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곡 많은 드라마
부부의 일생은 함께 보내면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자 생활에서 중점을 두는 가치가 조금씩은 다르다. 치중해서 살아가는 가치를 이해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와 격려를 한다면 호의적인 관계 유지로 무난한 결혼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입장만을 이해해 주기를 원한다면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적 상황에 맞는 연령대별 부부생활을 평균하여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고 배려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오늘날 결혼 연령이 점차 늦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을 결혼 적령기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결혼을 통해 얻고자 하는 가치나 목적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여성은 ‘사랑이라는 감정적, 표현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하고, 남성은 ‘취업이나 사회적 성공이라는 현실적, 도구적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 시기 여성들은 연애 시절의 달콤함을 평생 이어가고 싶어 하며, 사랑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직장 등 진로를 조정하기도 한다. 반면 남성들은 여전히 취업난과 사회적 압박 속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우선이 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유교적 책임감으로 남성은 가족 부양자라는 책임감으로 사랑도 현실적 기반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내 집 마련이라는 현실의 벽으로 인해 결혼 시기가 점점 더 늦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여성이 내 집 마련을 공동소유로 분담하기도 하며 남녀 모두 취업과 경제적 안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추세가 늘어가고 있다.
결혼 전부터 서로 경제활동에 대한 기대를 조정하거나, 각자의 커리어를 함께 고민하는 ‘동반자’ 개념이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인식은 여전히 생활 저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에 형성되는 부부의 관계에서도 이 차이가 종종 갈등의 씨앗이 된다.
결혼 후 신혼생활이 끝나고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30대 후반에는, 부부가 본격적으로 각자의 역할을 확립한다. 여성들은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가정 몰입도가 극도로 높아진다. 살림살이와 자녀 양육에 대한 모성 본능으로 어느새 가족 외에는 인생이 없는 것처럼 느낄 만큼 온 우주가 가정에 집중된다.
남편과 아이가 있는 가정이 삶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에 남편에게도 애정 어린 보살핌과 관심을 기울이고 싶어 하지만 실제는 여력이 부족하여 후 순위로 밀린다. 육아와 살림은 24시간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엄청난 정신과 체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 남성은 세상살이에 박차를 가한다. 회사에서 자신의 역량을 증명해야 하고 동료들과 경쟁에서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30대는 직장에서 중간 관리자로 올라서는 첫 승진의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에 가정보다는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아진다. 가정을 위하여 성공과 출세가 인생에서 중요한 목표로 자리 잡고, 그 목표를 위해 밤낮없이 노력한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가족을 위해 일한다는 남편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실제로 함께 보내는 시간과 정서적 교류가 부족해지니 불만이 쌓인다. 아내는 결혼 전에 품었던 함께하는 사랑에 대한 기대가 점차 줄어들고, 남편은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데도 왜 인정받지 못하나 하는 서운함을 느끼게 된다.
여성의 결혼과 가족이 표현적 감성적 기능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면, 남성의 결혼과 가족은 도구적 기능에 중점을 둔다는 말이 여기서 비롯된다. 한창 가족을 위한 돈벌이에 매진하는 남편과, 가정 안의 애정과 협력을 중시하는 아내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엇갈림과 갈등의 소지가 많다.
즉 남편은 세상살이에 아내는 인생살이에 집중한다. 많은 부부가 이 시기에 대화 부족, 육아 부담, 경제적 스트레스 등으로 다투며, 문제 해결 방식을 찾지 못하면 상호 비난과 원망이 깊어진다. 오늘날 수많은 직장에서 육아 휴직에 대한 제도가 활성화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시기에 가사 분담을 통하여 상호 이해하고 배려하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갱년기가 다가오면서 많은 신체적 변화는 물론 심리적 변화가 크게 일어난다. 20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젊지도 않고, 30대처럼 눈부신 성취의 시기도 지나가면서,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체력도 예전만 못하고 주름이나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면서 삶의 무게감이 와닿는다.
이 시기를 흔히 사추기(思秋期)라고 부르는데, 이는 10대의 사춘기(思春期)와 비슷하게 정체성 혼란과 심리적 변화를 겪는다. 방향이 가을처럼 쓸쓸하고 허무한 기운을 동반한다는 뜻이다.
여성들은 자녀들이 통제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심을 키우는 것을 지켜보면서, 키웠지만 결국 아이들은 자신의 길을 가는구나 깨달음을 얻는다. 30대에 쏟았던 전력질주가 조금 허무하게 느껴질 수가 있다. 살림도 예전처럼 열과 성을 다하기보다는, 최소한 욕먹지 않을 정도만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체념이나 여유가 생기기도 한다.
