역시 그 외연과 기원, 역사는 매우 넓고 깊습니다. 그렇기에 단지 밀 한 사람만이 이 스탠스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이와 관련해서 어떤 한 획을 그은 것은 사실이지요. 그리고 만약 공리주의가 단지 그 강력한 논리적 명확성 이외에도 현실 도덕과 관련했을 때 그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어떤 비교 기준점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의 기여 때문일 것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
그럼 본격적으로 책의 내용 요약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낫다.”
이 말은 벤담의 “최대 다수, 최대 행복”만큼이나 유명한 말이지요. 이게 누가 한 말인지는 사람들이 잘 몰라도, 이 말 자체를 처음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밀이 한 말로서 양적 공리주의를 비판하고, 질적 공리주의를 강조한 대표적인 환유(換喩)적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하게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즉, 밀이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를 완전히 부정하고, 새로운 공리주의로서 질적 공리주의를 내세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샌델도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밀은 ‘양적 공리주의의 맥락 내에서’ 그것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고,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질적 공리주의’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벤담이 제시한 명제적 믿음, 즉 “최대 다수, 최대 행복”가 참이 되기 위한 제1 전제, 즉 모든 쾌락은 질적으로 차이가 전혀 없다는 조건을 부정하고, 쾌락들 사이에 질적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그리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가 쓴 표현이 바로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낫다.”라는 유명한 표현입니다.
이건 제 상상입니다만, 밀이 이 표현을 생각해 냈을 때, 그의 머릿속에 떠올라 있던 생각은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나 잘 알다시피,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청년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는 명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독배를 마시고 죽었지요. 그리고 그가 죽기 전, 아테네 탈출을 모의하며 스승을 설득하던 제자들에게 남긴 말이 유명합니다. 즉,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지요. 이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애매한 말입니다. 하지만 명제적 문장의 이러한 맹점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정치적 헤게모니를 얻었던 것이 그 당시 소피스트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논리는 이러했을 겁니다. ‘악법이라고 해도 법이라는 더욱 큰 외연에 속해 있으니, 법은 법이며, 법은 준수되어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법의 의미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갑자기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명가(名家)’의 유명한 주장,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이 생각나는군요(아마도 지금이 새벽이어서 그런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자꾸 떠오르네요. 적당히 하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이 논리에서는 白과 馬라는 말이 지칭하는 대상이 각각 별개의 것으로 다르듯이, 白馬라는 말이 지칭하는 대상 역시 개별적인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白馬와 馬는 서로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궤변 같고, 결과적으로 궤변이 확실하지만 ‘이름(名, onoma)’을 가지고 논리를 전개한다는 면에서 볼 때, 고대 그리스의 고전 논리학과 유사한 면이 좀 있습니다.
뭐가 어쨌든, 위에 소개한 그리스 소피스트의 논리나 중국 명가의 논리나 서로가 주장하는 결론은 완전히 반대이지만, 둘 다 공통적으로 궤변은 궤변입니다. 즉, 그리고 이런 논리적 말장난이 악질적인 것이 되고, 벤담 식의 양적 논리에 따라 헤게모니를 얻게 될 때, 그것은 매우 비도덕적인 것이 됩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그리스 아테네는 민주정 국가였습니다. 그리고 이 정치적 정체(政體)에 벤담식의 양적 논리(지난번에 설명한 ‘로마 원형 경기장의 사례’를 떠올려 보세요.)가 합쳐지면, 이런 어이없는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분명, 소크라테스가 한 저 말,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실천적인 알맹이 없이 악질적인 말장난만 하는 소피스트들을 풍자함과 동시에, 지행합일(知行合一), 즉 철학적인 앎과 그것의 실천을 중시한 자신의 신념을 표현한 말일 겁니다. 이 똑같은 말은 어떤 입만 산 소피스트가 했다고 한번 상상해 보세요. 이 말을 하는 순간, 그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두 사람 각자가 느꼈을 쾌(快)의 감정 중 어느 것이 더 가치 있게 여겨지시나요? 바로 이 점에 ‘질적 공리주의’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by 자크루이 다비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2) 개인의 자유 중시: 소수의 가치
샌델을 설명합니다. 밀은 벤담이 주장인 총량의 일부로서의 개인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개인의 기본권을 강조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밀의 주장들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개인을 그 자신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다수가 믿는 최선의 삶을 개인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개인이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유일한 행동은 타인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행동들뿐이다.”
