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한국 사회에는 ‘미꾸라지 용 된다’는 말이 있었다. 그 말에는 계층과 신분, 출발선이 어떻든 간에 열심히 노력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곧 ‘기회의 나라’로서의 대한민국, 그리고 개인의 능력과 의지를 중시하던 시대정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속담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사회는 더 이상 미꾸라지에게 용이 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자수성가(自手成家)는 전설이 되었고, 상속이 현실이 되었다. 이제는 부모의 지갑과 정보력, 할아버지의 자산이 자녀의 미래를 결정하는 시대다. 다시 말해, ‘능력의 사회’에서 ‘상속의 사회’로 이행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노력보다 ‘출발선’이 좌우하는 사회
오늘날 아이의 성적은 단지 아이의 머리와 노력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뒤에는 ‘엄마의 정보력’이 있고, ‘아빠의 무관심’, 그리고 ‘할아버지의 경제력’이 있다. 명문 학군 근처의 집 한 채가 곧 사교육비보다 값지며, 좋은 정보는 좋은 대학으로 이어진다. 공부를 잘하는 법보다, 어디에 살아야 공부를 잘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해진 사회다.
자녀의 교육은 부모의 자산 규모를 반영하고, 부모의 자산은 다시 부동산 가격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 부동산이 곧 교육이 되고, 교육이 곧 계층의 보증서가 된다. 이렇게 사회는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나뉘고, 출발선의 차이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 현상은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회의 나라’라 불리던 미국조차 부모의 부와 자녀의 교육 수준이 거의 직선에 가깝게 상관된다는 통계가 있다. 세습은 이제 국경을 넘은 세계적 흐름이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끝에는 역설적으로 ‘세습 자본주의’가 자리 잡았다.
자수성가 신화의 붕괴
산업화 시기까지만 해도 ‘자수성가’는 국가의 공식 서사였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공부하고 일하면, 농촌의 미꾸라지도 도시의 용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가능성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경제 구조가 변했기 때문이다. 노동으로는 부를 쌓을 수 없고, 자산으로만 자산이 불어나는 시대. 토지와 부동산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간극은 노동소득의 수십 배 이상으로 벌어지고 있다. 땀 흘려 일해도 집 한 채 사기 어렵고, 상속받은 이는 노력하지 않아도 여유로운 세상.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상속주의 사회’다.
한때 능력주의(meritocracy)는 공정한 경쟁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능력주의는 이미 “금수저를 위한 정당화 장치”가 되었다. 노력의 결과보다 출발선의 유무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면, 그 사회의 정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불평등이 낳는 무기력의 시대
이처럼 기회가 세습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이 커진다. ‘공부해도 안 된다’, ‘열심히 일해도 내 집은 못 산다’, ‘결국 돈 있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야 성공한다’는 인식이 사회 전체로 번지면 노력의 동기는 사라지고, 청년의 희망은 꺼진다.
그 결과, 사회는 두 개의 길로 나뉜다. 하나는 기득권층의 폐쇄적 연대 — 부의 대물림을 합리화하고 방어하는 길, 다른 하나는 탈출과 회피 — 포기, 이민, 소비적 쾌락으로 도피하는 길이다.
이런 사회에서 혁신과 창의성은 자라지 않는다. ‘위로 향하는 사다리’가 부러진 사회에서는 누구도 모험하지 않는다. 결국 사회는 정체되고, 공동체의 에너지는 사라진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이 겪고 있는 가장 깊은 위기다.
정치와 제도의 책임
정치의 본질은 ‘기회의 평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권은 여전히 단기적 인기 정책과 감정적 분열에 몰두한다. 부동산 정책은 표 계산의 도구가 되었고, 교육개혁은 이해집단의 벽 앞에서 멈춰 섰다. 그 사이 부의 세습은 합법적으로 정착했다.
상속세·증여세 제도의 허점, 공교육의 불평등, 주거비 폭등, 사교육 시장의 과열. 이 네 가지가 오늘날의 ‘세습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축이다. 어떤 정치세력도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이익집단의 반발이 두렵고, 단기적인 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의 부재가 “계급 이동의 사다리를 부수고 있는 진짜 원인”이다.
교육의 회복 — 공정의 마지막 보루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씨앗은 여전히 교육 안에 있다. 교육이 단지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의 문을 여는 통로라면, 우리는 그 문을 다시 세워야 한다.
공교육의 강화, 지역 간 격차 해소, 무상 돌봄과 기초학력 복원. 이런 작은 개혁들이 바로 ‘새로운 사다리’가 될 수 있다. 능력 있는 아이가 부모의 재산과 무관하게 자신의 잠재력을 펼칠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작동한다. 평준화가 아니라 능력 있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
교육은 국가가 세습사회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그것이 무너진다면, 우리 사회의 공정성은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철학적 성찰 — 정의란 무엇인가
존 롤스(John Rawls)는 『정의론』에서 말한다.
“사회 제도의 불평등은 가장 불리한 사람에게 이익이 될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
그가 말한 정의의 원리는 오늘날 세습사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질문이다.
지금의 불평등은 단지 경제적 격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불평등, 존재의 불평등이다. 한 사람의 노력과 가능성이 태어날 때부터 규정된다면, 그 사회는 더 이상 ‘정의로운 사회’라 부를 수 없다.
따라서 사회의 과제는 단순히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출발선의 정의를 회복하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곳에서 시작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누구나 달릴 기회는 공평해야 한다.
새로운 사회계약의 필요
이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회는 개인의 몫인가, 사회의 책무인가?”
만약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원한다면, 그 자유는 공정한 조건 위에서만 성립해야 한다. 그것이 ‘능력의 자유’와 ‘결과의 평등’을 잇는 다리다.
국가는 기회의 평등을 제도적으로 설계해야 하고, 시민은 그 평등을 유지하기 위한 연대의 윤리를 배워야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재산만이 아니라 공정한 사회의 가치를 물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사회계약’이다.
결론 — 다시 ‘미꾸라지 용 된다’를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역사는 언제나 불평등의 벽을 허물어 왔고, 한 세대의 용기는 다음 세대의 기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결코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는다. 정치적 의지, 사회적 연대, 교육의 회복이라는 공동의 결단이 있어야만 한다.
다시 ‘미꾸라지 용 된다’는 말이 통하는 세상을 꿈꾸어 보자. 그것은 단지 한 개인의 성공 이야기가 아니라, 공정과 정의가 살아 있는 사회의 회복을 의미한다.
미꾸라지가 용이 되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용조차 스스로의 힘으로 날지 못하게 된다. 우리의 선택은 분명하다 — 세습의 사회를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공정의 사회를 다시 세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