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남자는 중요한 순간에 늘 엉뚱한 소리를 할까. 현실의 문제 앞에서 이성을 앞세우다 여자에게 질책을 받고, 때로는 멍청이 취급을 받기도 한다.
왜 그런 걸까.
그 차이는, 아마도 살아온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남자는 성장하면서부터 세상을 부딪치며 배운다.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직접 몸으로 이치를 익힌다. 세상을 하나의 문제처럼 여기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관계는 ‘내 편’이냐 ‘네 편’이냐로 단순화되기도 한다. 사람보다는 구조를, 감정보다는 원리를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부모, 특히 어머니들이 자녀를 돌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이런 성향이 조금 완화되었지만, 본질적인 기질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남자는 아들로 태어나 그대로 남자로 살아가며, 나이만 바뀔 뿐 삶을 대하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반면 여자는 비교적 한 공간에 머물며 관계 속에서 세상을 배운다. 어린 시절부터 주변 사람들과의 감정 교류를 통해 공감하고 배려하는 법을 익힌다. 여성은 ‘딸’로 시작해 ‘아내’, ‘며느리’, ‘엄마’, ‘학부모’, 때론 ‘직장 여성’으로 삶의 역할이 끊임없이 변하며 그만큼 경험의 폭도 깊고 넓어진다. 이렇게 다채로운 관계를 살아가며 그녀는 ‘세상의 이치’보다는 ‘인생의 이치’를 체득하게 된다.
그래서 문제를 마주했을 때, 남자는 상황을 분석하고 이치를 따지며 해결하려 하고, 여자는 먼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감하며 다가간다. 남자는 세상살이로, 여자는 인생살이로 문제를 대한다.
여기서 갈등이 생긴다. 남자는 정답을 말하려 하고, 여자는 마음을 읽으려 한다. 결국 말싸움으로 번지면, 남자는 논리를 내세우지만 여자는 경험과 감정으로 대응한다. 이럴 땐 백전백패다. 세상의 이치가 인생의 이치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논리보다 사람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결론은 단순하다. 실천에서 온다.
아무리 많은 이치를 알고 있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내 삶과는 무관하다. 사는 게 어렵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배움은 있지만 익힘이 없고, 앎은 있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배움이 부족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아는 것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있다. 실천 없는 이치는 타인의 것일 뿐이다. 수학 공식을 안다고 모든 문제를 잘 풀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삶의 가치는 자신이 어떤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잘 살아간다는 건, 결국 내게 주어진 삶의 과제를 묵묵히 풀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인생의 이치를 아직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누구나 부족한 존재다. 하지만 부족하기에 배울 수 있고, 실천 속에서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의 지혜는 멀리 있지 않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대했는지, 그리고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실천했는지—그 안에 담겨 있다.
지행합일(知行合一).
앎과 삶이 하나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