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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

by 엠에스

<루소의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


사랑할 대상이 전혀 없는 세계를 상상하다


“이 세상에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물음은 단순한 상상 실험을 넘어 인간 본성과 사회적 관계의 근원을 묻는다. 우리는 누군가를 돌보고, 선한 일을 하며, 베푸는 행위에서 큰 기쁨을 얻는다. 그런데 그 기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인가, 아니면 사회가 부여한 가치인가? 이 질문은 고독과 공동체, 선과 악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을 촉발시킨다.


방랑자이자 문제적 인물, 장 자크 루소의 삶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제네바에서 태어나 동판 조각사의 수습공으로 일하다 곧 방랑의 길에 들어섰다. 음악가를 꿈꾸었으나 실패했고, 직접 고안한 새로운 기보법도 주목받지 못했다. 귀부인들의 후원 덕분에 근근이 살아가며, 곳곳을 떠돌았다. 파리에서 디드로, 볼테르 등 당대 계몽주의자들과 교류했으나, 아첨하거나 깊이 협력하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으며,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평생을 떠돌며 사상을 다듬어 나갔다.


‘계몽 체험’을 이끈 뱅센으로 가는 길


1749년, 뱅센 감옥에 수감 중인 디드로를 찾아가던 루소는 신문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서 “학문과 예술의 부흥이 도덕을 정화하는가?”라는 디종 아카데미의 현상 문제를 접한다. 그는 길가에 주저앉을 만큼 강렬한 깨달음을 얻었고, 훗날 “순간적으로 수천 개의 빛줄기가 정신을 스쳤다”라고 회고했다. 이 사건은 그가 작가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파격적인 답안: 문명이 인간을 타락시킨다


루소의 답안은 당대 계몽주의자들에게 충격이었다. 그들은 학문과 예술이 인간을 고양한다고 믿었으나, 루소는 오히려 문명과 제도가 인간을 부패시키고 약화시킨다고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선하게 태어나지만, 사회 제도가 경쟁과 시기, 불평등을 조장하여 악을 낳는다.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동류에 대한 연민과 자기 보존의 본능으로 살아가며 싸움보다는 공존을 선택한다. 그러나 공동체가 형성되면 소유와 권력의 문제가 불거지고, 그때부터 인간은 타락하기 시작한다.


루소의 논문은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결국 1등으로 선정되었고, 그는 무명의 방랑자에서 일약 철학계의 명사로 떠올랐다.


사회적 갈등과 루소의 방황


18세기 유럽은 봉건적 질서와 굶주림이 여전했지만, 지식인들은 예술과 학문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 믿었다. 루소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그는 사회 제도와 문명을 불신했고, 그로 인해 끊임없는 비판을 받았다. 자녀 다섯 명을 고아원에 맡기는 등 삶의 모순을 안고 있었으며, 말년에는 파리 근교에서 은둔하며 식물 채집에 몰두했다. 그의 은둔은 자연 상태의 삶을 향한 열망이자, 한편으로는 사회와 불화한 끝의 고립이었다.


‘인간은 본래 선한가?’를 둘러싼 논쟁


루소의 핵심 질문은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였다. 그는 악의 근원을 사회적 관계와 제도 속에서 찾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 문제는 철학적 물음에서 심리학적 탐구로 확장되었다. 특히 20세기 후반, 로버트 와이스(Robert Weiss)의 ‘고독 연구’는 루소의 명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검증했다.


로버트 와이스의 ‘고독연구’와 루소 비판


와이스는 현대 도시에서 고독이 커다란 사회문제라고 분석했다. 루소의 논리에 따르면, 고립된 개인은 오히려 더 선하고 자유로워야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도시의 고독한 사람들은 행복하기보다 불안과 우울에 시달렸다.


와이스는 인간에게 두 가지 고독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관심을 받지 못하는 고독’, 다른 하나는 ‘관심을 줄 대상이 없는 고독’이다. 특히 후자가 인간에게 더 큰 절망을 준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반려동물을 키우며 돌봄의 기회를 되찾고, 이를 통해 자기 존재의 의미를 확인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


진화론적 관점에서도 인간은 집단 속에서만 생존할 수 있었다. 원숭이와 유인원들처럼, 인간 역시 사회적 유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고독은 자기 인식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타인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낳는다. 결국 인간은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베푸는 기쁨과 선행의 동기


누군가를 돕고,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우리는 자기 자신도 충만해진다. 이는 단순한 이타심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된 보상 체계라 할 수 있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괴롭지만, 사랑할 대상조차 없는 것은 더 깊은 절망을 낳는다”는 와이스의 지적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타인을 돌보며 살아야 함을 잘 보여준다.


결론: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루소는 문명과 제도가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했지만, 그 전제에는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낭만적 믿음이 있었다. 현대 심리학은 이를 수정한다. 인간은 본래 선하거나 악하다기보다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사랑하고 돌보며 선을 실현할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랑할 대상이 하나도 없다”는 상상은 인간의 본성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우리는 타인을 돌보며 비로소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 베풂의 기쁨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결국 인간은 고독 속에서 쇠약해지고, 관계 속에서 살아난다. 루소의 질문과 현대의 연구가 만나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며,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때 가장 인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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