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국, 우리가 외면한 진실들
― 2025년 한국, 우리가 외면한 진실들
2025년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감정은 무엇일까? 희망이 아니라 피로, 연대가 아니라 분노, 대화가 아니라 단절이다. 우리는 ‘성장한 국가’에 살고 있지만, ‘함께 사는 사회’에는 살고 있지 않다.
갈등은 한국의 고유한 문화인가?
그렇지 않다. 한국 사회가 이처럼 극단적 분열에 빠진 데는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 정치 시스템의 후진성, 언론 환경의 상업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서구 선진국도 갈등은 존재하지만, 갈등을 ‘조정하고 완화하는 제도’가 작동한다. 반면 한국은 갈등을 증폭시키는 장치만 많고, 완충장치는 없다.
정치인은 갈등을 해소하는 리더가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조장해 표를 얻는다. 언론은 객관성보다 클릭수를, 사실보다 감정을 중시한다. 사법부는 권력의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공공기관은 무기력하다.
결국 한국 사회는 ‘공론장’이 사라지고, ‘진영의 함성’만 가득한 사회가 되었다.
왜 이토록 “싸우는 사회”가 되었는가?
① 정보는 넘쳐나지만, 지성은 사라졌다.
인터넷과 SNS의 정보 홍수는 진실을 오히려 가리며, ‘확증편향’만 키웠다. 누구도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며 살아간다. 서로를 설득하려는 사회가 아니라, 조롱하고 배제하려는 문화가 깊어진 것이다.
② 빠른 성공, 조급한 삶, 부족한 공동체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신뢰지수를 보인다. 이웃, 직장, 국가에 대한 신뢰는 바닥이고, 경쟁은 무한하다. 속도와 성과를 강조한 교육과 조직 문화는 이해와 공감의 언어를 제거해 버렸다.
③ 중산층의 붕괴와 미래 불안
2020년 이후 세계 경제의 불안과 고금리, 고물가, 고환율은 한국 서민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자산 격차는 심화되었고, 부의 대물림은 더욱 굳건해졌다. 특히 청년 세대는 ‘계층 상승 가능성’을 믿지 못하는 최초의 세대다. 고립된 개인은 혐오와 분노의 언어에 쉽게 휩쓸린다. 사회 전체가 ‘이기적 생존’에 몰입하고 있다.
진짜 위기는 '분열'이 아니라, '공감의 부재'다
진영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 지역 갈등은 증상일 뿐, 근본적인 위기는 ‘공감 능력의 소실’이다. 가족끼리 정치 성향이 다르면 식사 시간조차 불편하고, 친구와 사상이 다르면 대화를 멈춘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신념이 사회의 표준이 된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차단’하거나 ‘이탈’해버린다. 공동체의 유대는 사라지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았다: 누가 이 구조를 만들었는가?
우리 사회는 갈등과 혐오에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그 갈등의 뿌리가 무엇인지 성찰하지 않는다.
“왜 정치가 증오를 팔도록 놔뒀는가?”
“왜 언론의 선정적 보도를 중단시키지 못했는가?”
“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대화가 아닌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 앞에 우리는 무기력했고, 책임도 나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싸우지 않는 용기'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거창한 개혁이 아니다. 작은 양보, 말의 절제, 타인에 대한 예의, 다름을 견디는 힘이다.
“우리는 서로를 파괴하면서 절대 승리할 수 없다.”
“누군가를 이겨서 얻는 승리는, 곧 사회 전체의 패배다.”
“함께 살기 위해선, 혼자 이기려는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결론: 다시 ‘국가’라는 공동체를 말해야 할 때
한국의 2025년은 위태롭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갈등이 극에 달한 사회는, 그만큼 변화의 에너지가 축적된 사회이기도 하다. 지금이야말로, 국가란 무엇이고, 공동체란 무엇이며, 인간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다시 묻고 시작할 때다.
우리는 지금 폭주열차 위에 탄 승객들이다. 누구도 브레이크를 잡지 않으면, 결국 전부 함께 파괴될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방향타를 잡고 외칠 수 있다면, 그 하나의 목소리가 공동체를 살릴 수 있다.
“우리는 다시 함께 살아야 한다.”
“다름을 견디는 사회, 공감을 선택하는 정치, 느려도 함께 걷는 경제가 필요하다.”
그것이 진정한 국가의 품격이며, 우리가 꿈꾸는 내일이다.
― 편 가르기의 심리와 문화, 그리고 치유의 지혜
“내 편, 네 편”,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왜 인간 사회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가? 이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심리적 안정 욕구, 사회적 소속 본능, 그리고 현실적 생존 전략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자기 확신’에 의지해 살아가며, 그 확신은 소속된 집단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이는 진화적 생존 전략이기도 했고, 공동체 내 유대와 협력을 위한 정체성 기반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본능은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는 이성적 공론장을 해치는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간 본성 속의 편 가르기
심리학자 헨리 타지펠(Henri Tajfel)의 ‘집단 정체성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소속된 집단을 통해 자존감을 유지하고, 집단의 가치에 따라 타인을 평가하며 판단한다. ‘우리 편’에 대한 과도한 동일시와 충성은 곧 ‘그들’에 대한 거리두기, 심지어는 적대감으로 번지기 쉽다.
