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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symbiosis)이란? 과연 공생은 가능한가?

by 엠에스

<공생(symbiosis)이란 무엇인가? 과연 공생은 가능한가?>


인간 혐오의 확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혐오는 강력한 자극제가 되어 일상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특정 집단에 대한 적대감이 공공연하게 표출되며, 타인을 배척하는 언어가 인터넷 게시판과 SNS를 가득 채운다.


개인 간 갈등에서 시작된 감정이 점차 특정 계층에 대한 불신과 혐오로 확대되고, 결국 인간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 태도로 변질된다.


인간 혐오증의 뿌리는 우리의 ‘이분법적’이고 ‘편향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주변을 ‘내 편’과 ‘적’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강했다. 현대사회에서는 단순한 구분이 오히려 복잡한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는 사용자가 자신의 의견에 공감하는 사람들만 만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관심사에 맞춰 정보를 제공하며, 이 과정에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 강화된다. 다양한 관점을 접할 기회가 줄어들면서, 반대 의견을 받아들이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결국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된다. 함께할 수 없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이다.


공생이란?


공생(共生, symbiosis)은 흔히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이익을 주고받는 이상적 상호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단순한 친밀이나 조화의 표상이 아니라, “타자와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플라톤 이래로 철학은 ‘공동의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탐구해 왔고, 근대 이후의 철학자들은 고독한 인간 실존과 타자와의 관계를 긴장 속에서 사유해 왔습니다.


공동체와 공생: 배제의 그림자


공동체(共同體)는 안정과 연대를 제공하지만, 언제나 배제의 원리를 내포합니다. 동일한 역사, 언어, 문화, 생활양식을 공유하는 집단은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동시에 바깥의 타자를 소외시키기 쉽습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집합적 자아’나 부르디외의 ‘아비투스(habitus)’ 개념은 이 동질성의 작동을 설명하지만, 동시에 “그렇다면 그 외부인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레비나스는 “우리”라는 경계가 강화될수록 제삼자가 배제되며, 이는 곧 폭력의 위험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국가는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타민족을 적으로 규정하고, 심지어는 전쟁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공생은 단순히 공동체적 이해를 넘어, 타 집단과 함께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하는 정치적·윤리적 기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독한 실존과 공생의 요청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현존재(Dasein)’로 규정하며, 죽음을 향한 고독한 실존에 주목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 또한 신 앞에 선 단독자의 결단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사유는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을 부각했지만, 타자와의 연대라는 차원을 거의 다루지 않았습니다.


공생은 이러한 고독한 실존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섭니다. 각 개인이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타자의 취약성과 고통에도 민감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생은 고독한 자각 위에 세워진 타자를 향한 응답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 타자의 얼굴과 정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face)’ 개념을 통해 윤리의 근원을 설명했습니다. 타자와의 대면은 나로 하여금 그의 취약성에 책임을 지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이인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제삼자를 향한 시선을 요청합니다. “나와 타자만을 고려할 때 제삼자는 언제나 배제된다. 정의는 제삼자를 향한 책임에서 비롯된다”는 그의 통찰은, 공생이 단순한 친밀이 아니라 정의와 책임의 정치학임을 보여줍니다.


아렌트: 공공영역과 다원성의 회복


한나 아렌트는 근대 사회가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homo laborans)’로 축소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녀에게 진정한 인간성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공공영역(public realm) 속에서 드러납니다. 이 영역은 사람들이 모여 말하고 행동하며 서로의 독자성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끊임없는 소통과 갈등 조율 속에서 다원성이 구현됩니다.


아렌트에게 공생은 단순한 생존 전략이 아니라, 차이를 간직한 채 함께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양식입니다. 이는 닫힌 공동체의 배타성과 대립하며, 열린 정치적 공간을 요청합니다.


생태학적 공생: 자연의 거울


공생은 원래 생물학적 개념이기도 합니다. 지의류(地衣類)는 조류와 균류가 결합하여 서로 생존을 가능케 하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벌과 꽃의 상리공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진화론 역시 단순한 ‘적자생존’만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진화생물학은 협력(cooperation)과 상호의존이 생존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인간 사회에서도 경쟁 일변도의 사고를 넘어, 상호 보완적 발전의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근대 국가, 폭력, 그리고 공생적 전환


역사는 배타적 공동체 논리가 어떻게 폭력으로 이어졌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전체주의, 홀로코스트, 제국주의, 식민지배는 모두 “우리”를 위해 “그들”을 억압했던 사례들입니다. 그러나 21세기 인류는 기후 위기, 전염병, 난민, 글로벌 자본 이동 등 초국가적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더 이상 고립주의적 생존 전략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공생은 단순한 윤리적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 생존 조건이자 국제 정치의 새로운 패러다임입니다. 기후 협약, 국제 NGO, 다문화 사회 실험 등은 모두 공생적 전환의 구체적 장치로 기능합니다.


공생의 원리: 차이를 인정하는 함께-살기


공생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타자성 존중 – 동일화가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

2. 책임과 정의제삼자를 향한 윤리적 책임.

3. 공공영역의 확장 – 소통·참여·예술·교육을 통한 다원성의 장.

4. 고독한 실존의 자각 – 자기 유한성 인식을 통해 타자에 민감해지기.


공생의 정치학과 윤리학


오늘날 공생은 단순한 개인 윤리를 넘어 글로벌 정치와 사회 제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요청됩니다. 다문화 공동체,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은 경제적·문화적 차이를 포용하며 공생적 모델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 우리는 전 세계의 타자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들과 어떤 책임의 관계를 맺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피할 수 없습니다.


결론: 공생, ‘타자와 함께’ 다시 쓰는 인간학


공생은 철학적·실존적 태도이자 정치적 실천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이 아니라, 배제와 폭력의 논리를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인간학적 요청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타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이중성 속에서 공생은 우리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쉽지 않은 길이지만, 차이를 인정하며 타자와 더불어 사는 연습 속에서만 조금씩 실현될 수 있습니다.


공생은 곧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이유와 방식을 묻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인간됨의 진정한 가능성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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