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리얼 페인> 우리가 놓쳐온 고통에 대하여

by 에론위드


어떤 영화는 보고 나서도 금방 잊힌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마음을 두드린다.

리얼 페인은 후자였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하염없이 거리를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했고, 가슴이 먹먹했다. 벤지가 남긴 감정이 내 안에 깊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한때 가장 가까웠다.

영화는 공항에서 벤지가 멍하니 앉아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를 향해 "A Real Pain"이라는 타이틀이 뜬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엔딩도 같은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벤지는 오랜 시간 공항 의자에 앉아 있다. 마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반면, 데이빗은 뉴욕에서 공항으로 달려가며 벤지에게 끊임없이 전화를 건다. 하지만 벤지는 응답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단순한 상황 묘사가 아니다. 두 사람이 평생 이어온 관계를 보여주는 순간이다.
한 사람은 자유롭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한다.
다른 한 사람은 늘 그를 돌보고 책임진다.

벤지는 활발하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성격이지만, 그 눈빛엔 깊은 외로움이 서려 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벤지가 우울증을 앓고 있을 거라 직감했다. 그리고 영화는 그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벤지를 연기한 키에란 컬킨의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모든 감정이 전달됐다. 그의 내면에 자리한 공허함, 쓸쓸함, 그리고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까지.

빛과 어둠, 그리고 우리 사이의 거리

벤지와 데이빗.
이 둘을 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홍콩 배우 장국영과 양조위를 떠올렸다.

영화 속에서 데이빗은 벤지의 뛰어난 친화력을 부러워하며 이렇게 말한다.
"벤지가 등장하면 주변이 환해진다."

이 말은 예전에 홍콩 감독 왕가위가 장국영과 양조위를 비교하며 했던 말과 닮아 있다.
왕가위는 장국영을 ‘빛’에, 양조위를 ‘어둠’에 비유했다.

장국영은 외향적이고, 주변을 밝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반면, 양조위는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다.
그러나 결국, 장국영도 자신만의 깊은 고통을 안고 있었다. 우리는 그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끝내 알 수 없었다.

벤지와 데이빗의 관계도 그랬다.
데이빗은 6개월 전 벤지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말한다.

"저렇게 밝은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나는 벤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세상에는 마치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이방인처럼 떠도는 사람들.
벤지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는 세상을 너무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사람일수록, 세상이 더 버겁고 아프게 느껴질 수 있다.

벤지와 데이빗은 어릴 때부터 단짝처럼 지냈다.
데이빗은 뉴욕에서 안정적인 직장과 결혼 생활을 하고 있지만,벤지는 어머니의 지하실에서 대마초를 피우며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은 함께 거리를 걷고, 길바닥에 앉아 밤을 지새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사이엔 멀어진 시간과 거리가 존재한다.

벤지가 데이빗을 향해 "너 예전엔 완전 찐따였잖아." 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그 말 속엔 벤지의 섭섭함과 소외감이 묻어 있었다.





"너는 이제 내 세계에서 멀어졌어."

벤지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데이빗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 변화가 벤지를 더 깊은 외로움 속으로 밀어 넣었을 것이다.

남겨진 사람, 떠난 사람

벤지와 데이빗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폴란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행 내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세상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데이빗은 벤지를 이해하려 애쓰지만, 여전히 어딘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벤지는 데이빗을 붙잡고 싶지만,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그리고 결국, 영화의 엔딩.

공항에서 두 사람은 뜨겁게 포옹한 뒤 헤어진다.
데이빗은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고,
벤지는 여전히 공항에 남아 있다.

오프닝의 벤지와 엔딩의 벤지는 다르다.
처음에는 깊은 우울이 가득했다면, 마지막엔 불안과 혼란이 뒤섞인 눈빛을 하고 있다.
그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영화가 말하는 진정한 고통이란, 결국 "내가 나를 잃어버린 듯한 감각"이 아닐까.

벤지가 느끼는 상실감과 불안은 곧,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는 가장 깊은 외로움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음악이 흐를 때.

엔딩 타이틀이 올라갈 때,
쇼팽의 "Étude Op. 10 No. 4 in C-sharp Minor" 가 흐른다.
일명, "Torrent Étude – 추격"

그 음악은 마치 벤지의 불안과 공허함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가 여전히 공항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엔딩 크레딧이 끝난 후, 남겨진 건 공항의 소음.
그 안에 벤지는 여전히 홀로 남아 있다.

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우리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다.
그가 느낀 공허함과 혼란이, 고스란히 우리에게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