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가 어렵다고? 재미없다고?
드디어 마지막입니다. <사피엔스>는 쉽지 않은 책임은 분명하지만 한 번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마무리하며 제 생각을 종합적으로 적어보겠습니다.
과학혁명은 인류의 사고방식,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기술의 발전, 경제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이 말을 처음 봤을 때 말문이 막혔다. 이게 무슨 말인지 너무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문법적으로도 틀린 이 말을 해석할 방도를 몰랐다. 우리가 무엇을 원한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 자유의지를 의미할 것이고, 자유의지라는 말은 그 자체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앞선 저 말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어떤 것으로 하고 싶냐는 모순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의지를 설계한다는 말인가? 그 말은 초능력에 가까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인간이 전혀 다른 존재, 새로운 차원의 존재가 되고, 또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자유의지 자체의 의의가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질문은 영화 <트루먼 쇼>에서 주인공 짐 캐리의 상황과도 연결된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철저히 설계된 TV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운명과 자유의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짐 캐리는 자유의지를 실현하려 애쓰지만, 결국 그의 세상은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완전히 통제된 구조 속에서 움직인다. 영화는 그가 자신의 세계의 경계를 넘어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짐 캐리의 투쟁에 주목하겠지만, 나는 그를 감시하고 조작한 프로그래머들에게 더 주목하게 되었다. 그들은 짐 캐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계획하고 제어하며, 세상을 그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조작해 왔다. 이는 마치 현대 사회의 인류가 과학과 기술을 통해 스스로를 설계하고 있는 모습과 유사하다. 우리는 과연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일까, 아니면 과학과 기술이 만들어낸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걸까? 이런 치밀한 감옥처럼 인류는 지금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그 강을 더욱더 넓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의 굵직한 문명이 강가 근처에서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수렵과 채집을 통해 생존했고 농업으로 고생을 맛보긴 했지만 자연과 누구보다 가까웠던 인류는 점점 자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불가피한 종착지인 죽음까지도 말이다.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인류의 근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부 인지혁명에서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와 상상력을 통해 협력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이를 통해 인간은 상상적 질서에 기반한 종교, 정치, 법, 경제 시스템을 창조했고, 그로 인해 인간은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상상적 질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였다.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적 규칙과 제도 속에서, 과연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을까? 인류가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했지만, 그 질서 속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자유를 잃고, 거대한 구조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2부 농업혁명은 인류의 삶에 또 다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인류는 농업을 시작하면서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는 사유재산과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했다. 농업을 통해 더 많은 자원을 소유하게 된 인류는 이제 더 큰 경쟁과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연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오히려 인류를 더 복잡한 사회적 얽힘 속에 던져놓았다. 정착 생활을 하면서 인간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이에 따라 불평등과 전쟁이 발생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유를 얻었는가? 아니면 더 많은 소유욕과 불평등 속에서 자유의 의미를 잃었는가?
한편, 3부 인류의 통합에서는 무역, 정복, 제국주의를 통해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과정을 다룬다. 화폐, 종교, 제국과 같은 보편적 질서는 인류가 더욱 통합된 세계로 나아가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질서는 인간이 더 많은 자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었지만, 그 연결은 진정한 자유를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갈등과 억압이 나타났을 뿐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통합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더욱 멀어졌다.
