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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구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분단, 권력, 그리고 인간을 둘러싼 존재론적 물음

by 엠에스

<우리가 구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 분단, 권력, 그리고 인간을 둘러싼 존재론적 물음


한반도 문제는 언제나 단순한 지정학적 갈등을 넘어서, 인간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북한 문제를 논할 때 우리는 흔히 체제, 핵, 군사적 억지력을 말하지만, 사실 그 아래에는 더 근본적인 질문 하나가 가라앉아 있다.


우리가 구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이 질문은 기술적 또는 실용적 답변으로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 ‘권력은 왜 지속되는가’, ‘사람은 어디까지 타인의 운명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통일 논의는 단순히 정책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국가와 인간 사이의 균열 — 북한이라는 역설


대한민국 헌법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법적으로 북한 주민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북한을 사실상의 적대적 타자로 여긴다. 법과 현실 사이에 깊은 균열이 존재한다. 이 균열은 단순한 법적 모순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 공동체의 경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철학적 난제다.


한 개인을 ‘우리’로 포함시키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생명·안전·미래에 대해 일정한 책임을 떠안는다. 북한 주민을 ‘우리’라고 부르면서도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는 일종의 윤리적 딜레마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문제는 이렇게 정리된다. 북한 주민은 우리의 책임인가, 아니면 우리의 선택인가?

만약 책임이라면 그들은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만약 선택이라면 우리는 상황에 따라 그들을 외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명확히 하지 못했다. 그 결과 대북정책은 감정과 현실 사이를 방황하며, 일관성을 잃었다.


권력의 본질 — 북한 정권은 왜 변하지 않는가


북한 정권은 단순한 독재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고난의 체제’(Regime of Hardship)라 불릴 만한 독특한 지속 구조를 갖는다. 이 체제는 주민의 고통이 체제의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성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빈곤은 불만의 원인이 아니라 충성의 조건이 되고,

외부는 풍요의 상징이 아니라 적대의 근거가 되며,

지도자는 실패의 원인이 아니라 버팀목으로 신화화된다.


이에 더해 핵무기는 이 체제가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도구가 된다. 핵은 협상 수단이 아니라 체제의 정체성 자체다. 핵을 포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존재 이유를 해체하는 일이다.


따라서 북한 정권이 스스로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없다. 마찬가지로 권력을 내려놓을 이유도 없다. 권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체제의 유일한 자기 정당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냉정한 사실 하나와 마주한다. 현 체제가 유지되는 한, 자발적 비핵화도 자발적 개방도 기대할 수 없다.


이는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철학적 분석이다. 권력이 구조로 고착된 체제는 외부 압력이나 내부 기대만으로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난 수 십 년 동안 변하지 않는 권력, 체제와 대화를 해왔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그 길만을 걸어며 외면해 왔다. 이젠 그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통일 논의의 허상 — ‘체제 통일’인가, ‘인간 통일’인가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통일을 “선한 목적의 귀결”처럼 묘사해 왔다. 하지만 통일은 선의의 실현이 아니라 권력·경제·인구·문화가 충돌하는 거대한 구조 변화다.


독일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를 ‘우리 쪽’으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통과 불안을 함께 짊어지려는 윤리적 결단이라고 말했다. 통일 역시 마찬가지다. 통일은 정치적 합의가 아니라 인간적 결단이다.

북한 주민을 2천만 명의 타자가 아니라 한반도 공동체의 미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들이 겪은 빈곤·폭력·통제의 경험이 단숨에 치유될 것이라 믿는가?

그들의 사회적 상처와 남한 사회의 무관심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떤 가치를 선택할 것인가?

한국 사회는 이에 대해 깊이 성찰한 적이 없다. 그래서 통일은 구호가 되었을 뿐, 과제는 되지 못했다.


새로운 대북 전략 — ‘체제 변화’보다 ‘인간 변화’에 집중하라


북한 문제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대상은 ‘정권’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다. 따라서 대북정책은 “정권의 의지를 바꾸려는 정책”에서 “주민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정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인도주의가 아니다. 인간의 삶이 변화하면, 체제는 구조적으로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① 억지력은 조건이지만 목적은 아니다

평화를 지키는 힘은 필수다. 그러나 힘은 안전을 제공할 뿐, 미래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미래는 인간을 향할 때 열린다.


② 정보는 자유의 첫 징후다

칸트는 인간을 “자기 이성의 공적 사용이 가능한 존재”라고 했다. 정보 접근은 주민이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라디오, 인터넷, 외부 콘텐츠, 문화 유입은 체제를 직접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위협적인 변화의 씨앗이 된다.


③ 인도적 지원은 권력을 강화하지 않고 주민을 강화해야 한다

단순한 식량 지원이 아니라 의료, 교육, 보건, 농업기술 등 주민 역량을 높이는 방식이어야 한다. 이는 체제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의 자립 능력을 키우는 길이다.


④ 국제공조는 ‘승자 없는 균형’을 만들어야 한다

한반도 문제는 어느 한 국가의 승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미국·중국·러시아·일본·EU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는 다층적 구조 속에서 대한민국은 주체적 전략을 세워야 한다.


국민적 성찰 — 통일은 이상이 아니라 ‘책임의 형식’이다


우리는 종종 통일을 민족적 이상으로 말해왔다. 그러나 통일은 이상보다 책임의 형식이다.

우리는 북한 주민의 고통을 외면한 채 “하나의 민족”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사회적 수용 능력을 준비하지 않은 채 “하나의 국가”를 약속할 수 없다.

우리는 통일 이후의 갈등과 비용을 감당할 준비 없이 “역사적 사명”을 말할 수 없다.

통일은 감정이 아니라 능력의 문제다. 의지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선언이 아니라 세대적 준비의 문제다.


결론 — 우리가 구해야 할 대상은 결국 ‘인간’이다


정권은 바뀌고 체제는 무너질 수 있지만, 인간은 남는다. 민족의 정체성은 변할 수 있지만, 삶의 존엄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해야 할 대상은 북한의 권력이 아니라 북한의 인간이다. 통일의 목표는 체제의 흡수가 아니라 삶의 회복이어야 한다. 정치적 승리가 아니라 윤리적 책임의 실천이어야 한다.


한반도의 미래는 결국 “우리는 누구를 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어떤 답을 내리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답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선택하는 철학 속에서 이미 결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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