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의 오해: 우리는 왜 다정함을 택했는가

혐오와 분열의 시대를 넘어서는 인류의 진화적 생존 전략

by 박수열

자연계의 법칙을 논할 때 흔히 ‘적자생존’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그 ‘적자’의 의미를 날카로운 이빨과 강한 근육, 혹은 상대를 제압하는 압도적인 힘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기심으로 무장하고,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것이 생존의 최적화된 전략이라는 믿음은 현대 사회의 비즈니스와 교육 현장에서도 마치 진리처럼 통용됩니다.


하지만 생물학적 데이터와 진화의 긴 역사를 냉철하게 되짚어보면, 이러한 통념은 명백한 오류임을 알게 됩니다.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모하는 공격성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결코 효율적인 전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 비결은 ‘물리적 강함’이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다정함’에 있었습니다.


공격성은 왜 도태되었는가: 생존의 비용


생존을 위한 비용과 편익의 관점에서 볼 때, ‘공격성’은 유지 비용이 매우 높은 전략입니다. 야생에서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개체는 필연적으로 부상과 죽음의 리스크를 떠안게 됩니다. 상처 하나가 곧 감염과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야생의 환경에서, 호전적인 성향은 생존 확률을 급격히 떨어뜨리는 요인입니다.


반면 우리 인류는 조금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바로 ‘친화력’을 생존의 무기로 삼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읽고 감정 반응을 조절하며, 불필요한 충돌 대신 협력을 선택하는 능력은 집단의 생존율을 비약적으로 높였습니다. 개체 하나하나는 맹수보다 약할지 모르지만, 서로의 의도를 파악하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분업하는 집단 지성은 그 어떤 포식자보다 강력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기술 혁신과 문명 역시 천재 한 명의 독단적인 성과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앞선 세대의 지식 위에 새로운 지식을 쌓아 올릴 수 있었던 ‘협력의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인류 발전의 원동력은 경쟁심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무언가를 도모하려 했던 다정한 마음이었습니다.


흰자가 드러난 눈: 소통을 위한 진화적 결단


인간의 신체에는 이러한 다정함이 진화적으로 프로그래밍이 된 아주 흥미로운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눈’입니다. 침팬지를 비롯한 대부분의 영장류는 눈의 공막(흰자위)이 어두운색입니다. 이는 자신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감추어, 경쟁자에게 의도를 들키지 않으려는 위장의 전략입니다. 포식자의 세계에서 시선의 노출은 곧 약점의 노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유독 하얀 공막을 가지고 있어 눈동자의 움직임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이는 생존 경쟁에서 치명적인 불리함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대방이 쉽게 간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런 눈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감추는 것보다 드러내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시선을 통해 서로의 주의를 공유하고, 말하지 않아도 상호 간의 신뢰와 친밀감을 형성합니다. "내 눈을 바라봐"라는 말은 곧 "내 의도를 숨기지 않겠다"라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거짓과 속임수 대신, 눈 맞춤을 통한 의사소통의 빈도를 높이는 쪽으로 진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복잡한 사회를 구성하고 고도화된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생물학적 기반입니다.


다정함의 역설: 혐오와 비인간화의 기원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냉철하게 한 가지 모순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다정한 인류가 오늘날 이토록 서로를 미워하고, 차별하며, 잔인하게 공격하는 것일까요? 역설적으로 인간의 잔인함 역시 이 ‘다정함’에서 기인합니다.


우리의 뇌는 진화 과정에서 ‘우리’라고 규정된 집단에게는 무한한 애정과 헌신을 쏟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메커니즘은 동시에 그 범위 바깥에 있는 ‘그들’에게는 철저한 배타성을 발휘하게 만듭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내 나라, 내 민족을 지키기 위해 외부의 위협을 제거하려는 본능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만연한 양극화, 인종 및 지역 차별, 극우주의의 득세는 이러한 본능의 오작동을 보여줍니다. 권력자들은 종종 이 메커니즘을 악용합니다. 외부의 적을 설정하고 대중의 공포심을 자극함으로써 내부의 결속을 다집니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은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닌, 제거해야 할 해충이나 바이러스처럼 취급받는 ‘비인간화’를 겪게 됩니다. 우리가 집단 내부에서 다정해질수록, 집단 밖을 향한 혐오는 더욱 날카로워지는 비극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접촉과 교류: 만들어진 혐오를 넘어서


지금 인류는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기술적 진보도 인간 내면의 혐오와 갈등을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멸종하지 않고 번영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던 본연의 생존 전략인 ‘다정함’을 재정의해야 합니다.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지만 강력합니다. 바로 ‘접촉’과 ‘교류’입니다. 뇌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타인을 적으로 인식하는 회로는 그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순간, 뇌는 상대방을 ‘외부인’이 아닌 확장된 ‘우리’의 범주로 재분류하기 시작합니다.


물리적 거리를 좁히고 심리적 장벽을 허무는 사회적 접촉은 단순한 도덕적 캠페인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류라는 종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문화가 다르고, 신념이 다르고, 출신이 다른 사람들과 섞여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저 사람도 나처럼 가족을 사랑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똑같은 인간이구나"라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결국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인데, 그 생존의 키워드는 다름 아닌 ‘포용’이었습니다. 혐오와 배제가 팽배한 시대일수록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타인과 눈을 맞추며 흰자를 보여주던, 그리하여 서로를 믿기로 선택했던 다정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양성을 수용하고 우리의 경계를 넓히는 일, 그것이 인류가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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