남편에 대해서는 그동안 기대와 실망, 좌절, 원망, 분노 등을 반복했기에 어느덧 무심해지거나 포기한 듯한 감정이 쌓인다. 여성들의 경우 친구 모임이나 동창회가 가족보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울타리가 되기도 한다.
남성들은 세상살이에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내가 일벌레로만 살진 않았나 하고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가정과 사회 양쪽 모두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려 왔지만, 돌아보면 정서적으로 보살핌을 거의 받지 못했다는 외로움에 빠지기도 한다.
옛 추억을 통해 삭막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려 하곤 한다. 애인 같은 아내를 꿈꾸기도 하는데 40대 중반 이후 남성들의 전형적인 심리변화로 지적된다.
이처럼 남녀 모두 서로에게서 위안을 찾기보다는, 동창회나 각종 친목 모임을 통해 심리적 위로를 찾으려는 경향도 커진다.
부부가 이제 자녀 교육과 집안 경제를 어느 정도 안정시켰다면, 본격적으로 각자도생 혹은 각자 취미를 시작하는 시기다.
여성들은 대부분 집안일과 자녀 양육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남은 인생에서 늦기 전에 사회적 관계를 다시 살려보거나, 세상 곳곳을 여행하고 싶은 욕구가 커진다.
반면 남성들은 오히려 가정이 점차 더 편안한 공간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점심때 밖에서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저녁은 집에서 먹는 밥이 입에 가장 달게 느껴진다고들 한다.
이렇게 남편은 집으로, 아내는 세상 밖으로 서로 엇갈린다. 남편 입장에서는 가족과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아내는 오히려 바깥 모임, 운동, 문화, 예술 활동, 여행이나 취미 생활 등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려 한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섭섭함을, 아내는 귀찮음이나 답답함을 호소한다.
‘아내가 곰탕을 푹 달이면 며칠 외출할 준비를 하는 신호’라는 농담이 있다. 이는 가벼운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만큼 부부의 생활 패턴이 서로 달라지는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편은 뒤늦게 가정과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평생 가족을 부양하고 사회에서 치열하게 일해 왔지만, 정작 정년으로 퇴직을 앞두게 되면 인생의 목표가 명확히 보이지 않는 공허함이 몰려온다. 그리고 뒤돌아보니 내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결국 아내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식들은 이미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났고 하루 한 번 전화 통화하기도 쉽지 않을 만큼 바쁘다. 남편은 아내에게 의존하고 싶어 한다. 아내 의존도가 100퍼센트가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아내는 이제 자식들 다 출가시키고 마음의 짐을 덜어낸 제대군인 심정이 된다. “여태 나는 가족이라는 전쟁터 최전방에 있었다. 이제 내 인생을 좀 제대로 살고 싶다” 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자유 시간을 꿈꾼다. 애타게 남편을 기다리며 외로움을 느꼈던 아내들은 60대에 이르러 이젠 내가 밖에서 재미를 좀 찾아보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남편은 집안에서 함께 지내길 바라는 마음이 강해지고, 아내는 바깥세상에서 더 많은 관계와 경험을 찾고 싶어 하니, 젊었을 때와 반대로 역전되는 셈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어디 늙은 다음에 보자”라는 아내의 속마음이 실제로 실현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고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씩 상실하기 시작한다. 한국 남성의 50%가 70대에 상실을 한다. 건강이 최고로 문제가 되죠.
몇 년 전 일본에서 70대를 대상으로 “노후를 누구와 보내고 싶은가?”라는 설문조사를 했을 때, 남성의 69%가 반드시 아내라고 답한 반면, 여성의 66%는 “절대 남편과는 안 보낸다” 하고 응답했다. 이는 우리나라도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이사 갈 때, 아내가 자기를 놓고 떠날까 봐 ‘남편이 이불짐 위에 앉아서 버틴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부부가 맞이하는 노년에 그간 쌓였던 감정의 골이 극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는 점에서 좀 씁쓸하기도 하다.
인생이 마라톤이라면 부부는 오랜 세월을 함께 달려가는 동반자 관계다. 그 여정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갈등과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따라 마지막에 서로에게 의지하고 싶은 지붕 아래의 안식처가 될지, 아니면 회피하고 싶은 갑갑한 울타리가 될지 결정된다.
부부의 일생이란 사랑과 책임, 갈등과 화해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길이다. 나이가 들수록 가정이 소중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밖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부부의 일생은 결국 드라마와 같다. 그 드라마의 결말은 각자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조금 늦게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