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팩트시트 이후 한국이 가야 할 길
— 한·미 팩트시트 이후 한국이 가야 할 길
세계 경제는 숫자와 그래프의 언어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국가들은 시장의 논리만큼이나 안보의 추구, 기술의 선점, 그리고 전략적 생존이라는 오래된 감정의 언어를 함께 사용한다.
어제 한·미 양국이 발표한 팩트시트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는 관세의 표를 넘어서, 경제가 외교와 안보의 영역으로 속속 이동하는 시대의 흐름이 담겨 있다. 비록 최종 협의가 아닌 방향성 제시의 문서라 하더라도, 이번 합의는 한국 산업의 미래가 어디에서 새롭게 자리 잡아야 하는가라는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지나 ‘전략적 협의의 시대’로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기업들은 미국의 관세 정책 변화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타듯 흔들렸다. 특히 제조업 중심의 한국 경제는 관세 정책 하나로도 기업의 수익, 외환시장, 투자 계획이 뒤틀리는 구조였다.
이번 팩트시트에서 미국은 일부 한국산 제품에 적용하던 고율 관세를 최대 15% 수준으로 완화하겠다는 방향을 밝혔다. 이는 단순히 부담을 덜어주는 조치가 아니라, 무역 정책을 정치·안보·동맹의 범주 안에서 공동 조정하겠다는 신호이다.
미국의 산업정책은 이제 ‘공정한 시장’이 아니라 “누가 미국 내 공급망을 더 안전하고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가”라는 질문에 의해 좌우된다. 한국이 미국의 새로운 산업·안보 구도에 필요한 파트너라는 점이 이번 합의 뒤에 놓인 기본 전제다.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국부 유출인가, 전략적 교환인가
팩트시트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한국의 대미 투자 약속 규모다. 공식적으로는 총 약 3,500억 달러가 거론된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일방적으로 당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즉시 제기됐다. 기술·설비·인력까지 미국으로 이전되는 구조는 곧 국내 산업의 공백화(hollowing out)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문제는 “손해냐 이득이냐”의 단순 이분법으로 해석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투자의 본질이다.
첫째,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는 것은 ‘돈’보다 ‘기술’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구조적 전략의 일부다. 반도체·배터리·첨단 제조는 이미 미국이 “국가안보 기반 산업”이라고 규정한 분야이고, 중국은 이 영역을 국가적 총동원 체제로 한국에 바싹 따라붙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기술과 생산능력을 통해 중국의 추격을 지연시키길 원한다.
둘째, 미국 시장은 여전히 세계 최대의 고부가가치 제조 플랫폼이다.
한국 기업이 미국 내 생산 기반을 갖추는 것은 세계 시장 지배력 유지에 필수적인 경로다. 과거 삼성·현대자동차·LG가 중국 대신 미국에 공급망을 구축했듯, 앞으로의 글로벌 산업구조에서 미국 내 생산기지는 곧 국제 경쟁력을 의미한다.
셋째, 문제는 ‘국내로 무엇이 돌아오는가’이다.
해외투자가 반드시 국부 유출일 필요는 없다. 해외에서 생산·판매된 가치가 국내 기술·인력·생태계로 역순환(reshoring)되는가, 혹은 미국 현장에서 축적한 경험이 국내 혁신을 촉발하는가로 판단해야 한다.
중국과 한국: ‘옆 나라’가 아니라 ‘같은 품목을 만드는 나라', 이미 경쟁자
중국은 더 이상 값싼 노동력의 생산기지가 아니다. 산업 전반이 고속으로 고도화됐으며, 한국의 주력 산업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왔다.
전기차 배터리: CATL은 세계 점유율 1위
선박 건조 및 수주: 점유율 70% 로 세계 1위
디스플레이: LCD는 이미 한국을 완전히 추월
스마트폰 부품·반도체 장비 일부는 중국이 빠르게 잠식 중
AI·로봇·전력설비는 국가 보조금을 기반으로 공격적 확장
한국이 중국에 수출할 수 있는 품목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반대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수입품은 계속 늘고 있다. 언제든 무역수지 역전이 일어날 수 있는 구조이다.
이 상황에서 미국과의 협력은 단순히 “동맹 강화”가 아니라 기술적 독립성과 시장 지분을 선점하여 확보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미국이 한국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단순한 정치적 동맹이 아니라 한국이 가진 기술 역량이 중국의 부상 속에서 미국의 산업 근간을 지키는 데 직접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합의는 한국이 “경쟁의 방어막을 얻는 기회, 위협받는 시장지분을 지킬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회는 자동으로 기회가 되지 않는다 — 제조업의 비어 있음(Hollowing Out). 대미 투자를 계기로 한국 제조업의 핵심이 빠져나가고 국내에는 껍질만 남을 수 있다는 우려는 실제로 발생 가능한 시나리오다.
