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
한 해가 지나고 아이들의 나이가 바뀌었다 아홉 살, 일곱 살, 그리고 다섯 살. 우리 집 거실을 채우는 웃음소리도, 현관에 나란히 놓인 신발의 크기도 작년과는 확연히 다르다.
배 속에 품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내 품을 벗어나 각자의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아들들의 성장이 매 순간 나를 놀라게 한다
아홉 살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의 문턱에 선 아홉 살 첫째. 혼자서 일과를 챙기고 제법 의젓한 말투로 조언을 건네기도 하지만, 엄마의 한마디에 울그락불그락 얼굴을 붉히며 방어적인 태도를 보일 때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곤 한다.
길 위에서 내 손을 잡는 대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씩씩하게 앞서가는 뒷모습.
섭섭함이 차오르기도 하지만, 저 아이의 반항적인 눈빛은 나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독립의 신호'임을, 이제 나는 아이의 손을 꽉 잡는 대신, 아이가 넘어졌을 때 돌아볼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법을 배운다.
아홉 살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을 알려주는 엄마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묵묵히 지켜봐 주는 '믿음의 침묵'임을 깨닫는 것이지 않을까 한다
일곱 살
유치원의 최고참 형님이 된 일곱 살 둘째는 요즘 부쩍 생각이 많은 듯하다. 듬직한 형과 귀여운 동생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애쓰는 아이.
"엄마, 내가 만든 것 좀 봐봐요!"
라며 끊임없이 존재를 확인받으려 하는 그 맑은 눈망울을 마주할 때면, 마음속에 애틋한 파동이 일어난다.
중간에 낀 세대로서 느낄 수 있는 미묘한 고독을 내가 다 채워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아이가 눈을 맞출 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을 보듯 온 마음을 다해 웃어주고 더 많이 안아주고 사랑한다 말해주려 한다
일곱 살의 투정은 엄마의 사랑이 여전한지 묻는 수줍은 안부임을, 나는 찰나의 순간에 읽어내려 한다
다섯 살
"내가 할 거야!"
를 입에 달고 사는 다섯 살 막내. 이제는 아기라 부르기 무안할 정도로 제법 자기 고집이 세졌다.
우리 집의 거침없는 주인공이다. 형들의 견고한 세계에 무작정 끼어들었다가, 같이 놀아주지 않는 형들에게 서러운 화를 내기도 하고 엉엉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 고집스러운 생떼는 때로 엄마에게 한계치에 가까운 인내를 요구하지만, 그만큼의 사랑을 돌려주는 법도 아는 녀석이다.
온종일 세 아들과 씨름하며 지칠 대로 지친 밤, 잠결에 내 다리를 가만히 감싸 안는 그 작은 팔의 온기를 느끼면 신기하게도 하루의 모든 고단함이 씻겨 내려간다. 그 부드러운 살결과 온기는 나를 다시 웃게 하는 세상 유일의 비타민이다
세 아들의 숲에서, 엄마도 함께 홀로 선다
아홉, 일곱, 다섯. 이 세 숫자가 그리는 소란스러운 일상은 결코 녹록지 않다. 하지만 아이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나에게서 멀어지려 애쓰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엄마라는 이름 뒤에 가려두었던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아이들이 자신의 우주를 넓혀가듯, 나 또한 나만의 세계를 단단하게 가꾸어야 함을 느낀다 내가 행복한 어른으로 우뚝 서 있을 때, 비로소 아이들도 미안함이나 망설임 없이 자유로운 비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이 소란스러운 거실이 정적으로 가득 찰 날이 오겠지!
그때 오늘을 되돌아보며
"참 뜨겁게 사랑했고, 참 건강하게 보내주었다"
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왔던 그 위대한 시작처럼, 이제는 매일 조금씩 마음의 거리를 넓히며 아들들의 멋진 성장을 축복하는 '기다림의 엄마'로 살아가려 한다.
아홉 살의 용기, 일곱 살의 다정함, 다섯 살의 활기. 이 세 가지 빛깔이 어우러진 우리 집의 오늘을 나는 가장 열렬히 사랑한다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아이들이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마주하게 될지 미래라는 도화지는 아직 백지로 남아 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파도가 칠 것이고, 때로는 생각지 못한 갈림길에서 서성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미리 마음을 내어주지 않으려 한다. 다만 나는 오늘, '엄마'로서 내 곁의 세 아들에게 후회가 남지 않는 하루를 살아보려 다짐할 뿐이다.
아이가 묻는다.
“엄마, 우산은 왜 비를 맞아요?”
우산에게 우산을
씌워주지 않아서 그렇다고
다정히 대답해 주었다.
“차도 비를 맞아요!”
커다란 몸집으로 비를 맞는 차는
오늘 샤워가 하고 싶어 그런가 보다며
즐겁게 맞장구를 쳤다.
바닥에 톡톡 떨어져
왕관처럼 피어나는 물방울들에
아이는 눈을 떼지 못한 채 신기해한다.
“비가 물웅덩이에 떨어지니
동그라미가 생겼네!”
아이의 눈동자에 맺히는
동그란 세상, 맑은 물음표들.
신기한 것으로 가득한
너의 세상, 참 예쁘다.
너의 세상이 예뻐서
나의 마음도 오늘 함께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