이러한 고민은 4부 과학혁명에서 극대화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가져다주었다. 과학을 통해 자연을 통제하고,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의 의지와 삶까지도 설계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학적 진보 속에서 인간은 점점 더 자유의 의미와 행복을 잃어가고 있다. 과연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난폭한 독재자처럼 갑작스레 지구의 정복자 자리를 쟁취한 인류는 ‘과학’이란 도구를 이용하여 신, 호모데우스의 자리를 넘보는 중이다. ‘지적 설계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신이 될 때 역사는 끝날 것이다.’ 책 초반에 나오는 말이다. 미래에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조작하게 된다면, 인류는 어떠한 신인류와 맞닥뜨리게 될지 알 수 없다. 마치 ‘트루먼 쇼’ 안에 갇힌 사피엔스와 그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는 신인류의 등장이다. 지금의 인류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선조보다 더 행복할까?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려 하는 길목에 놓여 있지만 이것이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가 얻은 이 힘을 어떻게 쓸지 알지는 못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들은 다 망상일 뿐이고, 개인의 판타지를 집단에 맞추어 행복을 찾으려 해도 결국은 자기기만으로 끝이 날 것이다. 빠짐없이 모조리 다 우울하다. 죽지 않기 위해 온갖 발악을 했던 인류는 오히려 죽음을 바라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추구하는 여러 가지 이념이나 목표가 때로는 현실과 맞지 않아서 슬프고 우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가치관, 즉 이데올로기는 행복을 추구하도록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속이게 되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다. 예를 들어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좋지만,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잊어버릴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우울해지고 힘들어질 수 있다. 그리고 삶이 너무 힘들어서 죽음을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행복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그 과정에서 슬프고 힘든 순간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례 없는 발전이 거듭되고 더 높은 위치로 향하고 있는 지금의 인류는 과연 행복할까? 아니, 행복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을까? 한때 ‘소확행’이라는 말이 상당히 유행한 적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 <랑겔한스 섬의 오후>에 나오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표현인데, 이 표현이 등장한 1980년대 일본은 거품경제가 절정에 달하면서 엄청난 경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자본주의와 물질적 소비, ‘현금 만능주의’가 사회를 지배할 때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마냥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소소하더라도 자신만의 확실한 행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등장한 것 같다. 하지만 내 시선에서 현대인들의 소확행은 좀 다르게 느껴진다. 소확행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삶에 소확행밖에 없다. 성취를 이루지 못하고, 커다란 행복을 좇기에는 지쳐버린 현대인들의 합리화이자 위안을 얻기 위해 선택한 표현이 소확행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 소확행의 의미가 없어진다. 소확행도 결국에는 돈으로, 혹은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커다란 행복’이 존재해야 각각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근본적인 성취감과 행복이 없어진 사회, 한순간의 쾌락을 행복이라 생각하며 점점 자극적인 것을 원하고, 기준이 한없이 올라가는 이 현상이 이상적이진 않다. <멋진 신세계>에서의 ‘소마’처럼 사람들은 그들의 생화학적 시스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행복을 갈구할지도 모른다. 책에서의 ‘소마’, 현실 세계에 대입해 보면 꽤 많은 요소가 생각난다. 마약, 알코올, 담배부터 SNS, 유튜브, 등 꼭 섭취하는 것이 아니어도 인류에게 넘치는 도파민과 중독성을 선사하고, 감정을 무디게 하며, 우리를 둔하게 하는, 수많은 시간 동안의 많은 역사적 사건도 이루지 못했던 경건한 목표를 어느 때보다 발전된 사회를 구축했고, 똑똑한 현대인들을 상대로 이룰 성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피엔스는 상상을 통해 발전을 기약하고, 다음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그 힘으로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 상상하지 못하고, 상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피엔스가 아니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우주라는 공간에서 먼지보다 작은, 언젠가 죽을 하루살이 같은 존재들이 도대체 무얼 할 수 있을지 처음엔 궁금했다. 돌을 갈던 사피엔스가 인권과 자유를 위해 열망하고, 세계가 편을 갈라 서로를 공격하고, 과학적이고 경제적인 진보를 위해 경쟁하고, 인터넷을 발명하고, 앉은자리에서 모든 걸 누릴 수 있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결국, 책이 던지는 마지막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인류는 과학과 기술, 상상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확실치 않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있지만, 그 미래가 과연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지는 불확실하다.
작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우리 인류의 다가올 미래와, 그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 같으면서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나의 정체성, 인류 전체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다. 의심을 많이 하게 되면서 그만큼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인간과 나, 사회를 바로 볼 수 있는 지평이 확장되었다. 수렵 채집을 하던 사피엔스가 오늘날의 지구를 지배하게 된 계기를 알려주는 거대한 서사시로써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고,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많았으며, 우리에게 목적지를 알려주는 좋은 역사책으로써 아주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왠지 모르게 독서를 마치고 우리의 존재가 너무 작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 세계 속에서도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기에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었다.
마지막 질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 나오는 대사로 글을 마친다.
폭풍이 지나갈 때마다 그런 평안이 찾아온다면,
바람아 불어다오. 죽음을 깨울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