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은 “근주자적, 근묵자흑(近朱者赤, 近墨者黑)”이라 하였습니다.
붉은 인주를 가까이하면 자연스레 붉은빛이 물들고, 먹을 가까이하면 어느새 검은빛이 배어든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한 색의 비유가 아니라, 인간관계와 삶의 태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말입니다. 곧 선한 사람과 가까이하면 선해지고, 악한 사람과 가까이하면 악에 물들 수 있다는 교훈이지요.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늘 주변 사람들의 말과 행동, 가치관에 영향을 받습니다. 습관처럼 스며드는 영향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우리 인생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친구를 가려 사귀라”거나 “사람이 곧 거울이다”라고 말한 것도 다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
어느 날 한 스승과 제자가 길을 걷다가, 길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발견했습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그것을 주워 오라 하며 물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종이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향을 싸던 종이입니다. 아직 향내가 남아 있으니 알 수 있습니다.”
이후 길을 가다 이번에는 새끼줄을 발견하였습니다. 스승은 다시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그건 어떤 줄이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생선을 묶었던 줄입니다. 비린내가 남아 있으니 분명합니다.”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사람도 이와 같으니라. 원래는 누구나 깨끗하고 순수하게 태어나지만,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삶이 향기로워지기도 하고, 때로는 비린내로 가득해지기도 한다. 어진 이를 벗하면 덕과 의리가 높아지고, 어리석은 이를 가까이하면 재앙과 죄가 따르게 마련이다. 종이는 향을 가까이하여 향내가 배고, 새끼줄은 생선을 가까이하여 비린내가 밴다. 사람도 이처럼 만나는 이에 따라 물들게 되는 법이다.”
현대 사회의 사례
(1) 청소년과 또래 집단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청소년의 가치관과 행동은 부모보다 또래 집단의 영향을 더 크게 받기도 합니다. 친구가 공부에 열심인 아이는 자연스레 학업 태도가 좋아지고, 반대로 일탈 집단과 어울리면 금세 부정적 습관에 물들기 쉽습니다. “내가 누구와 어울리느냐”는 곧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가느냐”를 결정하는 셈입니다.
(2) 직장 내 문화
회사 생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긍정적이고 협력적인 동료와 함께하면 성과뿐 아니라 직무 만족감도 커집니다. 반대로 불평과 냉소가 가득한 팀 분위기 속에서는 개인이 아무리 밝고 성실해도 금세 지치고 무기력해집니다. 조직문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와 같아서, 누구나 그것을 마시며 영향을 받게 됩니다.
(3) SNS와 디지털 네트워크
오늘날에는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아도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가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혐오와 분노가 넘치는 공간에 오래 머물면, 본래 성격과 관계없이 점점 공격적이고 편협해집니다. 반대로 따뜻한 경험을 나누고 지식을 공유하는 온라인 네트워크에 참여하면, 사고가 확장되고 인간관계도 건강해집니다. 디지털 시대의 ‘향내 나는 종이’와 ‘비린내 나는 새끼줄’이 바로 이런 환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학적·사회적 성찰
플라톤은 『국가』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공동체 안에서만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공자 또한 “군자는 군자를 벗하고, 소인은 소인을 벗한다(君子以朋友輔仁, 小人以朋友輔惡)”고 말하며, 벗의 선택이 곧 인격의 완성을 좌우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길을 정하고, 나아가 사회의 질서와 문화까지 형성해 갑니다.
오늘날 사회학에서도 ‘환경적 요인’과 ‘사회적 네트워크’의 힘을 강조합니다. 청소년이 어떤 또래 집단에 속하느냐에 따라 학업 성취나 인생의 궤적이 달라지고, 직장인 역시 긍정적 동료와 함께하면 성과와 만족감이 높아진다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즉, 인간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빛나거나 흐려지는 존재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우리는 지금 누구와 함께하고 있습니까? 나의 곁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나를 더 깊고 넓게 만드는가, 아니면 점점 소모시키고 있는가. 그리고 동시에,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사람인가. 향기 나는 종이인가, 아니면 비린내 나는 새끼줄인가.
결국 인생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자, 동시에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근주자적 근묵자흑’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인연은 우리를 물들이지만, 우리가 또한 누군가의 삶을 물들이는 붉은 주(朱)가 될 수도 있고, 검은 묵(墨)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좋은 인연을 가까이하며, 또 나 스스로 누군가에게 향기를 남기는 존재가 된다면, 우리 삶은 한층 더 아름답고 값지게 빛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