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셋 엄마의 육아 성찰
세상에는 풀리지 않는 영원한 숙제 같은 질문이 있다. "아들이 키우기 힘든가, 딸이 키우기 힘든가." 나는 아들 셋을 키우는 엄마다. 그리고 내 동생은 딸 둘을 키운다. 명절이나 가족 모임에서 만나면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보며 경탄하기도 하고, 때로는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우리가 겪는 육아의 무게는 저울에 달아 경중을 따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흔히 아들 셋이라고 하면 "어머, 고생이 정말 많으시겠어요"라며 기함부터 한다. 집안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는 둥, 엄마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겠다는 둥의 위로 섞인 참견들이 뒤따른다. 반면 딸 둘을 키우는 동생에게는 "그래도 딸들이라 아기자기하고 예쁘겠네"라는 부러움 섞인 말들이 건네진다. 하지만 나는 동생의 집에서도 전쟁터와 같은 치열함을 본다. 그것은 몸으로 부딪치는 물리적인 폭발력은 아닐지라도, 보이지 않는 감정의 선을 섬세하게 조율해야 하는 정서적 노동의 치열함이다.
결국,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것은 성별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다. 내가 아들 셋을 키우며 절감한 것은, 아이들은 성별이라는 커다란 바구니에 담기기 이전에 저마다의 색깔을 지닌 독립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똑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내 아들 셋조차도 한 뱃속에서 나온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성향이 다르다. 첫째의 자유분방함, 둘째의 유연함, 셋째의 거침없는 에너지는 '아들'이라는 단어 하나로 묶기에는 너무나 고유하다.
육아는 매 순간이 '처음'의 연속이다. 첫째가 주는 당혹감은 둘째를 낳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둘째는 또 다른 종류의 처음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생 겪어보지 못한 감정의 밑바닥을 자식을 통해 마주한다. 인내의 한계를 시험받고, 이름 모를 죄책감에 밤을 지새우며, 동시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찰나의 미소에 모든 고통을 잊는다. 이 과정은 아들이나 딸이나 매한가지다.
우리가 각자의 육아를 세상에서 가장 어렵게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짊어진 배낭의 무게는 내 어깨가 직접 느끼는 것이기에, 남의 어깨 위에 놓인 짐이 아무리 무거워 보여도 내 통증보다 생생할 수는 없다. 내가 넘고 있는 이 산이 가장 가파르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지금 이 순간, 온 힘을 다해 그 산을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아들 셋을 키우는 나를 보고 훈장을 줘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저 세 명의 서로 다른 영혼을 보듬고 있는 한 사람의 부모일 뿐이다. 내 동생 또한 두 명의 섬세한 우주를 지탱하고 있는 위대한 항해사다. 우리는 서로가 겪는 어려움의 결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안다. 아들이든 딸이든, 한 아이가 온전한 성인으로 자라기까지는 부모의 뼈를 깎는 헌신과 마르지 않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결국 중요한 것은 성별이 아니라 '사람'이다. 내 아이가 어떤 색을 가진 아이인지,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귀 기울이는 것. 그리고 내가 겪는 이 어려움이 나만의 유별난 고통이 아니라, 모든 부모가 각자의 자리에서 치러내고 있는 숭고한 통행료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아들 셋을 키우며 내가 배운 삶의 겸손함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산을 넘고 있다. 그 산의 높이는 다를지언정, 정상에서 마주할 풍경의 아름다움은 아마도 같은 색일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풍경이다.
한 뱃속에서 나온 달라도
너무 다른 세 개의 우주를
읽어 내려간다
아들이라는 투박한 단어 속에
가둘 수 없는 고유한 빛깔
아이마다 저마다의 문법을 가지고
내 삶에 도착한다
남의 어깨 위 짐이 태산 같아도
내 어깨를 누르는 배낭이
넘는 이 산이 가장 가파른 이유
서로 다른 영혼을 보듬는
한 사람과 섬세한 우주를 지탱하는
항해사가 만나 서로의 고단한
결을 짐작해 볼 뿐이다
사람이라는 깊은 바다로 나아가는 길
우리는 뼈를 깎는 사랑으로
부모라는 이름의 숭고한 통행료를 지불한다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정상에 섰을 때
우리가 키운 것은 아이가 아니라
겸손하게 여물어간 우리 자신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