진화심리학적으로도 이는 이해된다. 원시시대의 인간은 생존을 위해 내 집단에 충실하고 외부 집단을 경계해야 했다. 오늘날에는 그 경계심이 정치적 진영, 지역감정, 세대 대립, 노사 갈등 등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한국 사회의 문화적 특수성
한국 사회에서 편 가르기는 더욱 고착화되기 쉽다. 몇 가지 문화적 특징이 이를 뒷받침한다.
(1) 정(情)의 문화, 패거리의 그림자
우리는 유교적 정서와 공동체 중심 문화를 바탕으로 ‘정’을 중시하는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이 ‘정’은 때로 객관적 판단을 흐리고, 자기 사람 감싸기, 패거리 정치로 왜곡된다. “잘못했어도 내 편이니까”라는 심리가 공정성을 훼손하고, 도덕적 책임의식보다 감정적 연대가 우선되는 분위기를 조장한다.
(2) 체면과 위계 중심의 의사결정
한국은 아직도 ‘상명하복’의 위계 문화가 뿌리 깊다. 공개적으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어려운 환경에서는 이견을 제기하기보다 ‘눈치껏 편을 드는 것’이 생존 전략이 되기도 한다. 결국 논리가 아니라 관계가, 원칙이 아니라 소속감이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이다.
(3) 진영 논리에 갇힌 정치와 언론
정치와 언론은 편 가르기를 증폭시키는 구조를 갖고 있다. 정쟁은 이슈를 소비하고, 갈등은 지지층을 결속시키는 수단이 된다. 진보냐 보수냐, 수도권이냐 지방이냐, 신세대냐 구세대냐—이런 구분은 현실의 다양성과 맥락을 무시한 채 단순하고 공격적인 대립 구도로 전락하고 있다.
가정과 조직에서 나타나는 편 가르기
가정을 예로 들어보자. 한 집안의 가장이 자식들 사이에 편을 가르고, 아내나 자녀를 차별하며 분열을 조장한다면 그 가정은 신뢰와 유대가 무너진다. 마찬가지로 조직에서도 리더가 ‘편 가르기’를 통해 줄 세우기를 하고, 충성심으로 성과를 평가한다면 창의성은 사라지고 탁월한 인재는 떠나게 된다.
리더십은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아우르는 역량이다.
지식사회와 미래 경쟁력의 관점
고(故) 이건희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전 세계 인재를 영입하라, 출신과 배경은 상관없다”라고 강조했다. 이는 단지 경영적 판단이 아니라, 편 가르기 사고로는 글로벌 경쟁에서 승산이 없다는 통찰이었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지식과 아이디어가 새로운 생산 수단"이라 말하며, 이를 가진 사람을 ‘뇌 본가(Brain Owner)’라 불렀다. 이 시대에 중요한 것은 배경이 아닌 능력과 비전이며, 편을 가르는 일은 사회 전체의 에너지와 창의성을 고갈시킬 뿐이다.
편 가르기의 심리적 동기와 자기 방어
편 가르기를 주도하는 사람일수록 내면의 불안이 크다. 자기 약점을 감추거나, 홀로 서는 자신이 없기에 다수 속에 숨어 심리적 안전을 확보하려 한다. 이들이 자주 쓰는 방어기제는 이중잣대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처럼,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가혹하다. 이는 미성숙한 자아에서 비롯된 방어적 인지 체계이며, 궁극적으로 공동체 신뢰를 파괴한다.
극복의 열쇠: 성찰, 관점 전환, 시스템적 사고
(1) 자기 성찰과 신념의 의심
자신의 신념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잘못된 확신이 진실을 가리지는 않는지 돌아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신념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 그 사람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2) 관점 바꾸기의 훈련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틀린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인지적 유연성은 민주주의의 핵심 덕목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철학자 존 롤스가 말한 ‘무지의 베일’ 개념이다. 만약 내가 어느 편이 될지 모른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보다 공정한 시선을 갖게 된다.
(3) 시스템적 사고의 필요
문제를 단순히 ‘그들의 문제’로 보지 말고, 사회적 구조, 역사적 맥락, 문화적 습관까지 통합해 생각해야 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 되었는가’를 묻고, 문제의 배경과 근원을 인식하는 능력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출발점이다.
맺음말: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편 가르기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심리적 구조이자 문화적 습관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뜨릴 수 있는 열쇠 또한 한 사람의 성찰과 용기로부터 시작된다.
걸림돌로 쓸지, 디딤돌로 쓸지는 내 하기에 달렸다. 그리고 그 변화는 ‘너’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공존의 방식을 찾는 편에 서야 한다. 진정한 ‘우리’는 ‘너와 나의 다름’을 이해할 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