① 인력 유출
생산 엔지니어, 공정개발자, 연구인력들이 미국 공장으로 이동하면 국내 R&D 속도는 필연적으로 늦어진다.
② 공급망 약화
대기업이 해외에서 생산하면, 그 주변에서 기술을 배우며 성장해야 할 중소 협력사들은 기회를 잃는다.
③ 내수 생태계의 약화
제조업 기반이 약해지면 지역경제, 일자리, 기술 인프라가 동시에 흔들린다.
④ 달러 자금 조달로 인한 금융시장 불안
대규모 해외투자 시기와 환율이 겹치면 금융시장은 언제든 흔들린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투자를 어디에 하느냐’보다 ‘무엇을 남기느냐’다.
한국의 전략: 해외투자는 허용하되, 기술은 국내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1) 핵심 기술·설계·연구는 국내 고정 (Core-at-Home 전략)
미국 공장에 설비는 갈 수 있지만 기술·R&D 컨트롤타워는 반드시 한국에 두어야 한다. 기술의 중심이 국내에 있어야 생태계가 유지된다.
(2) 해외 근무 인력의 ‘귀환 설계(Return Path)’
미국 공장으로 간 엔지니어들이 다시 돌아와 국내 혁신의 주역이 되도록 경력 인정·세제 혜택·연구기금을 묶어야 한다. 이것이 진짜 ‘인력 순환’이다.
(3) 중소기업 보호가 아니라 ‘성장 기회 제공’
대기업이 미국으로 가는 만큼 중소기업에게는 디지털 전환·고도화·공공조달 기회를 주어 “새로운 먹거리”로 이동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만들어야 한다.
(4) 공공조달·국가 인프라로 새로운 내수시장 창출
국가·지자체가 신산업(반도체 장비, 그린에너지, 의료기기 등)을 일정 비율 구매해 안정적인 국내 시장을 마련해야 한다.
(5) 전략산업 R&D는 10년 단위로
산업이 사라지는 것은 기술의 중단에서 시작된다. 반도체·AI·배터리·양자·의약바이오·그린테크 등은 민간 주도에만 맡기지 말고 국가가 장기투자로 견인해야 한다.
미국과의 협력은 ‘종속’이 아니라 ‘상호보완’으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가 미국에 투자하는 것은 미국의 요구 때문만이 아니라, 미국 시장이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안정적이며 중국과의 경쟁이 심화된 지금 ‘최적의 생산거점’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미국에서 얻는 이익을 한국 산업생태계에 되돌아오게 만드는 구조를 구축하는 것. 그렇다면 해외투자는 국부유출이 아니라 국부의 확장, 기술영역의 확장이 될 수 있다.
국민의 성찰 — 성장과 안전, 그리고 지속가능성 사이의 균형
국가 정책은 기업의 경제성과 국민의 장기적 이익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대기업은 글로벌 경쟁력 유지를 위해 해외투자가 필요하다 말하고, 국민은 국내 일자리·기술·산업 생태계를 걱정한다.
둘 중 하나가 옳고 나머지가 그른 것이 아니다. 이 둘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음 세대를 위한 동일한 염려에서 나온 목소리다. 국민이 성찰해야 하는 지점은 이것이다.
우리는 ‘가격 경쟁력’이 아닌 ‘기술 경쟁력’으로 성장해야 한다.
단기 이익보다 장기 생태계를 우선해야 한다.
산업 정책은 단순한 경제정책이 아니라 국가 생존전략이다.
한국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값싼 노동력과 규모로 경쟁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 아니면 혁신·기술·안보를 기반으로 한 고부가가치 국가가 될 것인가. 이번 한·미 팩트시트는 그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는 신호다.
결론 — 한국의 다음 10년은 ‘전략적 선택’에 달려 있다
우리는 관세 시대를 지나 지정학적 산업정책의 시대에 들어섰다. 이 시대에는
기술은 무기이고
산업은 안보이며
동맹은 곧 시장이고
투자는 생존전략이다.
한국이 이번 합의를 통해 미국 시장에서 입지를 강화하는 동시에 중국과의 기술 경쟁에서 방어막을 얻는다면 이것은 분명 성장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국내 제조업 생태계가 약화되고 기술의 뿌리가 해외로 옮겨간다면 그 어떤 시장성장도 결국 ‘속 빈 성장’으로 남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가야 할 길은 명확하다.
해외에서 확장하며, 국내에서 뿌리를 강화하는 이중 전략.
대미 협력을 지렛대로 삼되, 국내 제조업 생태계를 재정비하는 내실 전략.
기업의 해외진출을 허용하되, 기술·인재·핵심역량은 국내에서 단단히 키우는 성장 전략.
우리가 이 방향성을 제대로 설계할 수 있다면 이번 합의는 한국 경제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다. 한국은 다시 한번 세계 경제의 중심에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바로 지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