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나의 일이 아닐 것 같던 나의 일

퇴사 결심한 날

-아래 작성된 내용은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을 작성한 것이며, 이는 특정 회사나 조직의 (특히 내가 몸담은)

공식적인 계획이나 견해는 아님을 밝힙니다.


#회사원 #마케터 #퇴사 #결심 #희망퇴직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이 회사를 그만두는 그날이.


어느 날과 다름없는 외근 다녀오는 날, 회사에서 희망퇴직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와는 거리가 먼, 아니 어쩌면 조금은 멀리 있는 조금은 더 뒤에 고민해도 될 남의 이야기라고 치부했다.


주말을 쉬고 출근한 월요일, 너무나 다를 것 없던 일상, 보통의 일처럼 이어지는 일과 미팅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아무렇지도 않은 하루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문득 회사는 어떤 사람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인생을 준비하기 위한 기회를 주기 위해

어떤 기준으로 희망퇴직을 준비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에 처리해야 할 급한 업무를 막 끝내고 회사 게시판에 들어가 그 내용을 자세하게 보게 되었다.


"45세 이상, 만 15년 이상근무자"


나는 45세 이상도, 만 15년 근무도 아니었기 때문에 안도해야 했을까,

문득 입사일과 회사가 정한 만 15년 근무의 기준일을 보니 나는 불과 하루차이로 만 15년이 아닌,

만 14년 364일의 직원이 되어 있었다.


회사가 정한 기준상 나는 2가지 큰 기준에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라는 그 생각도 잠시, 인사팀에서 메일이 도착했다.


"귀하는 이번 희망퇴직 대상입니다.

희망퇴직 신청이 가능하오니 이점 고려하시어 신청 부탁 드리며,

궁금한 사항이 있을 때는 아래로 문의하시면 친절히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그 후로 몇 분 간 나는 한참을 멍하니 스크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떠오르는 생각은 1,2년이 더 남았다면 아무 고민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이 좋은 회사를 조금 더 다닐 수 있는 것일까.

아니, 몇 년 남지 않았지만 조금 더 열심히 해본다면 나에게도 좋은 성과와 보상과

승진기회가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불현듯 떠오른 결론은 모든 면에서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아직 팀동료들에게도 팀장님에게도 이 생각의 결론을 말하지는 않았다.

잠시 게시문을 보고 누구나 들 수 있는 생각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루가 지나고 출근하는 날, 머릿속에는 "그렇지 않을 것 같다"라는 나의 결론이

변함이 없을 것 같다는 또 다른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화요일, 희망퇴직 게시문이 뜨고 이틀 만에 나는 결심을 했다.

그래, 나가자.


곧장 팀장과 면담을 했다.

행여나, 내가 정말 이 조직과 팀에 없어도 당연한 사람이었다고, 적어도 지금의 너 정도 수준은

이곳에 다니기에는 벅차다는 인신공격이라도 받는다면 기꺼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내가 부정하더라도 누군가가 아니, 나를 고용해 준 회사가 나를 그렇게 모욕적이고 매몰차게 내팽개치는 이유가 무엇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팀장은, 한참 말을 하지 못했다.

게시문으로 확인한 바로는 이미 공지가 뜬 직후 우리 팀과 우리 조직 (여러 팀이 모여있는 디비전 단위)에는 적어도 대상자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고, 6개월 전에 혜성처럼 등장한 내가 이 팀에서 벌려놓은 일들을 이렇게 갑자기 그만둘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다시 나에게 물어왔다.

나가고 싶냐고. 나는 마음속의 결심을 말하지 않았다. 행여나, 정말 혹시라도 매일 출근할 곳이 있고,

누구에게 말하더라도 좋은 회사를 다닌다라고 들을 수 있는, 그리고 사람들도 따뜻한 이곳을 쉽게 포기하고 그만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을 수도 있다는 변덕스러운 마음을 나도 모르게 번복할까 봐.

나는 말했다.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그 메일을 받고 나서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어느 정도 결심이 선다면 정확하게 말씀드리고 그 결심을 번복하지 않겠다라고.


그 뒤 하루 이틀은, 마치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누구도 나의 퇴직에 대해 어떤 추측도 하지 못할 만큼 오히려 더 열심히 일했다.

아무도 내가 이 분위기에 묻혀 회사를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목요일, 희망퇴직 신청을 하루 남긴 아침 나는 팀장에게 말했다.

메일을 받지 않았다면,

나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눈에 보인 글자는 지워지지 않았고,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었다.

권고도 아니요, 그렇다고 그 메일과 내용에 대응해야 하는 것 또한 아님을 분명히 알았지만,

오히려 지금이 나에겐 다른 도전과 시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분명함은 부정할 수 없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싶다고 했고, 결심의 번복은 없고 결재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팀장은 다 큰 어른에게 결심을 번복하라는 말과 그 번복함으로 인해 겪을 개인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 못하는 건 뻔하기 때문에 그 결심을 존중한다고 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 그 남은 시간이라 함은 내가 결재를 올리고 그가 승인을 하기까지의 만 하루였다.

그 시간 동안만이라도 한 번만 더 고민해봐 달라고.


다음날 아침, 나는 결심한 대로 주저 없이 결재를 올렸고 외부교육으로 자리를 비운 팀장에게 팀즈메시지를 전달했다.


"올렸습니다. 승인부탁 드립니다."

정말 결심하셨습니까?라고 그가 되물었고 나는 짧게 그리고 단호하게 "네" 변함없습니다.라고 답했다.

결재는 진행되었고 두어 시간 지나지 않아 희망퇴직이 최종 승인되었음에 대한 안내 메일이 왔다.

팀장은 그다음 주 월요일, 팀 주간회의 시간에 이 내용을 전달하자라고 짧게 이야기했다.


나의 일이 아닐 것 같던, 나의 일이

그렇게 결정된 날이었다.


15년을 함께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14년 364일을 함께한 이 회사를 떠나겠다고 결심한 이 일주일이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게 느껴졌고,

이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직감하게 되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출근을 하게 되는 날과, 이곳에서 함께한 사람들과의 이별과, 함께 일했던 외부 파트너분들과 소통할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기에 다음 주가 시작되면 준비가 아니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늘 금요일 퇴근에는 다음 주가 최대한 늦게 왔으면 하는 모든 직장인의 염원을 담아 기도하며 퇴근했는데,

14년 364일 동안 처음으로, 오히려 빨리 월요일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유일한 금요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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