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하는 인간’으로의 진화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인류가 지구 위에 등장한 지는 약 300만 년,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한 지는 약 30만 년이 지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의 조상은 수십만 년 전부터 이미 현대인과 거의 비슷한 뇌 용량(약 1,350cc)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문명과 과학기술의 폭발은 불과 수천 년, 산업혁명 이후라면 고작 200~300년밖에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인간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그 거대한 뇌를 ‘절전 모드’로 두었을까?
뇌의 진화는 생존 중심이었다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나 로빈 던바(Robin Dunbar)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처음부터 과학과 철학을 위한 기관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발달했다. 즉, ‘무엇을 먹을까’, ‘누가 내 편인가’, ‘누가 나를 공격할까’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뇌는 발달했다. 수학이나 철학, 기술 혁신보다는 사교·섹스·전쟁·협력이 우선이었다. 이 시기의 인간은 ‘더 많이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더 빨리 반응하는 자’가 살아남았다. 위험 앞에서 사유보다는 반사신경이 중요했고, 집단 내에서 눈치와 위계에 민감해야 했다. 그러니 인류의 뇌는 우선적으로 ‘사회적 생존기계(Social survival machine)’로 진화했다.
사회구조가 뇌의 가능성을 묶어 두었다
또 하나의 요인은 사회적 제도였다. 농경이 시작된 약 1만 년 전 이후, 인류는 안정된 식량 생산과 함께 계급과 권력의 구조를 만들었다. 강력한 신분제와 종교 권위가 사회를 지배했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해지는 시대가 이어졌다.
아무리 뛰어난 두뇌를 가졌더라도 ‘위로 올라갈 사다리’가 막혀 있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체제 전복의 씨앗으로 여겨졌고, 혁신보다 복종이 생존을 보장했다. 결국 창의성은 억눌리고,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문화로 굳어졌다.
진화의 속도보다 문명의 속도가 빨랐다
진화심리학자 앨런 밀러(Alan Miller) 등의 견해처럼, 인간의 뇌는 약 1만 년 전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단 10세대 만에 인류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수렵에서 농경으로, 농경에서 공장노동으로, 다시 서비스와 정보 산업으로. 이런 변화는 진화의 시간으로 보면 눈 깜짝할 사이다. 결국, 우리는 여전히 ‘1만 년 전의 뇌’로 21세기 사회를 살아가는 존재다. 이 격차는 현대인의 불안, 피로, 그리고 ‘생각하기 싫음’의 원인 중 하나다. 우리의 신경 구조는 여전히 즉각적인 보상과 사회적 인정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간은 원래 ‘생각을 회피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생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한다.”
이 말은 파스칼(Blaise Pascal)이 남긴 통찰이다. 그는 『팡세』에서 인간의 불행은 “자기 방 안에서 고요히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라고 했다. 깊은 생각은 불편하다. 자신과의 대면을 요구하고, 불안과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TV, 스마트폰, 음악, 술자리로 머리를 끊임없이 채운다. 하지만 그것은 ‘사유의 풍요’가 아니라 ‘소음의 포식’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사유의 삶』에서 이렇게 말했다.
“생각하지 않으려는 습관이야말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낳는다.”
사유를 포기한 인간은 자기 판단을 타인에게 위탁하고, 결국 도덕적 판단력마저 마비된다.
생각의 부재를 낳는 사회적 요인들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지만, 그것이 곧 ‘생각의 시대’ 임을 뜻하지 않는다. 학교는 여전히 암기와 정답 중심의 평가로 사고의 틀을 고정시킨다. 기업은 창의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지시와 통제의 체계를 강화한다. 대중문화와 소비시장은 즉각적 쾌락과 편리함을 제공하며, 느리고 불편한 사유의 과정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든다.
결국 현대인은 “생각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었지만, 생각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기술이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고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뇌를 켜는 소수’가 문명을 이끈다
그럼에도 역사는 언제나 ‘생각하는 소수’에 의해 전진해 왔다. 소크라테스, 갈릴레이, 뉴턴, 다윈, 마리 퀴리, 스티브 잡스 등은 각자의 시대에서 “왜?”라는 질문 하나로 세상을 바꾸었다.
그들은 불편함을 감수했고, 기존의 권위와 싸웠으며,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을 견뎠다. 문명은 결국 이들 ‘소수의 사유자들’이 만들어낸 부산물이었다. 다만, 그들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을지는 우리 각자의 선택이다.
AI 시대, 다시 ‘생각하는 인간’으로
오늘날 인공지능(AI)은 인간의 계산과 분석 능력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이제 인간이 기계보다 나은 점은 오직 창의적 사고, 통찰, 상상력, 윤리적 판단뿐이다. 즉,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뇌를 “구석구석까지 써야 하는 시대”다. 단순한 반복 노동이나 기계적 사고는 더 이상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AI와 자동화가 확산될수록, 인간은 ‘사유하지 않으면 퇴화하는 존재’가 된다. 앞으로의 문명은 ‘기술의 격차’보다 ‘사유의 격차’가 더 큰 불평등을 낳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지 않는 다수’와 ‘사유로써 세상을 재창조하는 소수’ 사이의 간극 말이다.
늦었지만, 지금 뇌를 써도 늦지 않다
우리가 수십만 년 동안 뇌를 생존과 사회적 경쟁에만 썼다면, 이제는 그 에너지를 ‘이해하고 창조하는 힘’으로 돌려야 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나 산업혁명은 ‘뇌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의 용기’ 때문이었다.
결국 문제는 뇌 용량이 아니라 사고의 습관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가 마지막으로 정말 깊이 생각했던 때는 언제인가?”
그 질문 앞에서 멈칫한다면, 지금이 바로 다시 뇌를 켜야 할 순간이다. 생각은 피로하고 번거롭지만, 그 안에는 놀라운 쾌감이 숨어 있다. 이해의 순간, 통찰의 짜릿함, 문제를 풀어낸 기쁨은 삶을 깊게 만든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말처럼, 오늘 이 순간 내 안의 뇌의 잠금장치를 풀어 보자. 우리가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인류의 진화는 멈추지 않는다. 진정한 인간의 역사는 “생각하는 용기”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