어떻습니까?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지요? 이런 것을 보면, 역시 천재는 몇 세대를 앞서가는 존재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곧, 그들이 살던 동시대에는 쉽사리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들이었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어쩌면 밀이 이와 같은 생각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천재로서의 고독이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3) 밀에 대한 샌델의 비판
샌델은 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위와 같은 밀의 주장이 실천적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 조건으로서 개인의 기본권에 대한 보장이 깔려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곧 공리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는 게 밀을 비판하는 샌델의 주장의 요지입니다. 즉, 말하자면, 샌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밀은 분명히 양적 공리주의의 맥락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질적 공리주의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리주의의 핵심 내용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기본권에 대한 개념이 그 기본 전제로 깔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공리주의를 버리지 않는 한, 자가당착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근거는 바로 벤담에게서 찾을 수 있다.’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샌델의 이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간단히 말해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동의하지 않으십니까? 그것도 아니면 유보적이십니까? 저의 입장은 세 번째, 즉 유보적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개인의 기본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벤담의 의도야 어쨌건, 한 가지 확실해 보이는 것은 그가 주장한 스탠스가 결과적인 선으로서 작용한 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인 1 투표권과 같은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헌법적으로 보장받는 개인의 기본권 같은 게 그것이지요.
둘째. 제가 보기에 밀이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 경우와 같이, 분명 옳음에도 양적인 논리에서 밀린 소수의 가치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이 되어야 하고,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드렸듯이, 양적 공리주의라고 해서 개인의 기본권에 대해 부정(否定) 일변도의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공리주의의 방점은 결과적인 선, 즉 효용에 있다는 것을 볼 때, 이는 가변적입니다. 그렇다면, 밀이 믿었던 대로, 공리주의 맥락 내에서 소수의 질적 가치를 제고하고, 나아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게 무조건적으로 어불성설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3) 급진적인 공리주의 논리의 사례 하나: 로빈후드식 논변
우선 로빈후드식 논변이 무엇인지 샌델이 설명한 것을 간단히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빌 게이츠 같은 부자가 돈이 줄어들어 입는 타격과 가난한 사람들이 (그의) 돈을 받아서 늘어나는 혜택이 같아질 때까지 빌 게이츠로부터 계속 돈을 걷어 나눠줘야 한다는 식의 논리입니다. 양적 공리주의의 논리로 매우 급진적인 부의 재분배를 주장하는 입장인 것이지요.
샌델이 정리한 것에 따르면, 이와 같은 로빈후드식 논변에 대한 반박은 다음의 두 가지 경우가 가능합니다.
(1) 양적 공리주의 내에서의 반박: 높은 소득세 부과는 일과 투자에 대한 의욕을 꺾어 생산성을 감소시키고, 이는 결국 사회 전체의 복지의 총량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양적 공리주의 밖에서의 반박: 로빈후드 식 계산 자체가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며, 또한 부당한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부자에게 세금을 걷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는 개인의 기본권에 대한 침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며, 결과적으로도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논박 중 첫 번째 것은 로빈후드 식 논변의 방식은 인정하되, 그것이 불러올 수 있는 결과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계산을 내놓은 입장입니다. 즉, 로빈후드식 논변을 주장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에서 공리주의의 외연에 속한 입장입니다. 다시 말해, 총량으로서의 효용에 방점을 두고 선(善)을 논하는 입장들이지요.
반면, 두 번째 논박은 로빈후드식 논변 자체가 궤변이라는 입장으로서, 공리주의의 외연 밖에 있는 주장입니다. 이 입장이 방점을 두고 있는 가치는 개인의 기본 권리입니다. 즉, 총량으로서의 가치보다는 개인의 가치가 더욱 우선한다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입장입니다.
여기까지가 『정의란 무엇인가』 두 번째 장에서 다루고 있는 ‘공리주의’에 대한 요약 설명과 해석입니다. 다음번에는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설명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이는 해당 책의 chapter 3과 4에 해당하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